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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마시멜로우 Sep 11. 2024

엄마는 채소장사 중.

                                                             (사진 : 다음 이미지)


엄마는 행복했을까? 아니면 그럭저럭 살만 을까?

'개나리 처녀'와 '여자의 일생'을  즐겨 불렀던 엄마는 개나리 꽃처럼 화사했을? 여자의 일생처럼 처절했을까?

엄마가 떠나고 벌써 1년, 갑자기 내 질문에 답이 궁금해졌다.

하여, 엄마에 대한 기억 몇 조각을 여기에 펼쳐본다.


엄마는 태어나 보니 부농에 방앗간집 첫째 딸이 엄마의 자리였다.

덕분에 여학교 문턱을 수월하게 넘으며 소학교 교사자격증을 보유한 엘리트가 되었다.

그 시절 드물게 부잣집 배운 여자, 신여성이 엄마의 이름표였다.


엄마 친구들 대부분은 소학교 선생님이었다.

엄마 앨범 속 여학생들은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맞춰 입고 어여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엄마 또한 볼이 오동통하고 몸집이 제법 있는 당당한 여학생 모습으로 함께 웃었다.


그 여학생들이 혼기가 차 각자의 짝을 만나 결혼을 했다.

앨범 속 그녀들은 이제 서로의 이름을 달리 불렀다.

'박선생아~ 김선생아~'  남편 직위에 따라  '정선생댁아~ 최사장댁아~'로 불렀다.

유일하게 엄마만 엄마 이름 그대로, 가끔은 내 이름으로 불려졌다.

엄마는 선생도 아니었고, 아버지는 실업자였거나 말단 직급이어서 마땅히 붙일 명함이 없었다.

누구보다 여유로운 부잣집 딸이었지만, 소학교 자리까지 포기하고 결혼한 남자는 그나마 다니고 있는 직장도 길게 붙어있지 못하고 때려치우길 반복했다.


엄마는 여학교 계모임만 갔다 오면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 당시 엄마들 계모임은 돌아가면서 '유사'를 맡아 집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초대하는 형식이었다.

(*유사: 각종 계모임, 자생적 모임 등에서 경리, 연락, 문서작성 일을 관장하고 처리하는 사람)

나는 엄마 계모임에서 찍은 사진을 몇 번 본 적 있다.

엄청 큰 자개농이 세워져 있는 안방에 큼지막한 네모 상 두 개가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 갖은 음식들이 빼곡히 차려져 있었다.

그 주위로 엄마의 잘난 친구들이 파마, 고데 머리로 웃고 있었고 생단발 엄마도 함께 웃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그 여학교 모임에 나가지 않은 것 같았다.

시간이 갈수록 벌어진 그녀들과의 격차를 받아들이고 감당할 자신이 엄마는 더 이상 없었던 걸까?

소싯적엔 친했을지라도 형편이 달리 되면 우정이 지속되기 어려운 게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진가 보다.


우리 동네는 장이 가까이 있어 시장 상인들이 많이 살았다.

엄마는 형편이 비슷한 시장 아줌마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그들과 작은 모임도 만들었다.

채소아줌마, 생선 아줌마, 떡집 아줌마, 팥죽 아줌마들은 그런 엄마를 당연히 좋아했다.

엄마는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대빵이 되었고 이제 엄마 이름이 아닌 회장님이나 총무님으로 불러졌다.

총기가 밝고 두루 어울리며 나름 카리스마가 있는 회장님은 그곳에서 인기녀가 되었다.

엄마는 이곳이 엄마가 있어야 할 자리임을 빨리 받아들였다.


아버지가 오랜 실직 끝에 어렵사리 들어간 연수원 관리일마저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허리통증이 심하고 설상가상 간경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들어온 쥐꼬리만 한 월급도 뚝 끊기고 우리 집은 또다시 힘들어졌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아버지의 병석은 한없이 길어지고 있었고 그나마 조금 모아진 돈도 씨가 말라갔다.

평생 전업주부로만 살았던 엄마는 더 이상 이 상황을 수수방관할 수 없는 지경에 몰렸다.

그때 같이 어울린 시장아줌마들이 우리 집 사정을 알고 조심스러운 제안을 했다.


"회장님~ 시장에서 우리랑 채소와 과일을 좀 팔아보는 것은 어떠겠소?"


엄마는 난생처음 생활전선이라고 뛰어든 것이 재래시장 채소장사였다.

시장 한 귀퉁이에 자판을 깔고 채소와 과일을 떼어 파는 일을 시작했다


시장바닥은 대놓고 텃세가 심했다.

더구나 엄마처럼 어리바리 초짜 장사치는 자리 하나 차지하기, 배추 한 포기 팔기 힘든 조건이었다.

아무리 작은 공간이라도 그들만의 자리가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고, 남의 가게 앞은 자릿세를 톡톡히 내야 가능한 일이었다.

엄마가 펼쳐놓은 판매대는 두 팔 벌리면 다 될 만큼 작았지만 그마저도 그들의 눈총에 비집고 들어갈 곳이 없었다.

보다 못한 아줌마들이 자신의 매대를 조금씩 좁혀 그 사이에 껴 팔도록 해 그나마 자리는 해결되었다.


문제는 엄마의 판매실력이었다.

나는 엄마가 그렇게 숫기가 없는지 몰랐다.

자판에 채소와 과일만 쫘악 늘어놓고는 '좀 사시오~' 호객행위를 전혀 하지 못했다.

차마 입을 떼지도 못했고, 뗄 생각도 안 했고, 아는 사람이라도 지나가면 고개 숙이기 바빴다.

안타까운 아주머니들이 엄마를 대신해 몇 번 팔아주다가 더 이상은 안 되겠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이고~ 우리 회장님이 배가 덜 고픈갑네잉~'  


엄마는 떼어와 미처 팔지 못한 채소와 과일을 그대로 집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덕분에 우리는 싱싱한 야채를 먹을 수 있어 좋았지만 우리 집 경제에 보탬은 전혀 되지 못했다.

당연히 엄마의 채소 장사는 오래지 않아 자판을 엎어야 했다.

그나마 들어온 푼돈마저 이제 아예 뚝 끊기고 말았다.

'엄마는 채소장사 중'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엄마는 궁여지책, 창고처럼 쓰인 아랫채를 개조해 월세와 하숙을 쳐보기로 했다.

작은 집에서 목돈을 조금 빌리고 목수셨던 작은아버지의 손을 빌려 후다닥 아랫채를 완성했다

신혼부부에게 세를 내고 직업군인에게 하숙을 쳐 집세를 받게 되었다.

생활비로 충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입이었으나 쪼개고 쪼개며 그래도 겨우 살아갔다.


딱 그 시기에 나와 작은오빠는 대학생이었다.

오빠와 나는 대학등록금을 스스로 감당해야 했고, 실제로 감당했다.

그러나 책값이랑 교통비, 최소한의 용돈은 어쩔 수 없이 엄마에게 손을 벌려야 했다.

엄마는 매일 오빠와 내게 차비와 점심값 명목으로 2,000원씩을 배급해 주었다.

(처음엔 토큰을 미리 사두었다 찬장에 넣어 두고 매일 2개씩 주곤 했는데 우리가 강력히 항의해 차비로 받게 되었다)

왕복차비와 점심으로 빠듯한 돈, 특별한 일이라도 생기면 난감하기 이를 데 없을 만큼 적은 돈이었다.

점심으로 라면과 팥죽, 학생회관 짜장면 정도가 가능했고, 자판기 커피와 에이스 과자로 끼니를 해결하면 조금 여유가 생겼다.


용돈이 그리 궁하니 우리에게 캠퍼스 낭만은 요원했다.

나는 간간히 아르바이트도 하고 요령이 있어 여기저기 숟가락을 꽂으며 캠퍼스 생활을 나름 즐겼지만 주변머리 없는 오빠는 달랐다.

번번한 미팅 한번, 데이트 한번 못해봤고 돈 때문에 손발이 꽁꽁 묶인 채 대학생활을 버텨내야 했다.

갖춰진 옷 하나 제대로 없어 군 제대하고 가져온 군복 바지와 무릎 나온 추리닝, 헐렁한 티셔츠로 사시사철을 때웠고 이발값을 아끼려 아예 머리를 길게 기르고 다닐 정도였다.

(다행히 미술 전공이어서 간혹 예술가처럼 보인다며 '멋지다'는 사람도 있었다)


한 번은 오빠가 아주 지친 몸으로 늦은 시간에 들어와 엄마에게 엄청 화를 냈다.

이제부터 용돈을 매일 주지 말고 한 달로 계산해 육만 원을 한꺼번에 주라고 강력히 건의했다.

사내대장부가 돈이 간당간당하니 어떻게 학교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하겠냐며 길길이 뛰었다.

엄마는 그날 있었던 오빠 얘기를 듣고 결국 만원 깎아 오만 원으로 최종 용돈 협상에 지장을 찍었다.


오빠가 난생처음 미팅을 한 날이다.

오빠 주머니에 딱 만원이 있었고, 그 당시 시내 유생촌(우리 지역 돈가스 전문점) 돈가스 가격이 사천 원이었다.

차비까지 계산하면 딱 맞아떨어진 금액,  지금처럼 더치페이로 비용을 반띵 하지 않고 주로 남학생이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던 때였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생촌에 사람이 너무 많아 들어갈 수 없었고, 하는 수 없이 찾아간 레스토랑의 돈가스 가격이 오천 원이었단다. 

그때부터 오빠는 돈가스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그 여학생 얼굴이 양귀비였는지 못난이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당황해 버렸다.

웨이터가 혹시 맥주가 필요하냐 했을 때 여학생은 오빠를 바라보았고, 오빠는 화들짝 놀라 '저 술 전혀 못 마십니다' (술 엄청 좋아함) 식은땀을 흘렸다.

그날 오빠는 주머니에 있는 만원을 몽땅 돈가스 값으로 계산하고, 2시간이 넘는 거리를 밤새 걸어서 집으로 귀가했다.


아버지는 긴 병치레 끝에 결국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4개월 후 내가 대기업에 입사했다.

아무도 경제활동이 없던 우리 집안에 내 취업은 사막의 오아시스가 되어 시원하게 갈증이 풀렸다.

첫 월급을 받아 엄마 손에 쥐어 드린 날,  '오매 내 새끼가 돈을 다 벌어갖고 왔네~' 그렇게 환하게 웃던 엄마의 얼굴을 언제 보았던가?  

깃털처럼 가벼운 아버지 월급봉투에 비해 꽤 두툼한 무게를 느끼며 엄마는 내 월급봉투를 여러 번 손에 올렸다 내렸다 반복했다. (그 당시 월급을 봉투에 담아 줄 때다)

나는 매달 나오는 월급도,  2달에 한 번꼴로 나오는 보너스도, 연말에 나온 성과급도 한 푼도 빼지 않고 엄마에게 고스란히 바쳤다.

엄마는 내가 드린 월급을 정말 소중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받으셨다.

아버지 월급은 앉아 받았는데 막둥이 월급은 그럴 수 없다며 일어서서 궁둥이를 토닥거리며 받았다.

(나중에 통장으로 월급이 들어가는 바람에 그 의식이 자연스럽게 생략됐지만...)


엄마는 내가 드린 돈으로 알뜰살뜰 계를 붓고, 알음알음 돈놀이도 하고, 출가한 자식들에게 보템도 주며 최고로 요긴하게 사용했다.

이제는 여학교 계모임에도 종종 나가시고, 친구들에게 한턱도 크게 쏘고, 가끔 급한 친구들에게 돈을 융통해 주기도 했다.

연필에 침을 묻혀 가계부를 적고 계산기를 두들기며 돈을 이리저리 옮겨 담는 엄마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평생 적자인생 엄마에게 안 낳으려다 낳은 600원짜리 막내딸이 처음으로 흑자인생을 만들어준 것이다.

나는 그렇게 10년간 번 돈을 (최소한의 결혼비용만 사용하고) 전액 엄마에게 드리고 출가했다.


엄마의 삶은 그럭저럭 살만 을까? 

내 의문의 끝에 답이 궁금해진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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