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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78

미완의 자화상

by 인상파

윤동주의 〈자화상〉


미완의 자화상


읽어도 읽어도 제목에 부합하지 않는 시를 꼽으라면 윤동주의 〈자화상〉을 꼽겠다. 난해하다기보다 지나치게 평이해서, 겹쳐진 층이 있을 것 같아 들여다보아도 비어 보이고, 숨겨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귀를 기울여도 끝내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나의 한계인가 싶어 마음이 조금 초라해지기도 한다. 윤동주의 〈자화상〉은 그렇게 나를 자꾸 돌아보게 하는 시다. 자화상이라 했지만, 정작 자화상 따위는 없다고 오리발을 내놓고 도망치는 시다.


우물가에 선 사나이의 얼굴도, 우물 속 사나이의 얼굴도 끝내 선명해지지 않는다. 남는 것은 다만 감정의 물결—미워졌다가 가엾고, 가까이 다가섰다가 다시 멀어지는, 바람이 스친 우물의 물결처럼 흔들리는 감정의 왕복뿐이다. 이 흔들림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보는 너무나 보편적인 마음이라 깊은 성찰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심심하고, 특별한 발견이라고 하기에는 한없이 얕다.


그러고 보면, 이 시에서 초상이라고 여겨지는 사나이는 ‘추억처럼’이라는 한 단어 속에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추억처럼이라는 말은 또 얼마나 공허한가. 잡으려 하면 흩어지고, 가까이 두려 하면 오히려 멀어지는 기억의 가벼운 먼지 같은 것이 아니던가. 시인은 그 불안정한 감정의 바닥을 자화상의 토대처럼 내어놓는다. 그러니 우물 속 사나이는 실체를 갖지 못한 채 그저 ‘추억처럼’이라는 말 뒤에 따라붙을 뿐이다. 얼굴을 잃은 초상, 형상을 갖지 못한 그림자. 그래서 이 시는 완성된 자화상이 아니라 자기 얼굴을 끝내 찾지 못한 청년의 고뇌가 남긴 빈 자리처럼 보인다.


왜 시인은 이런 ‘얼굴 없는 초상’을 자화상이라고 불렀을까. 왜 이렇게 평범한 감정의 오르내림을 새로운 초상처럼 내놓았을까. 그러나 평범함 속에서 그 시대의 고독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개인이 쉽게 지워지고 말았던 시대— 일제강점기라는 어둡고 눌린 시간 속에서 한 청년이 자기 얼굴을 온전히 그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과제였을 것이다.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없고, 불러야 할 이름을 부를 수 없었던 시대에 자기 얼굴을 그린다는 행위는 애초에 봉쇄된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물 속 풍경이 지나치게 평범한 것도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달빛, 구름, 바람, 가을 같은 일상의 자연물들. 어쩌면 시인은 그 평범한 자연물에서나마 자기 존재의 조각을 찾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평범함조차 마음껏 붙잡기 어려웠던 시대였으므로 그 평범함이 오히려 절실한 희망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다.


학창시절 나는 윤동주의 〈자화상〉을 자아 성찰이라는 내면의 언어로 배웠다. 미움–가엾음–그리움의 단순한 감정 교차는 누구나 겪을 법한 흔한 마음인데도 교과서는 이 평범한 감정의 왕복 주기를 윤동주의 깊은 내면 성찰로 읽도록 유도했다. 그 말을 그대로 믿었고, 시인이 우물이라는 거울 앞에서 자기 마음을 고결하게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읽어보면 이 시는 성찰에 이르렀다는 증거가 아니라, 성찰에 닿지 못한 자리에서 맴돌던 청년의 혼란과 공허에 더 가깝다. 우물은 깊지만, 그 깊이를 열어젖히지 못하고 평범한 자연물만 비치는 자리. 달과 구름과 바람과 가을이 또렷한 상징이 되지 못하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얼굴로 머무는 자리. 그 자리에서 시인은 자신의 얼굴을 그리려 했으나 끝내 그릴 수 없었던 미완의 초상을 남긴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실패작이라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완성작이라 부를 수도 없다. 그저, 미완의 자화상이라고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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