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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상파 Mar 20. 2024

간병일기 37

신문과 약

신문과 약


어제 남편의 기상이 평상시보다 빨라서 잠잘 시간을 서둘렀다. 솔직히 내가 피곤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게 하고 싶었다. 내가 잠들 때 일이 터지면 안 되니 남편을 재우고 싶었던 것이다. 남편에게 밤 9시 무렵부터 씻고 자자고 재촉을 했다. 남편은 5분만 기다려달라고 하더니 5 분을 기다리고 나니 10분이 되었고, 그 10분은 금세 20분이 되었다. 그렇게 점점 늘어난 시간은 1시간, 2시간이 되었다. 찢긴 신문 한 자락의 기사만 읽겠다고 하기에 그러시라고 하면서 기다렸다. 그런데 읽는다는 부분은 안 읽고 딴 부분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여보, 얼른 읽고 들어갑시다. 아들 녀석이 아빠를 기다리고 있잖아요.” 

녀석도 거둔다. 

“아빠, 졸려요. 빨리 들어가 자요.” 

녀석의 말에 그러겠다고 대답은 하는데 잠깐 기다리란다. 쉽게 들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읽는 순간 잊을 것을 저렇게 지극 정성으로 몸에 새기고 있구나, 짠하고 안쓰러워서 보채지는 못하고 그저 남편에게서 등을 돌리고 앉았다. 


읽는 즉시 휘발될 걸 읽고 또 읽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형벌이냐. 육체와 정신의 차이일 뿐이지 남편의 저 망각은 시지푸스의 바위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하되 함이 없는 행위의 허망. 읽자마자 망각의 나락으로 떨어지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언덕으로 바위를 굴러야하듯, 읽고 또 읽어야 할 뿐이다.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녀석을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자는 것을 보고 거실에 나와 보니 아직도 신문을 뒤적이고 있다. 상대를 무시하려고 작정한 것이 아님을 잘 알면서 지친다. 나의 기분은 이상하게 꼬였다.

아들 녀석이 자다가 깨서 무섭다고 거실로 나와 징징거린다. 자다 말고 나와 엄마 옆에서 보초를 설 태세다. 나는 남편을, 아이는 엄마를 기다린다. 피로하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말을 듣지 않고 제 할일만 하고 있는 남편이 못마땅하다 . 실은 자신이 무얼하고 있는지도 모를 터인데 그런 남편을 향한 내 말투는 곱지 않다. 남편은 왜 자기한테 시비냐고 언성을 높인다. 상황을 설명하자 남편은 신문도 맘대로 보지 못하냐고 불평을 한다. 그래, 여보, 신문을 보시라.


기다렸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남편에게 부탁을 한다. 그제사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직행한다. 이를 먼저 닦아야한단다. 나와 함께 이를 닦고서도 안 닦았다고 하니 다시 닦게 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 나서 발을 닦는다. 화장실 근방까지 가서는 신발을 정리한다. 


약 생각이 났나보다. 왜 약을 안 주냐고 묻고는 약을 달란다. 약을 이미 먹었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 또 시작이구나. 잠자기 전 남편의 약에 대한 집착은 병적이다. 잠들기 전의 일과가 이제 시작된 셈이다. 식탁으로 물을 마시러 간다. 소파에 앉아있는 내게 다시 묻는다. 

“왜 약을 안 줘?” 

“저녁 먹고 밤 9시쯤 약 먹었습니다.” 

“그런가?” 

화장실에 들어가 이를 닦고 나서 소파에 앉는다. 

“여보, 왜 그러고 앉아있어요? 어서 씻고 자야지요.” 

“힘들어. 쉬었다가 발을 닦아야겠어.” 

발까지 닦고 나올 시간이어서 발을 확인했지만 물기 없는 건조한 발이다. 더 기다려 안방까지 어느 세월에 가랴 싶어 옆에 있는 아들 녀석을 데리고 결국 나는 안방으로 들어간다. 아들 녀석이 등을 긁어달라고 등을 들이댄다. 등을 긁으면서도 거실의 남편에게 신경이 곤두서 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내 입에서 무심결에 '운명이다.'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운명. 당신이 쓰러질까 봐 노심초사하지만 당신이 쓰러지더라도 어떤 도움을 줄 수 없다. 대신 쓰러져줄 수도 없고 대신 아파해줄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도 당신을 내 앞에 두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 내 면전에서 당신이 쓰러져야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발작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 그걸 망각하고 당신에게 이렇게 매달리는 것인가. 내가 불안하다고 당신을 내 시야에 두려는 것은 얼마나 이기적인 행동인가.


늦은 밤 시간까지 신문 보는 것을 금하지 말 것이며, 책상에 오래 앉아 인터넷을 검색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되리라. 신문을 볼 날도 인터넷을 검색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지 모르니. 운명이라는 것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비몽사몽간에 남편이 들어오는 기척을 느꼈다. 남편의 불편한 숨소리를 듣느라 내 숨소리를 죽인다.


남편은 잠에 빠져들었지만 그때부터 나는 잠을 이루질 못한다. 남편에게 강박된 마음이 천근만근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과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자. 남편을 보살피는 것은 전적으로 내 몫이지만, 내 한계 밖의 일까지 간섭하려 들지 말자. 내 소관 밖의 일을 탐내서는 안 된다. 그럼 내가 무너지고 말 것이다.(2011년 1월 3일 일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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