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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Sep 27. 2024

영화 <룩 백> (2024)


이번에 개봉한 영화 <룩 백>을 볼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타치카와에 살 때도 시네마시티(Cinema city)에서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고, 후쿠오카에 출장을 갔을 때도 일정이 빨리 끝나고 나면 저녁 6시부터는 자유시간이 있었으니까 하카타역(博多駅) 빌딩에 있는 극장에서 볼 기회가 있었지만, 이상하게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웃긴 말이지만, 후지노가 그린 "방에서 나와라!" "방에서 나오지 마!"라고 하는 4컷 만화와 같은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영화를 보지 않았는가? 두 가지 이유에서, 영화 보기를 망설였던 것이다.


첫째로, 원작에 대한 존중. 원작 만화 <룩 백>은 2021년에 공개됐고, 온라인 지면에 무료로 공개되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만화를 단숨에 읽었다. 그런데 재밌게도 나는 원작 만화를 읽고 나서 "잘 그렸다", "훌륭하다!" 이외에 특별히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없었다. 아마 그 당시에 내가 아베 토모미, 토요다 테츠야 선생님, 마츠모토 타이요 선생님의 만화에 더 관심이 있었고, 후지모토 타츠키에게서 '예술'의 냄새보다는 오히려 점프 만화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에, 훌륭한 만화라는 감상은 있었지만 이외의 감상은 묻어두었던 것도 있다. 그래서일까, 영화가 개봉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도 원작 만화를 보고 난 뒤의 느낌 이상의 느낌을 영화에서 느끼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둘째로, 당시에 좋은 사이였던 일본인 여자친구가 만화 <룩 백>을 보고 나서, 내가 칭찬했던 것에 반감을 표현했던 적이 있다. 그녀는 정신질환 비슷한 걸 가지고 있었는데, 만화 <룩 백>의 마지막 장면에는 괴한이 곡괭이를 들고 미술대학 내부로 침입해서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장면이 있다. 만화에서는 2페이지 내외로 표현이 되었지만, 그러한 묘사가 조현병 환자(일본에서는 통합실조증이라고 부른다)에 대한 편견 또는 스테레오타입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여자친구는 만화 <룩 백>에 대해서도 호의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고 내가 칭찬을 했던 것에도 반감을 표했다. 그 뒤로 나는 이따금 이 만화가 정말로 정신질환을 가진 환자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작품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았다.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영화가 개봉했을 때,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였지만, 3년 전 그날의 에피소드가 기억의 수면 아래에서부터 떠올랐다.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영화 <룩 백>은 아주 좋았다. 원작의 분위기나 연출, 캐릭터 디자인을 충실하게 재현했고, 불필요한 이야기를 넣지 않았다. 스튜디오 두리안과 영화감독인 오시야마 키요타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지만 영화를 "영화답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점이 느껴졌다. 다만 내가 느낀대로 말하면, 영화 <룩 백>은 평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영화처럼 느껴졌다는 것에서부터 이에 대한 감상을 쓰는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되는가?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불러 일으킨다는 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려운 문제다.

우선 철학적으로 보면, 영화 <룩 백>은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Sein)와 존재자(Seiendes)의 구분이 있고, 영화에서 나온 두 주인공이 존재자(동시에 현존재)라면, <룩 백>의 메시지는 "존재(Sein)를 부여받은 것에 대한 감사"라는 함축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하이데거가 왜 존재를 부여받은 것에 감사를 느껴야 한다고 주장했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독일어에 대한 철학적인 분석을 수행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독일어 속에는 무엇이 있음(being)을 표현하는 두 가지 동사가 존재한다. 존재(sein)동사는 Ich (bin), Du (bist), Er (ist) 등으로 표현되며, 문장 전체를 수식할 경우 존재동사는 "Es gibt"라는 형태로 바뀐다. 그런데 이 "Es gibt"는 두 단어로 이뤄졌지만 실제로는 무엇 무엇이 있다, 고 하는 한 단어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서, "Es gibt den Tisch"는 책상에 대한 문장이다. 한국어로는 "거기에 책상이 있다" 정도로 번역된다. 그런데 여기서 "거기에"라는 말은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독일어를 사용할 때는 문장 안에서 반드시 써 주어야 하지만, 한국어에서는 그렇지 않다.

아무튼, 존재동사의 "Es gibt"는 "There is"에 대응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gibt"라는 표현이 "geben" 동사의 격변화라는 사실로부터, "Es gibt"가 "그것이 선물을 준다 (It gifts)"라는 뜻으로 직역됨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그것은 누구인가? 위대한 철학자인 하이데거에게는 분명하다. 그것은 신이고, 존재자를 가능하게 만드는 존재다.


이제 영화 <룩 백>으로 돌아오자. 영화 속에서는 두 번의 교환이 발생한다. '문지방'을 넘어가는 숭고한(sublime = sub+lime) 종이 쪼가리가 있다. 쿄모토의 장례식에 다녀온 후지노는 우연히 샤크 맨을 읽다가 쿄모토가 꽂아놓은 4컷 만화를 읽는다. 이 종이는 우연한 계기로 인해서 만화책 안에 꽂혀 있을 뿐이지만, 쿄모토의 죽음을 통해 후지노는 그것에 "모든 일의 원흉"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후지노는 종이를 찢어서 분노와 후회를 표현한다. 이때, 종이 쪼가리 하나가 문틈으로 들어간다. 다른 가능세계에 살고 있는 쿄모토는 종이 쪼가리를 우연히 받아 든다. 종이 쪼가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방에서 나오지 마! (出て来ないで)"

번째 교환은 종이 쪼가리가 아니라 온전한 종이다. 가라테 도장에 다니는 후지노에게 도움을 받은 쿄모토는, 즐거운 마음으로 4컷 만화를 그린다. 후지노가 자신을 구해주긴 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는 곡괭이가 어설프게 등에 꽂혀 있는 웃긴 만화를 그린다. 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쿄모토가 처음으로 "웃긴 만화"를 그렸다는 점이다. 그전까지는 "웃긴 만화"를 그릴 생각도 하지 않았으리라. 이 만화도 창문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서 '문지방'을 넘어서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후지노에게 전달된다. 후지노는 "웃긴 만화"를 읽고 나서 무언가 결심을 한다. 이제 연재를 중단한 샤크 맨을 다시 그릴 때가 온 것이다. 이야기는 작가에 의해 이어져야 한다.

번의 교환이 왜 발생하는지는 영화 <룩 백>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원작 <룩 백>에서는 꽤나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생각된다. 인간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만화 세상의 논리를 적용하면 '문지방'을 넘어가는 종이 쪼가리는 컷과 컷 사이를 넘어가는 것과 동일하다. 컷과 컷 사이에는 (적어도 만화 주인공에게는) 무한에 가까운 거리가 있다. 오른쪽에 있는 컷에서부터, 왼쪽에 있는 컷으로 넘어가는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창조자는 컷과 컷 사이를 넘어가는 우연과 기적을 하나의 '필연성'으로 재창조할 수 있다. 원래 필연성은 없었지만 그 자리에 필연성이 탄생한다. 존재가, 존재자들의 세계를 가능하게 만든다. 존재는 존재자에게 어느 가능세계에서 존재한다는 특권을 부여한다. 죽음이라는 단절로부터, 죽은 자를 살리는 "Es gibt"의 기적이 펼쳐진다. 누구에 의해서? 창조자=만화가에 의해서.

이러한 삶과 죽음의 대비, "Es gibt"의 기적은 나카무라 하루카의 엔딩곡 "light song"에서도 암시적이고 암묵적이기는 하지만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light song"은 가벼운 노래라는 말일까? 그게 아니라 "빛의 노래"라는 뜻이라고 나는 믿는다. 말년의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빛은 존재의 메타포에 다름 아니다. 존재에 대한 최초의 표현은 빛(Licht)이다. 빛 속에서 존재자는 존재를 부여받고, 현존재로 태어난다.


영화 <룩 백>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둠이 드리워진 작업실에서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만화를 그리는 후지노의 등 너머로, 태양이 떠오른다. 창문 바깥에서는 태양이 빛을 준다. 빛을 받으며 존재자는 자신에게 존재를 선물한 누군가에게 감사를 드린다. 슬픔 속에서도 장미가 있고, 꽃을 피운다. (헤겔의 말처럼, 여기에 장미가 있으니 춤을 출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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