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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마시멜로우 Jun 25. 2024

원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 사진: 다음 이미지


대학원 다닐 때 교육학 발표수업 주제가 '교육목표(의도)와 결과의 차이'에 대한 내용이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음)

조별로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자를 찾아 이론적 배경을 기술하고 사례를 발표해야 하는 수업이다.   

우리 조도 리포트를 작성하고 수강생 인원에 맞추어 요약본까지 완벽하게 준비했다.

이제 '누가 발표를 할 것인가?'만 남아있는데, 이놈에 인기는 어디 못 간다.


"선배가 발표해요. 선배 잘하잖아요"


"아이고 또 나냐? 알았다. 내가 하지 뭐~"   

  

아무리 좋은 글이나 말도 독자나 청자에게 먹히지 않으면 소용없는 법, 자고로 발표는 재미와 임팩트가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다른 조 발표를 들어 보니, 거의 리포트를 달달 읽는 수준으로, 수강생은 말할 것도 없고 학점을 쥐고 있는 교수님조차 꾸벅꾸벅 졸고 있는 실정이니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다.

드디어 내가 나설  차례인가?


"내용은 나누어 드린 요약본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와 관련된 제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발표를 대신할까 합니다."


다음 내용은, 그때 했던 거의 '교양강좌' 수준의 내 발표내용을 글로 적어본 것이다.


저는 대기업 제조공장 연수팀에서 10년간 사원과 사원가족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조직생활의 온갖 생태와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체감했지요.

성과가 좋아 높은 고과를 받으며 승승장구하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선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일도 참 많았습니다.

그중, 제가 야심 차게 기획했던 교육이 제 의도와 다르게 폭망 했던 경험을 이 자리에서 고백하고자 합니다.


저희 회사는 4조 3교대로 근무하는 생산직 사원이 3,000명이 넘게 하고 있습니다.

제품 특성상 노동강도가 세고 위험요소가 많아 항상 안전에 대한 염려가 크게 자리하고 있었죠.

생산라인의 스탭부서에서는 어떻게 하면 사원들이 품질 좋은 제품을 안전하게 생산하게 할 것인가가 주 업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당시 저희 회사는 큰 고민거리가 하나가 있었습니다.

근래 들어 생산라인에 유독 안전사고가 많이 일어나고 사원들의 사기가 엄청 다운되어 있다는 것이었죠.

회사와 노조에서는 이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다방면에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노조에서는 그 원인 중 하나를 가족문제로 파악했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즉, 가정이 평안하면 사원들이 안정된 심신에서 생산에 임할 수 있다는 다소 근본적인 내용이었죠.

노조를 통해 들어온 제보에 의하면, 4조 3교대 남편의 근무일정이 잡히면 몇몇 부인들이 확보된 자유 시간을 이용해 가정을 지키지 않고 일탈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춤바람과 화투가 한참 유행이었던 그때, 아주 일부이긴 하지만, 부인들이 그런 일탈에 가담했고 그것을 눈치챈 사원들이 생산에 집중하지 못하고 결국 안전사고로까지 이어진다는 게 회사의 최종 진단이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우리 연수팀에게도 방법 모색에 대한 오더가 내려왔습니다.

그때, 입사 2년 차도 안된 새내기인 제가 겁도 없이 의견을 하나 냈는데 덜컥 수락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원가족 교양강좌 및 공장현장견학 프로그램'

부인들을 공장에 초대해 교양강좌(정신교육)를 듣게 하고, 남편들이 일하고 있는 공장을 직접 보게 함으로써 내 남편이 얼마나 힘들게 일을 해서 돈을 벌어오는지 알게 한다면 부인들이 가정에서 제 자리를 잘 지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공장장님 이하 노조도 아주 흡족해하며 최종 결재 싸인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프로그램 기획부터 강사 섭외, 참여 가족 모집, 견학코스와 견학팀 구성, 마지막 기념품 종류까지 모든 준비를 완벽히 마쳤습니다.

드디어 많은 가족(부인)의 참여 속에 이 교육행사는 성황리 치러졌고 큰 사고 없이 잘 마쳤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폭망 그 자체였습니다.

노조를 통해 들어온 생산직 사원들의 클레임은 너무도 거셌습니다.


'누가 이런 교육을 기획했냐?'

'회사에서 우리를 쪽팔리게 하려고 작정했냐?'

'우리 부인이 내가 일하고 있는 공장과 내 모습을 보고 점점 더 나를 무시하고 있다'

'회사에서 책임져라. 구시렁구시렁....'


그랬습니다.

그 당시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로 크게 격차를 두어 분리하던 시절, 블루칼라로 일하던 분들의 콤플렉스를 제가 제대로 자극해 버린 거였죠. (25년이 지난 일로, 지금은 그런 구분도 격차도 없지만.)

사랑하는 가족에게만은 보이고 싶지 않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그 모습, 퇴근할 때는 항상 샤워를 하고 빳빳한 양복으로 갈아입고 퇴근하던 그분들의 심정을 미처 생각 못했던 것이죠.

그저 탁상공론으로 환상적인 기획의도에 취해 결과도 당연히 그리 되리라 믿었던 저를 비롯한 화이트칼라들의 완벽한 착각이었던 거죠.


그럼 그 후,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장님께 깨지고, 노조에 불려 가고, 공장장님이 대노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여사원 화장실에서 눈이 밤탱이가 되도록 울고 불며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를 보냈습니다.


여러분도 살면서 한 번쯤 그런 경험이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교사로서 무엇을 가르칠 때, 내가 무슨 말을 했을 때, 어떤 글을 쓸 때,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때 '원래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기도 했던 경험이요.

그럴땐 엄청 당황스럽고 억울하기도 하죠.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저는 그때의 경험으로 몇가지 배운것이 있습니다.

예초의 계획(의도)도 중요하지만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한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고 사전에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을요.

그리고 항상 어떤 일을 할땐 자신의 입장이 아닌 상대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을요. 


지금까지,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의도와 과정은 결과에 의해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했던 저의 뼈아픈 경험담이었습니다.


나는 위와 같은 내용을, 발표주제와 막~ 억지로 끼워 맞추어 거의 김미경 교양강좌 수준으로 열강을 했다.

열화와 같은 호응 속에 수강생뿐 아니라 졸고 계신 교수님까지 눈을 번쩍 뜨이게 했던 내 발표 덕분에 우리 조는 환상의 A플을 받았다.

그 발표 이후, 나와 한 조가 되려는 대학원생들의 눈치싸움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후일담이 전해지기도 했지용용~~ (결국은 또 내 자랑질인가? ㅎㅎ)



                                     ~ 화재 참사 희생자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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