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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연 Nov 24. 2023

저, 잘 '쓰이고' 싶은데요.

어느 ADHD 국어 강사의, (어른) 아이들을 위한 귀띔

22.06.08


처음 이곳에 이사 왔을 때 전자레인지와 침대를 주문하고, 햇반보다 먼저, 치킨보다 먼저, 책상보다 먼저, 호크니의 그림 프린트를 두 점 주문했었다.

그중에 하나가 이 '스프링클러'인데, 배전함 가리개로 주문한 거라 테두리가 사실 너무 형편없지? 첨에 받고 실망했었던 기억이 생경하단다.
그런데 배송이 오자마자 잠깐 저 위치에 두었을 때,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저 작품이 너무 산뜻하고 그 구도가 너무 잘 어울려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배전함 가리개로 샀으니 타고난 쓰임에 맡게 써야 한다고 결정하고 위치를 옮겼지.
그 뒤로 일 년 반 동안 저 그림을 내가 몇 번이나 쳐다봤는지는,
사실 열손가락으로도 셀 수 있을 것 같아.


오늘에서야 맘먹고 처음 원했던 그 위치에 두었어!
너무 잘 어울려 뿌듯.

원래의 쓰임이란 건 누가 정한 걸까? 난 평생을 내가 무기력하고 게으르게 타고난 사람이라, 바쁘게 사는 일이 천성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타고난 걸 거스르니까 남들보다 두 배, 세 배로 힘든 건 당연한 거고 버터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새 운동하고, 치료받으며, 일을 꽤 즐겁게 하는 나를 느끼며,
'본래 타고난 성향'이라는 게 뭘까? 생각하게 된다.
해도 안 되는 것도 있고, 포기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나 가지 않은 길, 해보지 않은 것, 열어보지 않은 문, 생각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천성보다 인생에서 중요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는 저녁.
보기 싫었던 배전함 가리개는 무얼로도 가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어.
예쁘지 않아도 그냥 그 자체로 두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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