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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마시멜로우 May 27. 2024

나의 첫 제자, 형진이

47살에 임용에 합격하고, 그동안 기간제로 근무했던 바로 그 학교에 정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같은 학교, 같은 학생, 같은 선생님, 변한 것은 없었으나 많은 것이 변했다.

우선 내 신분이 바뀌었다.

늦깎이지만 따끈한 신규들과 연수를 받고, 전교생 앞에서 대표 신고식을 하고, 그 해 겨울 학교축제 사회까지 맡았다. (축제는 전통적으로 신규가 맡는데 '가위 바위 보'에서 내가 져부렀다. ㅎ)

그중 가장 큰 변화는 내가 고3담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첫 제자가 생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때 형진이를 만났다.

구개구순열 수술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형진이는 세상 불만 다 갖은 표정을 장착하고 내와 첫 대면에 나섰다.

‘뭐지? 담임인 내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괜찮은 애라고 들었는데?’    


새 담임이 되면, 제일 먼저 전 학년의 개별화교육계획서와 학생의 상담기록, 치료 및 학습지원에 관한 서류를 살펴보게 된다.

그리고 공식적인 자료 외에도 전임 선생님에게 학생에 대한 정보를 구두로 인계받는 것 또한 관례다.     

전 학년 선생님은 형진이에 대해 할 얘기가 많아 보였다.

중학교 때 일반학급에 적을 두다 특수반이 되었고 고등학교 때 특수학교로 전학했다는 형진이, 짐작했던 대로 녀석의 중학교 생활은 구구절절 사연도 많고 탈도 많았다.

조금은 특별한 외모와 특수반이라는 라벨링, 미숙한 사회성과 학습에 대한 어려움이, 철없는 청소년들에게는 차이가 아닌 차별로 보였을 요소들이었다.

그곳에서 형진이는 각종 따따따(왕따, 은따, 대따, 몰따)를 겪으며 온 마음이 멍들어갔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녀석은 감수성과 예민함, 그리고 자존감이 높은 아이였던 것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 덧붙인다: 이 일은 10년이 훨씬 지난 얘기로,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언젠가 형진이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제가 공부를 못하지, 자존심이 없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딱! 천만배우 황정민이 떠올랐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그 당시 학교관계자와 선생님, 부모님들의 중재가 있었지만 형진이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고 충분한 사과와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도망치듯 특수학교로 넘어왔다던 형진이....

  

형진이는 주기적으로 학교 내 상담과 교외상담을 받고 있었다.

아직도 미해결과제로 남아 있는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진행형으로 형진이를 졸졸 따라다녔고, 과민성 대장장애와 위염의 신체화 증상과 함께 잦은 우울감으로 손 데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 끝장을 보자.. 확실한 마무리가 없다면 언제라도 도드라질 상처, 끝까지 가보자~'

난 형진이와 마주 앉았다.


“형진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니 생각을 정확히 말해봐~"

진짜 사과를 받고 싶어요. 대충대충 말고요”     


형진이가 가장 괴로웠던 것은, 본인은 아닌데 ‘이 정도면 됐지? 이제 다 끝난 거야. 응? 자 모두 악수하고, 더 이상 이번 일은 말하지 않기야~’로 끝내버린 그들만의 용서방식이었다.

 

먼저 형진이 엄마를 만났다.

작은 체구에 질끈 묶은 머리, 화장끼 없는 소탈한 차림의 엄마는 형진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넘쳐 보였지만, 이 일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형진이보다 더 당황하고 계신 듯했다.

우여곡절 끝에, 상담선생님의 주관하에 여러 사람의 협조를 얻어 가해학생들과 다시 만날 수 있었고, 5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형진이는 그들의 사과를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너무 긴 내용이어서 여기에 다 열거할 순 없지만,, 참 많은 시간과 어려움이 있었다)

   

거짓말처럼 그 후, 우리 형진이가 달라졌다.

젖은 솜이불처럼 무겁던 발걸음은 살랑살랑, 얼굴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팔닥 팔닥 생기가 돌았다.

형진이는 특수학교 학생회장에 출마했고 이변 없이 당선되었다.     

형진이가 회장이 된 후 학생자치회는 놀라울 정도로 퀄리티가 높아졌다.

특수학교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행사와 이벤트에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모두 놀라 몇 번이고 뒤로 자빠질 판이다.

우리가 보듬기엔 너무 과분한 학생, 진정 청출어람이었다.

형진이 주관하여 치러진 각종 행사(4.19, 5.18, 세월호....)가 끝이 나면 하나같이 입모아 말했다.      

"어떻게 이런 학생이 우리 학교에?"


형진이는 고3을 졸업하고 특수학교에 있는 2년제 전공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있는 대로 뽐내며 2년을 마쳤고, 장애학생과 학부모들의 꿈의 직장, '장애인 전형 공무직'에 합격하여 모 고등학교 사무보조원이 되었다.

형진이의 취업 소식은 장애학생과 학부모에게 희망을, 한편으론 희망고문 같은 사건이 되어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어느 날 늦은 시간, 형진이에게서 톡 하나가 왔다. 

‘선생님~ 엄마가 많이 아파요... 췌장암이요. 서울로 수술하러 가요'  

'아~ 형진아 ㅠㅠ '


형진이 일로 함께 울고 웃으며 몇 번이고 포옹했던 엄마, 들풀처럼 잔잔했던 엄마의 향기가 아직도 내 후각 저편에 남아있는데, 형진이가 취업했다며 어금니까지 드러내며 환하게 웃모습 또한 내 기억 속 곳곳에 아롱대롱 매달려 있는데....


그로부터 3개월 후쯤, 난 형진이 엄마 부고소식을 받았다.

형진이는 단체 부고문자와 함께  ’ 선생님........ ‘ 이라며 날 부르고 있었다.   

난 사정상 작은 마음으로 위로를 대신하고, 한참 동안 사라지지 않을 1을 알면서도 짧은 글을 미리 보내놓았다.

’ 형진아~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착하게 열심히 사시다 아픔 없는 곳으로 떠나신 엄마를 잘 배웅해 드리자.

엄마가 바라는 것은 형진이가 조금만 슬퍼하고 씩씩하게 잘 이겨내는 것일 거야.

우리 형진이, 잘할 수 있지?‘   


얼마 전이 스승의 날이었다.

가끔 사람들은 묻는다.


“특수교사도 제자가 있나요? 스승의 날에 찾아오는 제자요...”

“당연히 있지요, 있습니다. 있고 말고요.”     


내가 이렇게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형진이' 같은 제자가  있기 때문이다.

형진이는 내가 4년에 한 번씩 학교를 옮길 때마다 새 학교를 구경한다는 구실로 찾아와 내 면을 세워주었고, 스승의 날 또한 어김없이 문자나 톡으로 감사의 마음을 보내왔다. (가끔 찾아올 때도 있고.)

그러니 그런 형진이를 등에 업고 나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는 거 아닌가?

'나 이래 봬도 형진이 보유 선생님이다!'


작년 여름 무싯날, 형진이가 꽤 오랜만에 연락을 해왔다.


" 선생님. 저 내일 쉬는데 선생님 학교 가도 돼요?"

" 당근 되지, 근데 너 왜 쉬어?"

"형 결혼식이 있어 미리 연차 냈어요 "

"야~ 너어~ 형 결혼하믄 집안일 돕고 그래야지 여기 올 생각을 다 하냐?"

" 히히,,, 참! 선생님~ 선생님은 커피 안 마시니까,,, 뭐 드시고 싶으세요?

" 니 선생님은 드시고 싶은 거 없다잉~ 대신 니 후배들은 아이스크림 엄청 좋아한다잉~"

" 히히,,, 알겠어요"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그렇게 말했기로 서리, 요로코롬 많은 아이스크림을 그것도 종류별로 한가득 안고 나타나기 있기 없기?


” 아이고 형진아, 너는 왜 이렇게 적정선이 없냐. 이걸 언제 다 먹느다냐?"


그 해 여름, 우리 반 아이들은 통 큰 선배 형진이 덕분에 한참 동안 맛난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며 시원한 여름을 날 수 있었다.



                            '같이 하나 봄, 같이 자라나 봄'

                               "함께 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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