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서부터 알아챘겠지만 방금 따끈하게 인쇄된 책을 받아 든 13세의 여러분들에게 전하는 말은 아닙니다. 13살, 혹은 14살이 된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마도 방학식 내지는 졸업식 날 선생님의 고리타분한 말투로 전달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른이 된 지금은 인쇄기에서 따끈하게 출간되어 도착했던 온기는 슬그머니 식어있을 테지만, 그런 사소한 것으로 우리의 반가운 재회를 방해하지는 맙시다.
많은 이들의 초등학생 시절의 기억이 그러하듯, 여러분은 이 시절을 ‘기억’한다기보다는 느낌으로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어슴푸레 떠오르는 선생님과 친구들, 교정과 왁자했던 순간들이 어설프게 이어져 여러분들의 ‘초등학교 때’가 되어버리지요. 교사로서 그에 대한 아쉬움은 없습니다만 이미 기억에서 가물해져 꽤나 타인이 되어버린 선생님이기에, 미래의 여러분들에게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기 약간은 민망스럽기도 하여 선생님 소개를 다시 합니다. 여러분의 6학년 담임. XXX입니다. 친구들이 뽀얀 책장의 먼지 속에서, 혹은 아득한 기억 속에서 묻어두었던 조그만 책자를 꺼내어 펼쳐 들어준 덕택에 여러분들을 아주 오랜만에 만나 반갑고 기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선생님은, 여러분들이 이 책자를 펼쳤을 때 지을 다양한 표정을 상상해 봅니다. 슬프기도, 기쁘기도, 웃기기도, 복잡하기도 한 여러분들의 표정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순간에서 이 책자를 펼쳤습니까? 누구와 이 책자를 보고 있습니까? 누군가는 하릴없는 와중에 우연히 펼쳤을 수도, 사랑하는 연인과 손을 맞잡고 있을 수도, 여러분을 꼭 닮은 자녀와 엄마, 아빠의 미숙한 과거를 살펴보려고도, 아니면 송곳같이 힘든 하루가 나를 찌르는 와중에 펼쳤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때의 여러분들은 하루하루 성장하기 바빴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키도 커지고 목소리나 외모도 변화했지요. 그뿐일까요. 여러분들의 지식과 생각의 깊이는 어떻고요? 3년 전만 해도 나눗셈의 나머지를 구하려 손발을 꼼지락거리던 여러분들이 지금은 국가권력의 분립에 대해 논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성장 속도입니다. 헌데 그렇게 성장한 6학년조차도 아주 서툴지요? 지금 여러분들 자신의 과거 글을 보고 있노라면 스스로의 변화가 굉장히 위대하고 대단했음을 새삼 느낄 것입니다.
아쉽게도 어른이 된 여러분은 많이 다릅니다. 어른으로 많이 살아본 선생님은 아닙니다만, 어른과 아이의 많은 차이점 중 속상한 것이 성장 속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른으로 커갈수록 매해 성장하는 것은 참으로 적지요. 1학년이었던 여러분이 6학년이 되는 동안은 매우 큰 성장이 있지만 25살이 30살이 되었더라도 많은 것이 바뀌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나태한 것도 아니지요? 모두가 앞으로 가는 와중에 조금이라도 따라가지 못하면 쳐지는 세상에서 남들과 평행하게 가는 것조차도 숨이 턱까지 찹니다. 따분한데 그 따분함을 유지하기 위해 고단하기까지 해야 하는 어른의 하루를 참아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일평생 넉넉잡아 35,000개의 하루를 살아냅니다. 35,000번의 해돋이와 해넘이 중, 극소수일지라도 기억 속에 꽉 붙잡고 있는 몇 번의 특별한 하루 몇 개가 우리에게 살아가는 힘을 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 말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귀었던 날이나, 내 자녀의 울음을 들었던 날이나, 내가 세운 인생의 목표를 이루었던 날, 장엄한 것을 보았던 날처럼 안 붙들래야 붙들지 않을 수 없는, 특별한 하루들 말입니다. 그런 날들을 붙잡고 즐겁게 곱씹어 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습관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선생님은 행복한 사람이란 35,000번의 하루 중 다른 사람보다는 많은 하루들을 소중히 껴안고 사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인생의 편린 몇 개를 만지작거리며 사는 것이 인간이라면 우리는 기억할 만한 하루를 최대한 많이 붙잡아야 한다는 것이 논리적인 결론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까다롭게 골라내 기억하기보다는, 최대한 많은 하루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이 행복에 이를 확률을 높이는 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잠깐은 감상할 만큼 아름다운 노을이 서린 하루, 작은 꽃잎이 눈처럼 흩날리는 봄날, 하늘이 시릴 만큼 파란 가을날, 주위 사람의 작고 우스운 실수에 눈물 나게 웃는 평일 어느 날, 아침잠과 낮잠을 거듭한 끝에 잠으로 때워버린 토요일, 간장 계란밥에 호화스럽게 계란을 3개 넣어먹기로 결심한 저녁날 등의 하루는 꽉 붙잡을 만합니다.
특별한 하루가 아니라, 평범하고 따분한 하루에서 특별함을 찾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의 능력입니다. 특정한 하루가 여러분을 붙잡아 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붙잡고픈 하루들을 꼭 붙들어 내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친구들이 뽀얀 책장의 먼지 속에서, 혹은 아득한 기억 속에서 묻어두었던 이 책자를 꺼내어 펼쳐 든 오늘 역시나 꽤나 붙잡을 만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랜만에 가만히 앉아 조금은 잊혀졌던 선생님과, 흐릿했던 반 친구들, 희미해진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는 오늘 하루 정도라면 살짝 붙잡아보셔도 좋습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여러분이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음을 기억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