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연 Nov 26. 2023

선생님, 영화 '헤어질 결심'의 '서래'를 아세요?

삶의 99%가 일인 한 국어강사의 '1%'

22.08.01

지난 2주간 어땠어요? 잘 보냈나요?


아니요. 잘 못 보냈어요.


왜?

그러니까. 이게 좀 말씀드리기 복잡한데요. 일단 잠을 너무 많이 잤어요. 연휴 때에 배터리가 방전된 것처럼 잤거든요. 거의 좀비처럼. 너무 피로했으니까 어쩔 수 없는 회복기였나 생각도 드는데, 그냥 기분이 내내 좋지 않았어요. 그리고 밥 잘 먹으라고 주신 약 있잖아요. 그걸 먹어도 식욕이 안 생기고, 끼니때가 지나면 그냥 속이 쓰리더라고요. 배고프다는 느낌은 못 받았어요. 근데 제가 아이스크림은 진짜 많이 먹었어요. 하루에 막 세 개 네 개씩 먹고, 눈 뜨자마자 물 한 컵 마시고 아이스크림 먼저 먹고 그렇게. 왜 그랬냐면, 며칠 전에 밤에 집에 가는데 어떤 여자분이 브라보콘을 먹으면서 가는데 그게 진짜 맛있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편의점 가서 아이스크림을 엄청 사고, 그때부터 계속 먹어요. 근데 너무 맛있는 거예요. 밥은 안 먹는데, 아이스크림은 막 맛있어서, 엄청 먹고. 하루에 빵또아 세 개씩 먹고 메로나도 먹고요. 선생님, 영화 '헤어질 결심' 보셨어요? 거기서 여주인공 서래는 겉으로 보기에는 일도 야무지게 잘하고 아주 흔들림 없는 사람인데, 집에서는 아이스크림을 밥대신 퍼먹다가 그대로 소파에서 잠들어요. 그냥 그 영화 생각이 나더라고요. 최근에는 집에 오면 그냥 잠이 와서 쓰러져서 자고요. 오늘 오기 전에 세보니까 저녁 약은 거의 5일 치를 안 먹고 그냥 잤고, 오전에 콘서타도 거의 일주일은 안 먹은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해야 할 일들도 다 미루고, 기분도 내내 다운이고, 그랬어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8월이 이렇게 엉망인 거는, 제가 심리상담받았던 그 일 때문인 것 같아요.

그렇지. 그랬을 것 같아. 그게 타격이 크지.

제가 학생인 강의도 펑크 내고, 제가 강사인 강의에서도 지각하고요. 완전 최악이죠. 저 완전 집도 엉망이고, 빨래도 이만큼 쌓이고, 연휴 때 집에도 안 가고, 거의 3년 만에 대학 친구들 만나서 한 번 바람 쐰 게 다고, 연휴 때 잠깐 일을 안 하니까 오히려 더 늘어지고. 근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 나 결핍 있다. 성장기 때 제대로 못 자라서 결핍 생겼다. 근데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어쩌라고?' 막 이런 생각이 들면서, 제가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긴 한데요. 저 정말 제 성격에 어렵게 안 자랐으면 이렇게 지금 멀쩡하게 못 컸을 것 같아요. 아주 망나니 됐을 것 같아요.

그러니깧ㅎㅎㅎㅎ. 그랬을 것 같다.

그렇죠? 그러니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결핍 때문에 내가 이렇게 자랐는데, 난 지금의 내 모습이 꽤 마음에 드는데?' 하면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돌아가지도 못하는데 어쩌라고 그냥. 어쩔 수 없지 뭐! 냅둬 냅둬, 그냥 내 마음대로 살 거야. 이런 생각이 들면서, 빨래도 '아 해야 하는데..' 이게 아니라 '지금 하기 싫으니까 안 할 거야. 냅둬 내일 해.' 막 이렇게 생각이 들고. 좀 웃긴데, '하기 싫으니까 안 할래' 이걸 결정하는데 제가 막 '주체적'으로 결정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이상하죠. 근데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짜증 나고 괴로운 날들이었는데, 근데 제가 그걸 '느끼고' 있잖아요. 예전에는 삶과 유리된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그냥 삶에 푹 절여진 것 같고. 되게 짜증 나는데, 오히려 그 심리 상담 때문에 되려 '산다는 느낌'도 좀 받게 된 것 같고. 예전에는 사람들한테 제 이야기를 엄청 하고 싶었는데, 이젠 굳이 왜 그래야 하나 싶어 지면서.

아 그리고, 조금 쉬다 강의를 하니까 좀 재미도 있더라고요. 그리고 가끔 제게 고민 상담해 오는 친구들이 있는데, 제가 전문가는 아니어서 해결해주지는 못하지만, 그냥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위로해주려고 하거든요. 그게 무슨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그때 제가 말했던 한 친구 있잖아요. 그 친구가 최근에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항상 혼만 났었는데, 이제 자기를 '고칠' 수 있을 것 같아서 '기쁘다'라고 고맙다고. 전 제가 그런 말 듣는다고 사실 엄청 뿌듯하고 그렇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그냥, 아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기기엔 그건 아닌 것 같고. 뭐, 정말 복잡했던 시간이었어요. 컨디션도 최악이고요. 근데 뭔가..


뭐가?

그렇게 8월에 바닥까지 침전되어 있다가 9월이 딱 되니까. 그냥 좀 개운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하핳 그리고 내가 보기엔 이제 약 안 먹어도 잘 살 것 같은데? 약 좀 줄여보자. 이야기 들어보니까 완전 잘 지내고 있네. 그리고 꼭 책 써야겠다. 글 쓰는 거 멈추면 안 돼. 내가 요새 읽고 있는 책이 있는데, '나리 나리...'

'개나리'요?

아니 아니 '김나리' 그냥 에세이집인데, 뭔가 특별하게 결론이 안나도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좋더라고.

혹시 내가 아는 김나리 씬가? 친구 있는데. 한 번 읽어볼게요. 암튼 선생님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제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했어요.

작가의 이전글 가랑비에 옷 젖는 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