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처럼 서러워
백석의 「여승」
불경처럼 서러워
백석의 「여승」을 읽을 때면 늘 궁금했다. 시 속 여승과 시적 화자는 과연 어떤 사이였을까. 한두 번 스쳐 지나간 인연이었다면 여인의 지난한 과거를 그렇게 세세하게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금점판에서 어린 딸을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던 그 순간은 물론, 집을 나간 남편이 십 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어린 딸마저 세상을 등져 혼자의 몸이 되어 비구니의 길을 택하게 된 내력까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저 지나가던 타인이 아니라 여인의 삶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던 인물이지 않았을까. 게다가 속세의 인연을 끊고 여승이 된 지금도 둘은 다시 만났다. 이것은 보통 인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 둘 사이엔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한 번 어긋났으나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은 인연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게 상상하고 나면 가난과 불행으로 점철된 여인의 삶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남자의 마음은 얼마나 쓰리고 저렸을까 싶다.
나는 오랫동안 ‘가지취’를 ‘가지’로 오독해 왔다. 단맛도 짠맛도 나지 않는 그 맹탕의 가지 맛이 여승에게서 풍기는 느낌이라고 여겼고, 생가지를 베어 물었을 때 입술에 남는 파리한 자주빛이 여승의 쓸쓸한 얼굴과 묘하게 맞물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가지가 아니라 가지취였다. 가지의 냄새도 아니다. 가지취는 실제 존재하는 산나물로, 백석의 고향 평안도에서도 흔히 먹던 야생 취나물이다. 깊은 산 그늘에서 자라는지라 향은 강하지 않고, 어둑하고 적요한 산기슭에서 은근히 풍겨오는 것이 슬프고 가난하며 오래 묵은 냄새를 연상시킨다. 그 사실을 알고 나자 여승에게서 난다는 가지취 냄새가 전혀 다른 깊이로 다가왔다. 그 냄새는 여승의 몸에 밴 세월의 냄새이자, 그 여인의 지난한 인생이 남긴 체취였을 것이다. ‘가지취’를 가지라고 오독해 온 세월 동안 시의 깊은 한 층을 놓치고 있었던 셈이다.
화자는 그녀의 낯에서 ‘옛날같이 쓸쓸한 표정’을 보았다. 전과 다를 바 없는 늙은 얼굴을. 그 쓸쓸하고 늙은 얼굴은 금점판에서 옥수수를 삶아 팔던 시절에도, 여승이 되어 산문을 드나드는 오늘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속세를 떠나 여승이 되었으니 번뇌를 조금은 내려놓았을 법도 한데, 여인의 얼굴에서 속세 때의 그 쓸쓸함이 보였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그런 여인을 보고 화자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고 말한다. 불경처럼 서러워졌다니. 이 의도적인 낯섦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불경은 모든 인생이 무상하며 고와 락이 인연 따라 흘러간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바로 그 불경의 내용처럼 여인의 삶은 무상과 고와 인연의 비애를 전부 담고 있지 않은가. 그런 여인의 삶을 떠올리니 화자는 불경처럼 서러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여승이 되기 전 여인에게는 남편도 있었고 나어린 딸도 있었다. 화자는 그녀가 어린 딸을 데리고 평안도 어느 금점판에서 옥수수를 팔며 연명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때의 여인은 건강이 좋지 않아 안색은 파리했고, 운명에 저버린 삶을 어찌할 수 없어 마침내 어린 딸을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가을밤같이 차게’ 운다는 것, 감정조차 말라버린 울음이다. 그녀가 때린 것은 아이가 아니라, 실상 풀리지 않는 자신의 고된 삶 전체였을 것이다.
남편은 십 년을 기다렸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객사한 몸일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어린 딸마저 세상을 등졌다. 속세에 그녀를 붙들어두던 끈들은 그렇게 끊어졌다. 여인은 산절의 마당에서 머리를 밀고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 그 순간 산기슭에서는 산꿩이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 울음은 여인의 마음을 대신한 것일까, 아니면 화자의 마음을 대신한 것일까. 아마 둘 다였지 싶다.
끝내 두 사람은 세속인과 산승으로 남았다. <여승>은 여인이 여승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고달프고 쓸쓸한 인생사를 그리면서 또한, 그걸 지켜봐야 했던 한 남자의 슬프고 서러운 눈빛을 겹쳐보여준다. ‘불경’처럼 무상하고, ‘불경’처럼 서럽고, ‘불경’처럼 오래 남는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