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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마시멜로우 Aug 12. 2024

회색빛으로 산다는 건.

                                                        사진: 다음 이미지


사람을 색으로 표현할 때 ‘회색’이라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하얀색도 아니고 검은색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색...

그래서 옛날엔 회색분자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낙인찍는 일이 흔했었다.

(* 회색분자 : 소속이나 정치적, 사상적 경향, 노선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     


몇 년 전 교직원 연수 때 ‘나를 알고 나를 이해하는 법 ’이라는 주제의 강의에 참여한 적이 있다.

강사님은 몇 가지 질문이 적힌 메모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때 내가 적었던 메모 내용을 잠깐 소개한다.     


- 나의 장점은?

. 귀가 얇다.(그래서, 남의 의견을 잘 듣는다)

. 호불호가 없다.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 크게 구분 짓지 않는다)

. 뒤가 무르다.(그래서, 누군가 나를 서운하게 해도 사과하면 금방 풀린다)

. 황희정승처럼 이랬다 저랬다 한다. (그래서, 각각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고 인정하려 한다)



나의 단점은?

. 잘 참는다. (그래서, 웬만하면 참고 견디다 결국 폭발해 버린다)

. 노트러블 메이커다. (그래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살다 보니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기 쉽다)

. 밝고 긍정적이다. (그래서, 나를 벨도 없이 실실 웃는 사람으로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

. 에너지가 넘치고 하나에 빠지만 끝을 본다. (그래서, 매번 번아웃이 빨리 온다)

. 감정이입을 잘한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고 오지랖이 넓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 나를 색깔로 표현하면? 회색     


그렇다. 나는 그렇게 장단점이 청개구리처럼 뒤바뀐 채 회색빛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내 회색빛 삶이 누군가 에게 상처가 되고 불편할 수 있다는 것은 모르고 살았었다.


정교사가 되기 전 여러 해 기간제 교사로 근무했다.

특수학교는 한 반을 담임과 부담임제로 운영한다.

그때 내가 맡은 반 담임은 젊은 새댁인 정교사였고, 나는 부담임 기간제로 40대 중반이었다.

정교사 선생님 대부분은 기간제들에게 혹여 모를 소외감을 염려하여 많은 배려와 신경을 써준다.

참 좋은 교사가 많았고 근무하는데 큰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 있도록 해주어 고마웠다.


그러나 내 젊은 담임은 달랐다.

사사건건 내게 간섭을 했고 가르치러 들었고, 사소한 것 하나에도 인색스럽고 까다로웠다.

내가 기간제 처지임을 생각하면 머리로는 이해하겠는데, 그래도 한때 나름 잘 나가는 대기업 중간관리자까지 했던 몸인데 이런 대접을 받으니 여러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난 나의 최대 단점인 '잘 참는다'를 작동시켰다.

꾸욱 참고 견디며 받아들였다.


몇 년 후, 난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정교사가 되었다.

나는 고3-1반 담임이 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고3-2반 담임이 그때 만난 젊은 새댁이었다.

같은 학년을 맡으면 서로 협력하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특히 현장체험학습을 함께 하는 것이 관례다.

당연히 나도 그 선생님과 협력하며 잘 지내고 싶은데 그 젊은 선생은 내 맘과 달랐나 보다.

처음 만났을 때의 포지션 그대로 나를 대했고, 그때의 헤게모니를 그대로 가지고 나를 바라보았다.

또 꾸욱 참았다. 언젠간 이 선생님도 변하겠지....


그러나 현장체험학습을 함께 하면서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한계점에 다다르고 말았다.

보는 눈도 많은 현장에서, 명색이 나도 어였한 담임인데 선을 여러 번 넘고 또 넘었다.

한번 선을 넘으니 한계가 없는 듯 그녀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사람처럼 굴었다.


체험학습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후 나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예전처럼 대하던 미소가 사라지고, 대답도 가능하면 짧게, 학년 협의도 웬만하면 하지 않으려 했다.

참고 참다가 결국 폭발해 버린 것이다. 나만의 방식으로.....

그래도 눈치는 있었는지 내 달라진 태도를 젊은 선생은 금방 알아차렸다.


"선생님~ 혹시 저에게 서운한 거 있으세요? 요즘 왜 그러세요? "


나는 일단 숨을 크게 한번 내쉰 후 다다다다 그녀에게 말했다.


"선생님~ 샘은 제가 아직도 기간제 부담임으로 보이세요? 이건 너무 선을 넘으시잖아요~ 인생 그렇게 사시는 거 아닙니다"


깜빡이도 없는 내 갑작스러운 폭발에 그녀가 완전 놀래하는 것 같았다.


"어머~ 선. 생. 님... 그런 게 아닌데요.....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제가 사과할게요"


하지만 난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고, 그 단 몇 마디로 그녀를 용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기회를 엿보던 어느 날, 우리 학교에 호불호가 분명한 나름 사단이 있는 여선생과 얘기를 하게 되었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그 일을 꺼내고 되었고 그 선생님은 나보다 더 흥분하며 분을 참지 못했다.

그 선생님에게 평소에 난 '호'였고, 그 젊은 선생님은 '불호'였던 것이다.


"선생님. 걱정 마세요. 제가 해결해 드릴게요..."


그 후 호불호 선생님과 그 사단들은 젊은 선생님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기 시작했다.

난 그냥 하소연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 크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굳이 그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난 그들의 행동에 제동을 걸만한 명분도 용기도 없었다.


나의 장점 중 하나가 '뒤가 무르다'라는 걸 기억하는가? 누군가 사과하면 금방 풀린다는....

그 후 그 젊은 선생님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여러 번의 사과와 함께 넘칠 만큼 나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 성의가 너무 괘씸(?) 해서 내 마음이 서서히 수그러들기 시작했고 서로 잘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를 지켜본 호불호 선생님과 그 사단은 당연히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너에게 의리를 지키느라 그렇게까지 해주었는데 너 지금 뭐 하는 거냐?'는 표정과 분위기가 역력했다.

직접 내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고, 하지만 우리는 어린애가 아니었기 때문에 적당한 포커페이스와 관계를 유지하며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


몇 년이 더 흐른 후 우린 서로 다른 학교로 발령을 받아 흩어졌다.

우연히 호불호 선생님과 업무차 전화를 주고받을 기회가 생겼다.

우리는 학교일뿐 아니라 개인적인 얘기도, 지난 얘기도 하며 한참을 통화했다.

그러다 그 선생님의 말끝에 나를 향한 본심이 엉겁결에 나와버렸다.


"선생님은 회색이잖아요~, 선생님이 회색인 거 우리 다 알아요~"


헉~

난 아직도 그때 그 말이 내 귀에 맴돈다.

내 회색빛 성향과 태도 때문에 누군가는 아주 불편, 아니 불쾌할 수 있었겠구나 생각하니 얼굴이 활활 달아올랐다.

조직생활을 하면 간혹 내편 네 편으로 나누어진 경우가 있는데, 나는 항상 어떤 편에도 속하지 않았고 어떤 편에도 속했던 것 같다.

그것이 나만의 처세방식이고 방어책이라 여기면서...


나는 지금 그 선생님을 원망하거나, 그것이 아니었다고 변명할 생각이 없다.

그때 그 일은 내 잘못이 가장 크기에....

'젊은 선생이 그런 행동을 했을 때 바로 내 마음을 전달했다면 어땠을까?'

'나잇값도 못하고 에먼 선생님에게 뒷담화를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나에게 의리를 지켜준 호불호 선생에게 좀 더 현명하게 내 상황을 설명했더라면 어땠을까?'

이렇게 if를 몇 번이고 되새김질해 보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럼 지금 난 어떤 색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여전히 회색빛으로 두리뭉실 살아가고 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 바꿔 쓴다는 말처럼 사람은 쉬이 변하기 어려운 것 같다.

하지만 그때 그 일과 그  선생님의 말은 조금은 다른 나로 살아갈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는 시그널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산다고 소문이 날지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예전의 회색빛과는 좀 다른, 좀 더 나은 회색빛으로 살기 위해 오늘도 부단히 고뇌하고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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