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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상파 Mar 26. 2024

간병일기 43

어두운 풍경

어두운 풍경


밤이 두렵다. 남편의 이상 행동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대충 씻고 또는, 씻지 말고 잤으면 좋겠는데 해오던 습관이 있어 그냥 넘기지 못한다. 무서운 게 습관이구나. 밤마다 밟아온 절차를 몸이 기억하고 있어 그걸 쉽게 놓지를 못하는구나. 강박이다. 그걸 하지 않으면 잠들 수 없는.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고 했는데 정말 그럴까.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서 벽을 느낀다. 지금의 남편, 한때 사랑한 그 사람임에 틀림없는데 마음이 그것을 부인하고 있다. 과거의 그가 아니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말은 하지 않지만 그것은 남편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차피 관계는 상대적인 것이니까. 눈에 보인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했는데, 지금 남편의 달라진 행동만이 눈에 보인다. 속에서 차고 넘쳐서 외양으로 드러나는 것이니 꼭 잘못됐다고 할 수도 없는 일. 달라진 내면이 외양으로 드러나고 그것이 간사한 눈이 판단하는 것. 마음에 육안이 있다면, 조금 덜 낯설게 볼 수 있을까.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 쓰다 보면 나 또한 남편과 같은 양상의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본다. 나는 남편이라는 행성을 따라 떠도는 또 다른 별에 지나지 않는다. 남편이 없으면 궤도를 잃고 추락할 것.


화장실을 간다던 남편이 딸아이 방으로 들어간다. 아, 그걸 보고 알았다. 남편은 집안 화장실마저 찾지를 못하게 되었구나. 혹시 그는 밤마다 안방을 찾아 헤맸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곧장 들어올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안방을 찾으면서 그걸 찾는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잠자리에 드는 시간을 잊어버렸듯. 방금 한 일을 잊고 처음한 사람처럼 시작하듯.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뒤통수에서 댕댕 종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한밤중이 되면 머릿속이 뒤죽박죽 돼 그나마 희미하던 기억조차 모조리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들어오겠거니 믿고 기다리다 지쳐 거실로 나와 잔소리를 해댔으니.


자다가 일어나 보니 거실 불은 꺼졌는데 옆에 사람이 없다. 또 소파에 앉아서 졸고 있겠거니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유리창에 시커먼 물체가 서 있다. 남편이다. 베란다 창문에 붙어 하염없이 바깥의 어두운 풍경을 내다보고 있다. 세상은 모두 잠들어 고요한 그 시간에 그는 바깥 어둠 속에서 무얼 보았던 것일까. 그런 남편의 뒷모습이 너무 아려서 아무 것도 물을 수 없었다.


뒤이어 운명을 알아보는 듯, 그의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깊게 패인 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 들어가 잡시다.” 내 목소리가 촉촉이 젖었다. 이를 닦고 발을 씻어야한다고 해서 그럼, 씻고 오라고 했더니 화장실 쪽으로 향하기는 하는데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책꽂이의 책을 훑는다. 치러야할 밤의 의식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뜻이리라.


평소와 달리 남편이 너무 차분하여 가슴이 벌렁거린다. 지금 남편은 나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불길한 생각이 자꾸 들어 잠자리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귀를 쫑긋 세운다. 그러다가 곤히 잠이 들었다. 몸은 풀린 것 같은데 기분은 영 일어설 줄 모른다. 


남편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죽음에서 남편을 빼돌릴 수 없다. 그것은 내가 감당할 몫이 아니다. 이 세상을 하직할 때 덜 두려운 상태에서 떠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손이라도 잡아주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서려하지 말자.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분별력을 갖추자. 목울대가 울렁울렁 울어댄다.(2011년 1월 10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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