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말랑한 마시멜로우 Feb 02. 2024

제 진짜 이름을 적어야 해요?

(나의 아르바이트 이야기 2)

 '먹고 대학생'이라는 말이 횡횅하던 80년대, 나는 그냥 먹고만 있는 대학생이 아니었다.

닥치는 대로 일했고 돈을 벌었다.

졸업시즌땐 꽃다발을 팔았고, 방학땐 대학생 교통정리 알바를, 학기땐 커피와 김밥 써빙, 옷가게 점원이나 여론조사원도 가리지 않았다.

경험과 돈,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던 나의 '닥치고 아르바이트'는 훗날 여러모로 쓸모가 되었다.

옛 얘깃거리 소재로, 내 글감으로....


(나의 아르바이트 이야기 2)

나는 여느 날처럼 일자리를 찾다가, 여론조사기관에서 대학생 조사원을 뽑는다는 공고가 뜨자 빛의 속도로 지원했다.

지금은 조사를 전화로 대신하지만, 80년대는 조사원이 직접 조사대상자에게 찾아가야 했다.

조사 한 건당 3,000원인  고수익 알바는, 지원자가 많아 개인당 할당량이 있었다.

하여, 조사원들 사이에서는 한 건이라도 더 받으려는 눈치싸움이 대단했는데, 책임자에게 잘 어필하면 몇 건 더 얹어주는 에누리가 있었다.


"저 좀 많이 주시면 안 돼요? 에러(error) 없이 꼼꼼히 받아올게요."


"그럼 학생은 어려운 조사 좀 해줘야겠네. 충분히 줄 테니까..."


나는 제일 까다롭기로 소문난 유흥업소 여성을 대상으로, 속옷 관련 조사를 배정받았다.

조사내용은 '어떤 속옷 브랜드를 선호하는지, 속옷 고르는 기준은 무엇인지 ..’ 대충 이런 내용들이다.

난 욕심껏 받긴 했지만, 솔직히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유흥업소 여성이라~ 도대체 어디로 가서, 어떻게 조사지를 받아야 하나?'

난 머리를 굴리고 굴리다 유흥업소가 밀집해 있는 파출소로 무작정 들어갔다.

맨 앞쪽에 앉아 계신 경찰아저씨에게,

  

“저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인데요,,,  저~ 저~... 제가 이곳에서 일하는 여성분들께 설문지를 좀 받아야 하는데요.... 어~ 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라서요....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나도 내가 뭐라는지 횡설수설 설명하는데,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조사지를 들고 있는 내 손도 덩달아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너무 절실하니 없던 용기도 솟구칠  판이다.    

그때, 까닥 고개만 들어 내 얘기를 듣던 아저씨가,     


“그래서 나한테 뭐 어쩌라고?” 뜨악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는 너무 뻘쭘해 그 뒷말이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벌게진 얼굴로 어찌할 바 모르고 있는 그때, 뒤쪽에 앉아계신 나이 지긋한 경찰 아저씨 한 분이     


"학생. 밖으로 좀 나와보소" 하시며 뚜벅뚜벅 앞장서셨다.

“대학생인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겄는가? 이곳에서 일하는 애들만 만나게 해주면 되겄는가?"


"네. 만나게만 해주면 제가 다 알아서 할께요".

' 아~ 구세주가 있다면 바로 이 모습일 거야' 희망이 보였다.


"그러면, 지금은 낮이라 모두 자고 있을 거니까 업소에 가봤자 아무도 없을 것이네, 내가 만나게 해줄테니 나 따라와 볼랑가?’ 하시며 그녀들이 살고 있는 숙소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난생처음 그녀들이 머물고 있는 쪽방이라는 곳을 가보았다.

긴 복도 양쪽에 여러 칸의 방을 쪽쪽 나누어 살고 있는 그곳은, 방안에는 비키니 옷장과 앉은뱅이 화장대, 그리고 만화책이 뒹굴고 있는 정말 소꿉쟁이 방처럼 작은 곳이었다. 

햇볕 한점 비집고 들어올 새 없어 보이는 그곳에 들어서니 '아~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자동으로 들었다.

한낮이었지만 모두 깊은 잠에 빠져있는 그녀들을 아저씨가 조심스럽게 깨우는데, 정말 몸 둘 바 모를 정도로 미안했다.

화장기 하나 없는 민낯의 그녀들마치 내 또래처럼 친숙한 느낌이었다. (나만 그렇게 느꼈을까?)


‘어머나~ 웬일이에요?’ 하며 경찰아저씨와 나를 엉겁결에 맞아 준 그녀들에게, 나는 간단한 설명과 함께 조사지를 빠르게 돌렸다.

그녀들은 시험을 보듯 열심히 조사지를 작성하더니, 마지막에 이름과 나이를 적는 페이지에서 손을 잠시 멈췄다.


“제 진짜 이름을 적어야 해요? " 어쩌면 이름도 나이도 진짜와 달랐을 그녀들, 곤란했을 것이다.


"네. 진짜 이름을 적어야 하는데요....."  뒷말이 흐물거렸다.


지금은 개인정보 보호로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더이상의 요구는 실례가 될 것 같아 그녀들이 적어준 이름 그대로를 봉투에 담아 밖으로 나왔다.

조사지를 열어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 없이 '셀리(가명)' 나 '애나(가명)'로 적힌 설문지 몇 개가 보였다.

'어쩌지? 이러면 에러인데?....'


다행히, 내 난처함을 눈치챈 아저씨의 마지막 배려로 나는 쪽방 몇 군데를 더 돌아 내 최종 할당량을 채울 수 있었다.

나는 경찰아저씨에게  '정말 감사했습니다' 거듭 인사를 드리며, 조촐한 바카스 한 병을 아저씨 손에 쥐어드렸다.

아저씨는 '잘 마시겠다' 웃으시며 파출소로 복귀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굳이 모른 척할 수 있었을 텐데 어려운 호의를 선뜻 내주신 아저씨에게, 굳이 사양할 수도 있었을텐데 기꺼이 설문에 응해주신 언니들에게 다시한번 내 진심을 전하고 싶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저씨~"

"정말 미안하고 고마웠어요. 언니들~"






 





매거진의 이전글 칼국수 아줌마!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