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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곤두레밥 Dec 05. 2023

뜨뜻한 스타킹

최후의 배변 실수

  나는 어릴 적 성격이 적극적이지 못했다. 아니, 소심했다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나는 여러 가지 부분에서 소심했는데 이런 성격으로 가장 고역이었던 것은 선생님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간식을 못받아도, 모르는 것이 있어도 선생님에게 “선생님! 저 이러저러해요!”라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이 내 유치원의 일상이었다. 그래도 그 와중에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나이에 비해선 알아서 할 것을 척척하는 편이어서 불편한 것은 많지 않았다.


  이런 나에게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거나 티내지는 않았던 소싯적 자부심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한번도 배변실수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이가 만 5,6세에 불과한 유치원생이다보니 같은 반 친구들이 소변을 한 번씩 보는 실수를 하며 울음을 터뜨리곤 했으나 나는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세상이 무너진 듯이 울어제끼는 친구들을 보며 '대체 바지에 오줌을 왜 싸지? 안 참아지나 그게?' '오줌을 쌌다고 왜 울지?'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자만했던 댓가일까? 나의 조그만 자만심이 와르르 깨지는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내가 다닌 유치원은 사립 유치원이라 붉은색 타탄 체크무늬 원복에 하얀 스타킹을 신는 것이 규칙이었다. 유치원복 치고는 꽤나 영국사립학교스러운 귀족적인 차림새였고 그 탓인지 원비가 상대적으로 비싼 유치원이었다. 


아무튼 어김없이 그날도 원복에 눈부시게 하얀 스타킹을 신고 수업을 듣고 있었다. 내 기억으론 시계를 읽는 방법을 선생님께서 가르쳐주고 계셨던 것 같다. 열심히 25분과 35분을 구분하고 있는데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졌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가면 갈수록 간식으로 먹었던 음료수 탓인지 점점 소변감은 심해져갔다. 그러나 수업 시간은 한참 남아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오줌이 더 마려워지는 것이 아닌가. 급한 마음에 말은 못하고 다급한 눈길로 선생님을 쳐다보았지만 십수명의 원생들의 번잡함 속에서 그런 눈길을 알아차릴 정도로 선생님이 만능은 아니셨다. 당연히 선생님은 내 상황을 모르셨고 다리를 꼬아가며 버티던 나는 그만 모든 긴장을 풀어버리고 말았다. 


순백의 하얀 스타킹이 연노랑 무언가가 퍼지며 뜨뜻해지는 것이 느껴지자 나는 수치심과 당황스러움, 그리고 누군가가 도와주길 바라는 마음에 으앙하고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그제서야 내 상황을 눈치채신 선생님께서 어이구하시며 나를 교무실로 데려가신 후 엄마를 부르셨다. 스타킹과 팬티를 벗고 하체가 훤히 드러난 채 멍하니 있었다. 내가 그런 실수를 한 것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왠지 피곤하고 졸리기도 한 마음이 들었다. 


15분 정도 기다리자 뭐가 그리 웃기신지 엄마가 히죽거리시며 들어오셨다. 한손에는 왠 쇼핑백을 들고오셨는데 아마도 내가 갈아입을 옷이 들어있었으리라. 선생님과 엄마는 웃으시며 무언가 종알종알 이야기하셨다. 내가 들은 이야기 중 하나는 “00이가 왠일로...”였다. 어른들 입장에서도 나는 배변 실수를 하지 않는 아이였나 보다. 


허나 짐작컨대 그 날 일로 어른들은 내 배변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셨을 것이고, 조금은 대비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후 나에게는 두 가지 변화가 생겼다. 하나는 소변 실수하는 아이들을 더 이상 얕보거나 비웃지 않았고, 또 하나는 무슨 일이 있을 때 마다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는 습관이 생겼다는 것이다. 특히 두 번째 습관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져 나는 왠만하면 휴게소든 어디든 화장실 갈 기회가 있으면 가놓곤 한다. 작은 일로 평생의 습관이 만들어진다니, 지금도 피식거리며 가족들과 나누는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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