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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마시멜로우 Oct 06. 2024

맞선만 50번

                                                           (사진: 다음 이미지)


맞선만 50번도 넘게 본 녀자, 소개팅 포함 얼추 100번은 족히 넘는 녀자, 결혼은 성당후배랑 3개월 연애끝에 겨우 한 녀자, 그 녀자 이름은 바브런치 작가  '말랑한 마시멜로우'다.


평생 연애운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톨릭 신자가 점을 보러 다녔겠는가?

점쟁이들은 하나같이 내 사주엔 남자가 귀하다 했다.

대신 결혼은 할 팔자니 걱정 붙들어 매란다.

(점을 보고 나면 항상 고해성사를 했다. 신부님이 참다못해 화를 냈던 기억도 있다. 제발 그만 좀 보시오~)


사춘기가 되고 이성에 눈을 뜰 때부터 남자에게 관심이 많았다.

감성 풍부하고 사회성 좋은 나는 동성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당연히 이성에게도 그럴 줄 알았다.

여고생이 되니 나만 빼고 하나둘 남친이 생겼다는 애들이 등장했다.

귀밑 1센티 똑단발에 그 빳빳한 교복을 입고 어떻게 연애질을 하는지 배가 아파 위경련이 다 일었다.


나의 첫 번째 쓰라린 경험은 여고 1학년 때다.

'어느 날 여고 시절~ 우연히 만난 사람~' 노랫말처럼 설렘 가득한 여고 시절을 보내고 싶어 고교동아리 MRA에 가입했다. (MRA: 의학 용어 아니다. '도덕 재무장 운동' 어쩌고 저쩌고 하는 동아리다.)

남녀 고교생이 함께 한다기에 가입했고, 실제로 남자도 많고 활동도 다양해 딱 내 취향이었다.

처음 학교 회장오빠를 맘에 두었다.

하지만 피부가 뽀얀 울 선배 언니랑 눈이 먼저 맞는 바람에 난 시작도 못하고 실연을 당했다.

남녀고교 체육대회가 있던 날, 키 크고 간지 난 응원단장을 두 번째로 맘에 담았다.

운 좋게 그와 같은 시내버스를 탔고,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 나를 알아보고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어? MRA 회원이네요? 어느 학교 몇 학년? 집은 어디세요? 어디서 내려요? 전화번호 좀?...' 질문도 많고 말도 많은 남자였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그럼 내 번호 알려줄게요. XXX-XXXX, 이름은 ooo. 꼭 전화하세요 꼭이요~ 저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대충 듣는 척하면서도 어떻게든 그가 알려준 이름과 번호를 잊지 않기 위해 내 뇌를 풀가동시켰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숫자 7개와 글자 3개를 후다닥 메모지에 적어놓고 구멍이 날 만큼 뚫어보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해? 말어?'

결국 용기를 못 내었지만, 다음 행사 때 그가 다가와 '왜 전화하지 않았느냐' 채근을 한다면 최고로 완벽한 시나리오가 완성될 것이니 기다려 보자.

다음 행사날, 난 그를 단박에 알아보았고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너 누구냐?'는 표정으로 고개만 까닥하고 바람과 같이 사라져 버린 그놈, 내 핑크빛 로맨스도 그렇게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져 갔다.

'에잇!'


학력고사 성적이 교대(남자 별로 없음)나 여대(남자 아예 없음) 갈 정도였지만, 굳이 남녀 공학 국립대를 선택했다.

원 없이 남자들 틈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우리 과는 여자가 2/3, 그렇담 남자들이 제일 많이 득실거리는 동아리를 찾아가 보자.

농촌봉사 야학 동아리에 가입했고, 내 삶은 드디어 매일이 봄날이 되었다.

그곳에서 내가 짝사랑한 오빠와 나를 짝사랑한 동기를 각각 만났다.

모든 날이 좋았고 모든 날이 내 날이었다.

그러나 짝사랑 오빠와는 고백도 못하고 끝이 났고, 나를 짝사랑한 동기는 지 혼자 질풍노도의 을 살다 제풀에 지쳐 대학을 자퇴하고 홀연히 떠나버렸다.

대학 졸업 후 짝사랑 오빠와 연락이 닿았지만 내 맘은 이미 식은 후였고, 자퇴를 하고 대한민국 공군이 되어 떠난 동기는 내 초등학교 동창과 결혼을 했다.

'에잇!'


80년대 여대생에게 유행처럼 번진 '2말 3초.'라는 말이 있다.

2학년 말에서 3학년초에 남자를 꼭 만들어야 한다는 주문과도 같은 글귀다.

그러나 난 대학 4년 동안 단 한 놈도 내 남자로 만들지 못하고 졸업장을 수령해야 했다.


우리 지역에서 제일 유망한 신랑감들이 모여있는 대기업에 입사를 했다.

아~ 이곳이면 적어도 한 명은 건질 수 있겠다.

하지만 10년간 연수담당자로 있으면서 난 처음부터 컨셉을 잘 못 잡아버렸다.

사감이나 교관처럼 나를 대하는 남사원들에게 나는 항상 여자로서 열외의 대상이 되었고, 많은 사내커플이 탄생한다 그 터 좋은 에서 내 남자를 결국 찾지 못했다.

뒤늦게 10센티 하이힐을 신고 고군분투해 보았지만 그때는 이미 노처녀 딱지가 붙어 경쟁력을 한참 잃은 후였다.

'에잇!


어떻게든 결혼을 해서 회사를 정리하고 싶었다.

당시는 여사원이 결혼하면 회사를 그만두는 분위기였다.

누구보다 자만추를 원했지만 더 이상 자력으론 안될 것 같아 주변사람들에게 나를 내놓기로 했다.

어느 구름에 비 내릴지 모르니 만나는 사람마다 '을'이 되어 나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저 남자 좀 소개해 주세요~ 어디 좋은 남자 없어요?'

그러나 사돈네 팔촌까지 빡빡 긁어 내 앞에 대령한 소개팅남과는 오만가지 이유로 모두 꽝으로 끝나고 말았다.

'에잇!'


이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엄마, 나도 중매쟁이(마담뚜)에게 정식으로 내놓아줘~"


그때 엄마가 나를 바라보는 표정과 말을 잊을 수가 없다.


"너마저?  어떻게 단 한 자식도 혼자 결혼을 해결 못하냐? 아이고 내 팔자야~"


이제 우리 5남매는 모두 중매시장에 내놓아진 꼴이 되었다.

엄마는 우리 지역 웬만한 중매쟁이들은 다 꿰고 있을 정도로  시장 단골고객이 되었다.

누구보다 보는데 이골이 난 엄마는 툴툴대면서도 항상 우리보다 더 완벽하게 준비를 끝마치고 우리와 동행해 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주말만 되면 꽃단장을 하고 선을 보러 다녔다.

철저히 약육강식인 선 시장이었다.

기울기에 따라 내가 좀 우위이면 어김없이 찼고, 내가 좀 하위면 어김없이 차였다.

차인 이유는 버라이어티 했다. '나이가 많다, 키가 작다, 맞벌이를 원한다, 잘난 척한다(헉!)....'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콧대는 있는 대로 내려앉았고, 자존감 또한 바닥을 치고 지하로 내려갔다.

친구들이 하나 둘 유부녀로 신분이 바뀌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노처녀 3인방과 ('노처녀 3인방의 눈물의 심원계곡'에 등장) 세상 남자들의 안목을 한탄하며 거의 매 밤 술타령을 하며 살았다.

그런 와중에도 틈틈이 썸을 타보기도 하고, 스쳐 지나간 인연을 재활용하며 마지막까지 몸부림쳐 봤지만 운명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에잇!'


'혼자 살아야 하나?' 자포자기를 할 때 즈음, 몇 달 전 선봤던 남자에게 뒤늦은 연락이 왔다.

딱히 싫지도 좋지도 않은 상대여서 몇 번 만나 나름 노력해 보았지만 그 선남과의 미래가 영 아름답게 그려지지 않았다.

선남이 자신은 마음을 굳혔다며 내 대답을 재촉했을 때 왜 갑자기 성당 후배의 긴 얼굴이 떠올랐을까?

3개월 전 다시 연락이 이어졌지만 가끔 만나 밥을 먹고 커피 마시고 술 던 게 다인 후배, 정식으로 플러팅 한번 하지 않은 그 후배 왜 하필 그때 보고 싶었을까?

나는 선남에게 돌릴 다이얼을 후배에게로 돌려 저녁 10시가 다된 시간 그를 우리 집 앞으로 호출했다.

내 늦은 전화를 받고 한걸음에 달려온 그는 어느 정도 예감했을까? 내 그렁거리는 두 눈을 보며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살포시 잡아주었다.


그렇게 나는 50명이 넘는 선남과 소개팅남을 뒤로하고 스무 살에 성당에서 만난 1명의 남학생웨딩마치를 울렸다.

돌고 돌아 뒤늦게 제 인연을 찾은 나는 드디어 새 둥지에 무사히 안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때의 절실함과 소중함을 너무나 잘 알기에 지금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

요즘도 혹여 을까 부서질까 너무 애지중지하다 아예 각방까지 쓰고 있는 실정이다.


울 애들은 엄마 아빠 과거사를 듣고 쯧한 마디씩 한다.


"뭘 그렇게까지 결혼하려고 했어? 나 같으면 그냥 혼자 살겠다"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인 요즘 애들에겐 호랑이 담배 피우던 그때 이야기좀처럼 공감가지 않을 것이다.


"아이고 이놈들아~ 니들을 이 세상에 내놓기 위해 엄마가 그리  애썼다는 것을 모르겠냐?

그건 그렇고... 이 엄만 손주 재롱 좀 보고 싶으니까 외모든 가위바위보그건 니들이 알아서 정하고, 제발 한 놈이라도 결혼 좀 해주라..."


덧) 여기서 50번, 100번은 정확한 수치 아닙니다. 그걸 어찌 다 기억하겠습니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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