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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상파 Mar 22. 2024

간병일기 39

페니토인

페니토인


여보, 당신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하시구려. 그 마음이 마음일까마는. 상황은 나빠지고 있고 이보다 더하게 되면 그때 당신에게 신문과 인터넷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나마 지금이 당신에게는 가장 좋은 시절일 수 있겠지요. 그걸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지요. 


오늘도 당신은 어제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합니다. 씻으러 욕실로 가다가 방향을 틀어 현관의 신발을 정리하고 생각난 듯 약을 찾습니다. 약을 먹어야 하는데 무슨 약인지 모르겠다며 곤혹스러워하면서요. 

“여보, 당신 아까 저녁 먹고 아홉시 쯤 약 먹었어요. 하루에 세 번 아침 8시, 오후 2시, 밤 9시 이렇게 세 번 먹는 약 이미 다 먹었어요. 지금 밤 11시가 넘었지요? 약을 이미 먹은 거예요.” 

“약 안 먹은 줄 알았는데. 그랬어? 그래 한 번쯤 안 먹어도 되지, 뭐. 알았어.” 

정말 말짱한 정신으로 돌아서기에 이제 약을 안 찾겠지, 하고 생각하기 무섭게 당신은 다시 약을 왜 안 주냐고 묻더군요.


페니토인(항경련제)은 복용했으니 안심이다, 저렇게 까마귀 고기 먹은 사람처럼 행동을 해도 별탈은 없을 거야 하면서 위안을 삼았습니다. 엄마가 옆에 없으면 잠을 못 자는 아들 녀석을 재워야 해서 제 꽁무니를 따라 다니는 아이를 데리고 우선 안방으로 들어갔지요. 녀석을 재우면서도 어서 빨리 당신이 안방으로 들어오기를 빌었습니다. 이 소박한 바람이 참으로 간절하고 큰 욕심으로 여겨졌습니다.

 

잠자리에 누워, 사는 것이 쉽지 않구나, 그만 저는 약해지고 말았습니다. 눈물이 볼 위로 타고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인해야, 아빠가 한 일을 자꾸 잊고 저렇게 기억을 못하니 속상하지?” 

“응” 

“아빠가 참 안 됐지? 그래도 아빠 무시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아프기 전에는 아빠도 박사님처럼 아는 게 많았지? 아빠도 지금 힘들 거야. 우리가 아빠한테 우리 기억을 빌려드려야겠지?” 

“응” 

녀석의 대답에 축축한 물기가 배어 있었습니다. 녀석도 아빠 때문에 속상한 거겠지요. 이제 아빠라는 사람은 한 일도 안 했다고 잡아떼고 금방 한 일을 잊어버린, 이상하고 바보같은 사람이 되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아이는 아이입니다. 금방 곤한 잠에 곯아떨어졌습니다.


자는 아이의 숨소리를 듣고 있는데 거실 책상 서랍을 뒤지는 소리가 들려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당신은 잠자기 전에 먹는 약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책상 서랍에 있는 약을 부엌 수납함으로 옮겼습니다. 제가 모르는 사이 당신이 약을 또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아찔해졌습니다. 


이제 자자고 했더니 씻고 자야한다고 하더군요. 아까 다 씻었다고 해도 씻지 않았다고 당신은 강력하게 부인했습니다. 물 묻은 칫솔을 보여줘도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점심 때 쓴 칫솔이라고 우겼지요. 

“그래요. 여보, 그럼 칫솔질하고 잡시다.”


욕실 문을 열어놓고 저는 당신이 다시 칫솔질을 하는 것을 지켜봅니다. 세수하고 나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코 주변의 건선피부로 벗겨진 살갗을 뜯어내느라 시간을 잡아먹더군요. 저는 기다립니다. 기다리기로 한 생각을 바꿔 소파에 앉아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언제일지는 몰라도 일이 다 끝나면 화장실에서 나오겠지 싶어서요. 


의외로 일찍 당신은 화장실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 하던 맨손체조를 몇 번 하더니 츄리닝 바지를 벗고 다시 운동을 해야 한다고 내복 차림으로 밤 운동을 합니다. 저도 당신을 따라 몸을 놀립니다. 하루가 저문 게 아니라 날이 새려 합니다. 고맙게도 당신은 약을 찾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갑니다.(2011년 1월 5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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