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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곤두레밥 Nov 23. 2023

응달 밑엣 눈

경남 해안 도시 출신의 폭설 관람기


나는 경남 해안 도시가 고향이다.

그리고 그 지역 도시들이 으레 그러하듯 겨울이 따뜻하다.  

"갱상도 겨울 함 마 츄라이 해보소. 뜨시다 안캅니까."


고등학생 시절까지 내복, 폴라티에 동복 교복을 받쳐 입고 가끔 추운 날 바람막이 정도나 걸치고 지냈다고 이야기하면 패딩 없는 겨울을 상상하기 힘든 중부지방 출신 분들은 '그게 대체 가능하기는 한 건가' 하는 의심 섞인 얼굴을 보이시곤 했다.


물론 요즘 고향에 내려가면 롱패딩에 자신을 버무려놓은 인간 롱패딩 무침들이 겨울철에 대거 출몰하기는 하더라만은 어찌 되었든 고향땅에 도착하는 순간 느껴지는 훈풍은 잘 벼린 칼날 같은 바람이 귓불을 잘라대는 중부지방의 혹한에 비하지는 못한다.     



그러다 보니 내게 눈과 관련된 유년시절 추억은 손에 꼽는다.      



처음으로 책에서만 보던 눈사람을 만들었던 1997년 겨울이나, 1cm 내린 눈에 도로가 마비되어 반배치고사를 제시간에 보지 못했던 2004년 겨울, 전교생이 뛰쳐나가 눈을 향해 손을 뻗어대던 2008년 겨울 정도?


물론 따뜻한 바다 지역에서만 만들 수 있는 추억도 있다.


교정에 핀 오스만투스 꽃이 말도 안 되게 달큰한 살구향을 마구 내뿜어 대는 것이나 겨울철 마을버스를 타고 도착한 해변 바윗돌에 앉아 폭죽막대를 움켜쥐고 친구들과 키득거리는 것 따위의 것들 말이다.


그리고 중부지역에 와서야 오스만투스는 혹한을 버티지 못하는 남부지역 식물이고 폭죽막대를 켠 해변이란 여름휴가철에나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인간이라는 동물은 자신이 가진 것을 바라보는 동물이 아니지 않겠는가.     


남들은 다 누리는 이 '눈'이라는 것은 내 동향 사람들의 공통된 자그마한 '한'과 같다고 해야 할까, '호기심'이라고 해야 할까.     


사막에 단비가 내리는 것만큼이나 가끔 내리는 이 허연 것이 하늘에서 내리면, 사람들은 콧물과 그것보다 더 짭짤한 순수함을 얼굴에 가득 묻힌 채 남녀노소 몇 줌도 안 되는 눈으로 눈사람을 만드려고 시도하곤 했다.     


여기서 만들 수 있는 눈사람이라곤 장정 여럿이 힘을 합쳐봐야, 마트 장난감 코너의 콩순이 인형만큼이나 작았지만, 그 눈사람조차도 조금만 밖에 두어놓으면 사람들이 눈알과 손 따위를 정성스레 붙여놓았다.     


눈은 내 고향 사람들에게 선망이자 로망 그 자체였다.

"내 생애 첫 눈사람다운 눈사람. 종이컵 모자는 덤."




허나


대한민국의 신체 건강하다는 남아라면 모두가 간다는 군대,


그 군대에서도 운 없는 놈들이 바보같이 속아서 간다는 강원도 GOP에서의 군생활은 눈에 대한 내 환상과 순수함을 잘근하게 짓이겨버리기에 충분했다. 누군가 나에게 군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무조건 들어가는 것은 “눈”일 것이다.      


말하노라면 '군대에서 눈치운 이야기'와 같은 지루한 이야기일 테지만 짧게 요약해도 군인에게 눈이란 하얀 형태로 내리는 악마의 현신 그 자체이리라.     


시간이 지나 중부지역의 교사가 된 이후에도 눈은 귀찮기 짝이 없었다.    

 

차 앞유리에 내린 눈은 가뜩이나 추운 겨울에 손을 얼어붙게 만드는 녀석이었고,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온 단지 주민들이 자리싸움하게 하는 민폐덩어리였고, 제설이 안된 도로를 벌벌 거리며 운전하게 만드는 도로 위의 방해물이었고, 가뜩이나 진도 빼기 바쁜 2학기말, 반 학생들이 밖에 나가자고 조르게 만드는 그럴듯한 명분거리였다.     


처음 고향을 떠나 중부지역으로 왔을 때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던 눈에 대한 묘한 피로감 내지는 시큰둥함이 내게도 옮겨오는 순간이었다.     


고향을 떠나온 10년의 세월 동안 이쪽 지역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눈에 관해 시큰둥하게 살고 있던 나에게

다시 고향의 충격을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엄마였다.     








몇 년 전, 2월쯤 날씨가 꽤 풀려서 며칠 전 내렸던 눈은 녹고

가로수 응달 근처에나 눈인지 얼음인지 모를 허연 것들만 듬성듬성 남아

눈밭다운 눈밭도 딱히 없는 삭막한 겨울 풍경이 도시에 내려앉아있던 날이었다.     


오랜만에 차를 몰고 올라오신 엄마가 싣고 오신 김장김치는 제쳐두시곤 허겁지겁 바깥 놀이터로 향하셨다. 무슨 일인가 하고는 따라갔더니 엄마가 빨개진 손에 핸드폰을 꼭 쥔 채 무언가를 열심히 찍고 계신 것이 아닌가.


쪼그려 앉은 엄마의 핸드폰 액정에 비치는 것은 놀이터 나무 밑 응달에 조금 남아있는 눈.


식당에서 아무렇게나 버려둔 얼음인지 진짜 하늘에서 눈인지 구별이 안 갈 만큼 볼품없이 쌓인 눈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눈 같지도 않은 눈 뭐 하러 찍노. 김치나 내려 주가.’ 하는

퉁명스러운 경상도 아들의 무심한 말을 가볍게 무시한 엄마는     


‘내 올해 눈 처음 본다!’ 하시며 환하게 웃으셨다.     


엄마 얼굴엔 조금의 콧물과 그보다 조금 더 짭잘한 순수함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엄마의 ‘카스’에는 그 조그만 눈 가지고 종알거리는 엄마의 피드와 거기에 호들갑을 덧붙이는 엄마 친구들의 댓글이 줄지어 달렸다.     


환갑이 지난 양반들이 응달에 조금 남은 눈에 이렇게 설레다니.     


실소가 터져 나왔지만 마음 한켠에 그리움이 번뜩 솟았다.

한 줌의 눈에 설레던 내 모습을 엄마를 통해 볼 줄이야.


모르긴 몰라도 유년시절 내 얼굴에는 더 많은 콧물과 더 짠 순수함이 묻어있었을까 싶었다.    

   






글을 쓰는

오늘은 첫눈이 예보되어 있다.  


나는 여느 냉소적인 사람들이 그러하듯     

내일 치워야 할 눈의 시려움과

나가 놀자고 졸라대는 아이들의 소음

꽉 차버린 지하주차장에서 빙글빙글 도는 짜증을 예상하고 있다마는

     

마음속을 밀고 오는 짭짤함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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