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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70

젊은 날의 한 그루 갈매나무에 대하여

by 인상파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씨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氏逢方)>


젊은 날의 한 그루 갈매나무에 대하여


이 시를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후반 대학원 시절이었다. 제목에 붙은 한자들은 읽기조차 버거웠고, 무엇보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제목 자체가 어떻게 시의 제목이 될 수 있나 싶어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 낯선 제목을 제쳐두고 작품 속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한 은둔형 젊은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춥고 외로운 방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그 모습이 어찌나 내 젊은 그때의 모습과 닮아 있던지, 외면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 붙잡히듯 시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말았다. 누군가 내게 ‘너의 시는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고 답할 것이다.


특히 나는 화자가 말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한다”는 그 문장을 절대적으로 공감하며 읽었다. 슬픔을 한입에 삼키지 못해 몇 번이고 씹고 또 씹는 마음, 그 되새김질 끝에 결국 스스로에게 짓눌려 죽을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심정.


그 고백을 받아든 순간, 젊은 날의 나는 시대와 장소가 다름에도 나와 똑같은 마음을 안고 살아간 이가 있었다는 사실에 강한 연대감을 느꼈다. 화자는 부끄러울 것도 감출 것도 없는 자신의 생을 숨기거나 과장하지 않고 담담히 그린다. 그 담담함 속에는 축축하고 어두운 기운이 배어 있어 방 안의 눅눅한 공기처럼 시 전체에 깔린다. 그 눅눅함이야말로 내가 젊은 시절 안고 다녔던 불가해한 감정의 색조와 닮아 있었다.


왜 그 시절에는 세상을 등에 지고 적막강산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을까. 그처럼 가족과 떨어져 지낸 것도 아니고 돌아갈 집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건 과장된 시어도, 꾸며낸 절망도 아니었다. 그때 실제로 내가 통과하고 있는 감정의 골짜기가 딱 그랬다.


그러나 백석의 시가 내게 더 깊은 울림을 준 건 바로 그 다음이었다. 그때 그는 ‘그 드물고 정하다’는 갈매나무를 떠올린다. 삶에는 제 힘으로 떠받치기 어려울 만큼 높은 뜻이 실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였다. 먼 산 바위섶에서 눈발을 그대로 맞으며 서 있던 한 그루의 갈매나무.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보여질 필요 없이, 그저 제 자리에 외롭게 서 있던 그 나무. 그 나무에게 오래 발이 묶였다.


갈매나무. 외롭고, 쓸쓸하고, 고달픈 존재. 그러나 어떤 말이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고, 그저 서 있는 것으로 버티는 나무. 화자는 바로 그 나무에서 자기의 생을 견뎌낸 한 인간의 운명을 보았으리라. 그리고 나 역시 그 나무에서 내 삶의 한 페이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드물고 정하다는 갈매나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비추어본다. 자신보다 더한 고독과 고난 속에서도 묵묵히 버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마침내 화자에게 하나의 버팀목이 된다. 그 나무가 그에게 그러했듯, 이 시는 나에게도 한 시절을 버텨내게 했던 은밀한 지지대였다.


나는 마지막 장면을 종종 상상한다. 화자는 결국 발신지에서 문을 나선다. 앞으로도 집 없는 사람으로 떠돌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떠돎은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허기와 고달픔, 외로움에 압도되어 무너져버리는 삶이 아니라, 갈매나무 한 그루가 눈발 속에서 제 뿌리를 지키듯 자기 힘으로 버틸 수 있다는 작은 믿음을 품고 떠나는 길이다. 이제 그는 슬픔과 외로움을 소처럼 되새김질하는 일을 그리 자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갈매나무. 나는 가끔, 갈매나무 같은 사람이 내 인생에 들어오면 핸드폰에 그 사람의 이름을 ‘갈매나무’라고 저장해두곤 한다. 그 사람의 실명이 아니라, 갈매나무로. 고독을 견디는 방식이 닮은 이에게 붙여주는 나만의 애칭이자, 나만의 은밀한 경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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