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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Nov 06. 2024

클리어런스 세일 (1)

사소설 시리즈 #1

나와 아내가 이 집에서 같이 살게 된 지도 벌써 이 년이 지났다. 처음에 이곳으로 이사를 왔을 때는, 예전에 우리가 살던 곳보다 좁은데다가 방도 두 개밖에 없는 집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자신이 없었지만, 두 방들 중에서 좁은 쪽의 방 하나를 작업실로 개조하고 또 다른 방을 침실로 꾸미고 그 안에 커다란 더블베드를 집어넣고, 거실에 소파를 두고 보니까 18평밖에 안 되는 좁은 집이라도 어떻게든 지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내 역시도 나와 같이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우리가 이 집에서 사는 동안 한 번도 말다툼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한 가지 특기할 점이다. 아마도 우리가 집에서 마주치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 아내가 근무를 마치고 오후 6시에 집으로 돌아오면 그 시간에 나는 집에서 작업을 마치고 간단한 저녁 식사를 준비한 뒤에 밖으로 나가서 카페에 가는 경우가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내가 저녁을 먹고 나도 밖에서 저녁을 해결한 뒤에, 우리는 밤 아홉 시에 집에서 만났다. 그리고 식탁에서 한두 시간 가량 대화를 나누고, 대화를 나누면서 프랑스산 레드 와인이나 캔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씻은 뒤에 아내가 먼저 자러 가면 나는 작업실에서 음악을 감상하거나 혹은 읽고 싶은 책을 읽은 뒤에 일기를 쓰고 나서 그것을 소중한 물건처럼 봉한 뒤에 잠자리에 들었다.


아내와 함께 살면서 처음으로 얻은 고요한 삶의 평화는 정말이지 낯선 것이었다. 나는 조금 더 파란만장하고 볼거리가 많은, 역동성이 넘치는 부부생활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 기대를 명시적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어도 아마도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품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아무튼 나는 평화로운 생활에 익숙해진 나머지, 아내와 영원히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스럽게 그것을 바라는 게 이상한 일이지만.

아내가 갑자기 사라지기 전까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시를 쓰는 Y와 서울에서 만나기로 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Y는 모 대학교의 국문과 대학원의 석사과정에 다니면서 한국의 유명한 시인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 시인을 연구할 뿐만 아니라 본인이 직접 시를 써서 발표하기도 하는 시인이었다. 우리가 처음 알게 된 것은 지금은 사라진 「던전」이라는 문학 연재 사이트에서였다. 나는 그 사이트에서 오래 전에 쓴 SF 소설을 연재했고 그는 매우 인상적인 제목을 단 시집을 연재하고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던전」에 소속된 작가들 중에서 시를 연재한 사람과 소설을 연재한 사람의 비율은 거의 반반이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나는 소설가와 교류를 전혀 하지 않았고, 시인들과 교류를 주로 하는 편이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혹은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고민한 적도 있지만, 언제나 뚜렷하고 확실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던전」에서 시를 연재한 세 명의 시인과 친분을 맺게 되었고, 국문학 연구자 겸 시인 Y는 그 중의 한 명이면서 동시에 셋 중에서는 문학적인 의미에서 가장 정석적인 과정을 밟고 있는 사람이었다.


서울대입구역 2번 출구 근처에 있는 네팔식 카레 전문점에서 Y를 보기로 했다. 카레 전문점은 지하에 있었고 나는 도착하자마자 Y를 찾았다. 하지만 긴 코트를 입고 있는 Y를 찾을 수 없었고, 결국 위에서 찾기를 포기하고 아래로 내려가서 그를 찾기로 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같은 가게의 뒷문으로 들어오는 Y가 보였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주인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메뉴판을 훑어본 다음, 주문을 마치고 한숨을 돌린 다음에, 곧장 나는 지난 밤에 꾼 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내와 같이 살면서 이 년이라는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꿈의 마지막에 갑자기 아내가 사라진다는 내용이었는데 과연 Y가 이런 이야기를 지루하게 듣지는 않을지 내심 걱정이었다. 하지만 내 걱정은 기우라는 듯이, Y는 내가 장황하게 이야기한 꿈의 내용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나는 Y에게 말했다.

“예전에는 한 번도 미래의 아내가 등장하는 꿈을 꾼 적이 없는데요. 어젯밤에 갑자기 그런 꿈을 꾸니까, 뭔가 느낌이 이상한 거에요. 왜 아직 알지도 못하는 아내가 뜬금없이 꿈에 나온 걸까요?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이 년 동안 잘 살아온 것 같은데 아내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너무나 이상했어요. 일어나자마자 바로 볼펜을 집어 들어서 꿈일기를 적었으니까 말이죠.”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나를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듣는 Y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내 꿈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메타포를 읽어내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정보를 추가로 제공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나는 짚이는 점들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사실 그전에도 구체적인 꿈을 꾼 적이 있기는 해요. 이런 말을 하면 못 믿을지도 모르겠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는 꿈을 꾼 적도 있고요. 그래서 미래의 아내가 꿈에 등장하는 것도, 일종의 예지몽이라고 생각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 그렇지만 역시나 아내가 사라진 뒤에 내가 무슨 행동을 취할 것인지가 공백으로 남아 있다는 점이 걸린다고 해야 되나, 아내를 찾으러 나간다는 결심도 없이 사라진 지점에서 꿈이 끝나버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죠. 게다가 아내의 얼굴도 떠오르지가 않아요.”

내가 이야기를 끝마치자 마크니 카레와 양고기가 들어간 걸쭉한 카레, 그리고 버터 난과 갈릭 난이 차례대로 나왔다. 나는 라씨를 추가로 주문하고 Y는 물을 달라고 해서 웨이터가 유리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잠시 꿈에 대해선 접어두고 식사를 하기로 했다.

식사의 중간 지점에서,  Y는 내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J씨는 지금 현재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가 없는 건가요?”

나는 그 질문에 대답했다.

“음, 글쎄요. 사귀고 있는 사람은 없지만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여자라면 한 명 있어요. 연락을 주고 받은 지 꽤 되었지만, 아직까지 만난 적은 없습니다. 현실에서는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요. 이곳에서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그런가요. 아내의 꿈이라…… 상징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꿈 속에서 아내의 존재는 실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나의 또 다른 자아를 상징하니까요. 아내가 J씨의 다른 메타포인 셈인데, 좁은 집에서 이 년이나 J씨의 자아와 동거를 해 왔다는 건 다른 자아와 화해를 이루었다는 말 아닐까요? 물론 단순하게 해석하면 그렇겠지만. 단순하게 해석하는 것이 정답에 가까울 때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다른 자아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다시 상징을 끌어오자면, 이번에는 다른 자아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아요. 그 ‘새로운 세계’가 어디에 있고 무슨 종류의 세계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 세계를 알고 있는 건 J씨의 자아 말고는 없을 거에요.”

참으로 기묘한 이야기다. 물론 꿈이라는 게 이성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이미지의 조합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의 또 다른 자아와 (마음 속에서) 동거하고 있다는 말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누군지를 모르는 어떤 자와 동거하는데, 그 사람이 아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런 할 말도 없다.

우리는 꿈이라는 주제를 벗어나서 다른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예컨대 Y가 석사 논문을 쓰고 있는데 석사 논문의 주제가 남들이 거의 연구하지 않은 독특한 주제라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나간다는 사실,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어려움들, 같이 「던전」에서 시와 소설을 연재한 문학 동지들의 근황 등등. 우리의 입에서부터 자연스럽게 S 시인의 이름이 나왔다. 둘 다가 알고 있는 S는 던전을 운영한 ‘던전지기’이자 최근에 모 출판사에서 시집을 낸 시인이라, 무척이나 특이한 캐릭터였다. Y는 S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과 같은 대학교를 졸업한 다른 Y를 언급했다. (이제부터 나의 대화상대인 Y는 ‘Y’라고 적고, 다른 Y는 소문자 y로 적는다.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하시기를 바람.)

“이번에 y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방금 가게로 들어오기 전에 문 앞에 서 있는 군인을 한 명 보았는데, 그 사람을 보고 어쩐지 y가 떠올랐어요. 던전에서 연재한 시들은 참 멋지고 좋았는데요. y와 Y님의 관계는 정확히 어떻게 되는 건가요?”

방금 전에 나온 라씨를 마시고 나서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Y가 대답했다.

“설명하자면 조금 복잡해요. 일단은, y는 저와 같은 대학교를 졸업했어요. 정확히는 몇 학점을 남기고 입대를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뤘어요. 대학원으로 간 저처럼. 그리고 y는 여러 차례나 신춘문예 본심에 올라간 적이 있는데 (저도 y만큼이나 여러 차례 본심에 올라갔다고 Y는 지나가면서 덧붙였다.) 아직까지 등단하지는 못했고요. 그래서 대학원에 가서 등단을 노리기보다는 바로 입대하기를 택한 것 같아요. 저는 오래 전에 ‘문장’의 워크샵에서 y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 이후로는 자주 만나지 않고, 온라인 상으로만 교류를 했지만요. 말씀대로, y는 대단한 시를 쓰는 사람이죠.”

종종 나는 칭찬하려는 의도를 갖지 않은 채로 누군가를 칭찬하는 경우가 있다. 이번에는 y가 칭찬의 대상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소설 만큼이나 시를 읽고 평가할 줄 아는 감식안이 없다. 내가 현대시를 평가하는 것과 일반인이 현대시를 평가하는 것 사이에 질적인 차이는 거의 없다. (세밀하게 파고든다면, 매우 조금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밀한 차이는 시의 세계에서는 무시된다 해도 큰 문제 따위 없을 것이다.) 나는 「던전」에 연재된 적이 있는 y의 시집을 읽었고, 그 중에서도 몇 편의 시를 높이 평가했다. 게다가 내친김에 y가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 쓴 시를 찾아서 읽기도 했다. 던전에 연재된 시를 보고 나서, 다른 시는 어떨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 시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느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는데, 시를 읽어보니 고등학생이 쓸 수 있는 단순한 시가 아니었다. 이미 인생을 30~40여 년 살아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뭔가’가 고등학생의 시 속에 있었고, 그 사실에 나는 순수한 놀라움을 경험했다.

같은 시인으로서 Y도 그의 시를 좋게 평가하는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Y는 y가 등단하기 어려운 이유를 다음처럼 간단명료하게 설명해 주었다.

“사실, y처럼 시를 쓰는 사람들은 심사위원 앞에 서면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어요. 등단을 하기 위해서는 전원의 찬성투표를 받아야만 하는데, y의 시는 한두 사람의 지지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모두의 지지를 받기는 어렵죠, 아무래도. 저도 y가 여러모로 특이하고 재미있는 시를 쓴다고 생각하지만, y가 재미있고 좋은 시를 쓰는 것과 y가 문예지에서 상을 받아서 등단하는 일은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한 것이니까요.”

그래서 y는 던전을 필요로 했고, 던전은 y가 필요로 하는 지면을 제공하는 좋은 공간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네팔식 카레를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우리는 장소를 옮겨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기로 하고는 사람들이 적은 신림동 주변의 카페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이 동네 주변에서 좋은 카페를 찾는 일은 예상한 것보다 몇 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영업을 하고 있는 카페가 거의 없었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스타벅스라도 들어가서 음료를 주문하는 편이 나을 뻔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동네를 더 들어가서 이곳 저곳을 탐색한 뒤에야, 겨우 길가에서 영업하고 있는 조용한 카페를 찾아냈다.

카페 내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서 테이블이 한두 개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는 빈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카페의 인테리어는 주로 나무로 되어 있었고 북유럽 감성 같기도 하고 일본 감성 같기도 했지만, 굳이 말하자면 국적이 없는 카페 인테리어였다. Y는 자리에서 책가방을 열고 안에 들어 있던 몇 권의 시집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이수명 시인의 시집들이었다.

이수명 시인은 1965년 출생으로,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같은 곳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녀는 현대시라는 장르 중에서도 ‘무의미시’를 쓰는 사람이었는데, 이 무의미시라고 하는 게 무엇이냐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극단까지 몰아붙여서 의미가 한계를 맞이하는 지점까지 언어를, 우리의 경우 한국어를 구사하는 시를 말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자면 “말할 수 있는 언어”를 통해서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행위를 시 장르 안에서는 ‘무의미시’라고 부른다고 볼 수 있다.

그(이수명 시인은 여성 시인이지만, 여기서는 성별이 없는 그라는 대명사로 부르겠다)는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붉은 담장의 커브』, 『물류창고』 등의 시집을 문학과지성사 등 유명한 문학 전문 출판사에서 출판한 바 있다. 이미 문단 안에서는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그리고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중견 시인이었다. Y는 이 시집들을 제법 낡은 책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어쩌다 카페를 찾게 되면 틈틈이 석사논문을 쓴다고 그랬는데, 나는 저렇게 많은 시집을 들고 다니는 Y가 대단해 보여서 실제로 그에게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Y는 시집들이 가볍고, 부피도 작아서 들고 다니는 건 어렵지 않다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나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어서, 시집을 들고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헤어지기 전에 다음에 또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왜인지 몰라도 재회의 약속을 맺지 않는다면 다른 일회적인 만남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예감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근거가 없는 예감일수록 잘 맞아 떨어지는 법이다. 골목 한편에 있는 카페로부터 서울대입구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우리는 S가 시집을 출판한 출판사 이야기를 했다. 그 출판사는 S를 비롯해서 던전에서 시를 연재한 적이 있는 K의 시집을 출판한 적이 있는데, 나는 현재 등단하지 않은 S와 K의 시집을 출판한 그 출판사가 여러모로 대단한 결정을 내렸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자 Y는 출판사가 비등단 시인의 시집을 출판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말했고, 그 이유를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씁쓸한 기분이 드는 이유였다.

걸어가는 동안에 로또와 즉석복권을 파는 편의점이 보여서, 당시 즉석복권을 사는 취미를 갖고 있던 나는 충동적으로 편의점에 들어갔다. 서울대입구역에서 걸어 나오면 바로 근처에 있는 GS25 편의점에서는 스피또 500—500원짜리로 가장 저렴한 즉석복권—을 팔고 있었다. 지갑에서 만 원을 꺼내서 스피또 500을 스무 장 달라고 했더니 아르바이트생이 놀랐다.

“스피또 500 스무 장이요?”

그 말에는 이것을 진짜로 20개나 구매할 것이냐는 놀람과 의문이 섞여 있었다. 아무런 주저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복권들은 내 손에 들어왔다. 즉석복권을 사고 나와서 우리는 서로를 위한 덕담을 나누었다. 먼저 내가 Y에게 석사논문을 무사히 완성하기를 바란다고 말했고, Y는 내게 산 복권이 당첨되기를 바란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만약 당첨이 된다면 Y에게도 당첨금을 나누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건 결국 이뤄지지 못했지만.

Y와의 만남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이후에도 나는 Y를 두 차례나 더 만나게 된다. Y를 만나기 전에도 몇 가지 해프닝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이곳에서 말하고 싶은 오래된 기억이 있다. 그렇게나 오래 된 기억은 아니지만, 세부적인 디테일을 잊어버릴 만큼 시간이 지난 기억이기는 할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자리를 빌어서 지난 시간을 회상하고 글쓰기라는 매개를 통해 되살리고 싶은 마음이다. 그것은 8년 전의 일로, 나에게는 당시 친한 여자인 친구가 있었다.



그 여자의 이름을 영이라고 해 보자. 영은 나보다 정확하게 네 살 나이가 많았다. 네 살 차이면 편하게 누나라고 부를 법도 한데 나는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지 않고 항상 M씨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녀를 나를 당시의 닉네임인 ‘바르데’ 아니면 이름을 붙여서 ‘OO씨’라고 불러주었다. 이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가 나를 아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의 애매한 관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간에 우리는 서로를 이름으로 불렀고, 이름으로 부르는 친밀한 관계는 대략 삼 년에 걸쳐서 지속되었는데, 그 사이에 영의 친구인 A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여기서 A에 대한 설명을 먼저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다.

A는 영 씨의 친구로 서로 오랜 시간 알고 지내온 모양새였다. 나는 영에게 A를 소개받았을 때 그녀로부터 직접 전해 들은 것인지 아니면 인터넷에서 읽은 정보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A가 인도 옆에 있는 스리랑카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청소년기에 한국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A는 매우 이국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리랑카에서 살았다고 해서 그녀가 스리랑카어를 할 줄 아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곳에서 국제학교(International Boarding School)를 다닌 A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A는 우리 앞에서 영어로 몇 마디 말했는데 아마도 그녀의 영어 실력은 모국어인 한국어보다 뛰어나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영 씨와 함께 A를 보러 갔을 때 매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가지는 영보다 A의 나이가 더 많다는 것이었고, 다른 이유는 A에게 내가 쓰는 소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본다면 후자는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A는 내가 쓴 소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만나지 못한 A에 대한 소문을 하나 더 알고 있기도 했다. 그 소문은 A와 그녀의 전 남자친구에 대한 것으로, 그들은 같은 대학교에서 만나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 서로 친해졌는데 A는 자신보다 나이가 두 살 어린 남자친구를 잘 대해주었다.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A와 그녀의 남자친구는 서울의 어딘가에 있는 클럽에 놀러 갔다. 클럽에서 A와 남자친구는 신나게 놀았을 것이다. (직접 본 것도 아니므로 그들이 신나게 놀았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판단할 입장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러나, 클럽에서 노는 도중 남자친구가 뭔가 잘못된 행동을 저질렀고,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혈압이 올라간 A는 남자친구의 뺨을 때렸다. 뺨을 세게 후려쳤다고 했으니 다른 방식으로 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A와 남자친구는 장렬하게 헤어졌고 남자친구는 전-남자친구가 되었다, 라는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A를 조심스럽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코엑스 파르나스몰 내부에 있는 어느 우동집에서 만났고, A는 우동을 참 맛있게 먹었다.

우리는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A와 나는 출신 대학교가 동일하지도 않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났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여덟 살 정도 차이가 났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몇 가지 주제를 화제로 삼아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반드시 기록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들과 나눈 대화 중에서도 지금 나의 기억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여동생’이라고 말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A를 향해 말했다.

“네. 여동생이 한 명 있고, 올해로 초등학교 1학년에 올라가요.”

그녀가 디저트를 먹으면서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왜 ‘동생’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여동생’이라고 하시는 거에요? 동생의 성별을 붙여서 말할 이유가 없잖아요.”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미안합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나는 이것이 잘못된 일인지, 그게 아니면 A가 뭔가 중요하지 않은 곳에서 말꼬리를 잡고 있는 것인지 잘 판단할 수가 없었다. 옆에서 영 씨가 거들었다.

“맞아. A가 말한 것처럼 거기서는 ‘여동생’이 아니라 그냥 동생이라고 말하는 게 맞을 걸. M씨는 역시나 성별의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 것 같아요. 고정관념에 갇혀 있으니 여동생을 ‘여동생’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요.”

그녀들은 정말로 합이 잘 맞았다. 오래된 와인 같은 우정을 현장에서 직접 마주한 느낌은 각별하고 남달랐지만 나는 그에 대해 감상을 표현하지 않고서 그냥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 우리는 자리를 옮겨서 케이크와 커피, 홍차를 취급하는 어느 카페로 들어갔다. 뭔가 이야기를 더 나눌 것이 있나 싶었지만 A와 영은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여서 나도 순순하게 그들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 카페는 독특한 인테리어를 하고 있었는데, 공간이 좁은 실내를 넓게 보이게끔 하려고 벽을 하얀색 페인트로 칠하고 나서 광도가 높은 조명을 천장에 달았다. 또한, 스타벅스 같은 프랜차이즈 카페처럼 테이블 사이에 간격을 두고 띄엄띄엄 배치한 것 등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코엑스 역 앞의 파르나스몰은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는 하나의 가게가 차지하는 면적이 좁았고, 그 카페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카페에서 우리는 주로 ‘문학 예술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은 당시에 어떤 독립출판사에서 장시—분량이 두 페이지를 넘어가는 긴 시를 말한다—와 단편소설 사이에 있는 장르의 구분을 파괴하는 글을 출판했다. 그리고 그녀는 장래에 소설가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소설에 관해서 아는 바가 없었고, 따라서 뭔가 코멘트하기를 주저했다. 반면에 A는 주로 영어 소설이나 논픽션을 번역하면서 문학을 좋아하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가 어느 웹진에서 주요 필진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한 편의 단편소설을 제외하면 그녀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읽은 A의 소설은 매우 독특하고 이상했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평가를 받을 만한 특이한 소설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A는 내가 영의 지인이고, 또 ‘남성적이지도 않고 맨스플레인을 하지 않는’ 남성이라는 이유로 나를 호의적으로 봐 주었던 것 같다. 그것도 벌써 팔 년이나 지난 시간이니 사람들 사이의 진실은 아마도 영원히 파고들 수 없겠지만, 당시에 내가 받았던 인상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A는 내가 왜 데뷔하려고 하지 않고 이른바 독립적인 장소에서—이를테면 ‘던전’ 같은 곳에서—소설을 쓰고 발표하는지 물었다. 팔 년 전의 나는 이제 막 소설이라는 장르에 발을 담근 신참으로, 장래에 내가 소설가로 살아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활동적인 취미들과 비교해서 ‘소설 쓰기’가 나에게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소설을 쓰면 현실의 갖은 문제로부터 ‘글을 쓰고 있는 순간만큼은’ 해방될 수가 있었다. 이것이 창작을 시작하는 동기로서 적절한지 어떤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하나의 유력한 동기가 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진하게 우린, 김이 솟아나는 홍차를 느릿하게 마시고 나서 우아한 표정으로 A는 물어보았다.

“M님이 쓰는 소설을 다른 곳에 응모할 생각은 없으신가요? 예를 들면 각종 신문사의 신춘문예 같은 곳에 투고를 해서 당선이 되면 그 길로 바로 등단해서 작가가 될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그렇게 하는 편이 미래의 작가 생활을 위해서도 낫다고 보는데요. 이것도 어디까지나 저의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지만.”

나는 그녀가 그렇게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식으로 말해준 데 대해서 감사함을 느끼면서도, 정확한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서 잠깐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 때의 혼란조차 이제는 명료하게 이해가 되는 듯하다. A의 말은 나에게 선의로 주어진 것이었으며, 그 말을 하면서 A는 아무런 의도를, 문자 그대로의 말과 다른 의도를 내포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그 말은 사실의 측면에서도 옳았는데, 이를테면 등단이란 순문학 분야에서 작가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거쳐가야만 하는 길이기도 했다. 비록 ‘등단’이 의미가 없어지고 있는 과정이기는 하더라도, 아직까지 순문학에서는 단편소설을 응모해서 신인으로 당선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으며, 등단 바깥의 길을 걸어간다는 일은 잘 상상되지 않았다. 아니, 그런 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때 내가 A에게 뭐라고 대답했는지 그리고 A와 영이 나에게 어떤 구체적인 조언을 해 주었는지는 이제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의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을 것이다.

물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등단을 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예를 들면, 나는 문학 연재 사이트에 장편소설을 연재하고 SF 소설을 몇 편 써서 이상한 공모전—결코 질적으로 나쁜 공모전이 아니라는 것을 덧붙인다—에 응모한 적도 있다. 개중에 두세 군데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아서 본심이나 최종심까지 가기도 했지만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서 다시 설명을 하자면) Y의 말대로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 박수를 받지 못한 나의 소설들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쓴 소설들을 모아서 단편집을 출판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포스타입이라는 연재형 블로그를 알게 된 후로는 나만의 포스타입을 만들어서 그곳에서 소설을 연재하기도 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그곳에서 연재한 소설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또한 멤버십 가입을 해 준 분들도 있으니까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지금에 와서 주어진 과거의 선택지들과 내가 내린 선택을 되돌아본다면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소설을 써서 등단하지 않은 것에는 개인의 노력과 재능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스토아주의적’ 운명이 작용하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운명에 무지한 채로 계속 글을 썼지만,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내가 순문학 작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분명하고 확고하게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인생은 참으로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강과 같다. 그녀들도 지금 생각해 보면 좋은 사람들이고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서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그녀가 제시한 길은 나의 길이 아니었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유명한 시 <가지 않은 길>처럼 나는 사람들이 덜 선택한 숲 속의 낙엽 쌓인 길을 선택하였고, 결과적으로, 소설을 계속 쓰지만 유명 문예지에 글을 발표하지 않는 매우 독특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이런 삶의 우연과 갈래들, 분기점들, 선택에 관해서는 현미경을 대어 분석한다고 해서 거기에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불가해한 삶의 우연들은 하나의 이야기의 형태로 제시되어야 하지, 원인과 결과를 나열하고 둘 사이의 관계를 분석해서는 안 된다. 그런 분석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가져다주지 않을 뿐 아니라 독자에게 설명할 길이 없는 불안함과 함께 지독한 외로움을 남길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느끼는 작가는 기만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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