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2
중학교 2학년이 거의 다 지나갔을 때쯤 겨울날 햇빛은 맑았고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넷플릭스 계정을 쥐어준 채 교실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박보영을 좋아하던 친구는 평소 쿨한 성격과는 다르게 공포영화를 무서워했다(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친구는 아예 의자를 반대로 돌려 문제지를 푸는 나를 바라봤다. 가끔 무서운(?)장면이 나올 때마다 내가 브리핑을 해주곤 했다. 그 친구는 매사에 당당한 성격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무서웠는지 참 의아스러웠고웃겼다. 누구나 귀여운 구석은 하나쯤 있는 것이었가. 그 때를 생각하면 나와 친구들이 얼마나 어렸는지 그리고 얼마나 착하고 순박했는지 그 깊이감이 몸소 느껴진다.
한국은 영화와 정말 친한 국가이다. 이는 통계로도 증명되었고 나 또한 비디오와 디비디로 대표되는 저장매체의 흐름의 끝자락에 걸쳐있던 세대인 만큼 한국인과 영화의 관계를 더 잘 알고 있다. 비디오 헤드클리너를 넣고 디비디 자막 설정을 하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하다. 05년생이라는 내 출생일자에 대해 그것이 MZ세대로서의 어떠한 부끄러움이라고도 생각해 보았고 나 자신이 인구 절벽과 혐오의 시대에 태어난 불운아라고도 여겼었으나, 내가 소위 ‘비디오 키드’의 마지막 후예라는 사실만큼은 매우 자랑스럽고 다행이라 여긴다. 그것은 내가 특별하다는 유일한 증거이다.
한국이 영화 소비를 그렇게 많이 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겠고 밝혀진 바가 많을텐데 나는 내 나름대로(혹은 ㅈ대로)추정해보고 싶다. 우선 자막이 가장 큰 공헌을 하지 않았을까 한다. 한국어만큼 자막을 제작하기에 유리한 언어가 없다. 한자어를 많이써서 조어력도 좋고, 따라서 자막의 길이도 줄고, 또 우리말은 의역도 참 쉽다. 또 어둠의 경로도 발달하면서(인터넷 하면 대한민국 아닌가?)직접 자막을 만들어서 인터넷에 올리고 또 그걸 받아서 파일에다가 입히는 행위는 영화를 사랑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난 아직도 더빙 영화를 잘 못 본다. 자막이 되려 더욱 편하다.
또 극장 표값도 저렴했고. 옛날엔 극장이 최고의 데이트 코스였다는 증언을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적은 돈으로 시간도 잘 때우고 좋은 영화 한 편으로 낭만까지 잡는! 지금이야 극장 가서 영화 한 편 때리는 게 웬 사치가 다 되어버렸지만. 저번에 어머니와 <한산>을 보러 갔었는데 표값으로 성인 둘에 3만원이나 나온 것을 보고(어머니께 팝콘 사자는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이 땅에서 영화가 일구어 낸 마법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마음이 아팠다.
당신은 비디오 디비디를 대여해본 적 있는가. <너무 많이 본 사나이>라는 2000년 우리나라 독립영화에는 그 당시 성행했던 비디오 대여소 문화가 극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인기 절정 타이타닉이 몇십 깍데기씩 꼳혀 있고, 무협 액션 로맨스 성인 등등 카테고리별로 질서정연하게 나열된 비디오들… 나는 그런 촉촉한 영화매체의 질감에서 애수를 느낀다.
지금이야 오티티나 디지털로 영상을 손쉽게 보지만 그땐 정말 그렇게 실물 매체를 빌리는 것 이외에는 영화를 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인터넷에 익숙치 않았던 어렸던 날의 나도 엄마 손을 잡고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해리포터 디비디를 빌리곤 했었다. 그땐 해리포터가 정말 유행이었어서 그 대여점 이름도 해리포터였다. 내가 문득 젊어져 가고 있다는 자각을 한 순간 그 비디오 대여점은 자취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젠 세계 어디에서도 그렇게 상업적으로 디비디나 비디오를 대여할 순 없을 것이다.
가끔 부모님 혹은 할아버지와 대화하다 보면 그들이 꽤 권위있고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들을 그 당시 직접 관람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굴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술을 감상한다는 명목으로 보지만 그들은 우리가 갓 개봉한 존윅을 보러 가는 것처럼 그런 고전들을 아무런 선입견 없이 순수하게 극장에서 보았던 것이다. 가끔 내 친구들은 아무도 모르는 옛날 배우나 영화를 부모님이 “아 그거~” 하면서 그 당시의 분위기를 내비쳐주는 것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삶의 순간이다. 난 정말 7080에 태어나서 비디오 키드로 살았어야만 했다. 난 너무 늦게 태어났다.
뭐 이것도 이젠 다 옛날 이야기다. 내가 노인이 되면 이런 이야기들을 마치 전래동화처럼 손주들에게 들려주고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게 영화 감상과 비디오 문화가 발달했던 우리나라에선 당연히 저 위의 영화 같은 싸구려 영화도 기관총이 난사되듯 후두둑 영화시장으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깜짝 놀라게 되는 건 한창 우리나라 영화가 많이 만들어졌던 80~00년대엔 정말 싸구려 같고 질 떨어지는 영화들이 수두룩 빽빽했고 되려 그것이 상업적으로 히트까지 쳤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난 그것이 대중의 무지라는 둥의 젠체를 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순수했다. 영화를 평가나 미학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영화를 보며 즐겁고 좋은 시간을 보냈으면 된 거였다. 그들은 왕가위나 타란티노 같은 세련된 고전들과 싸구려 한국 조폭 코미디 영화를 차별하지 않았다. 요즘 영화 평가 사이트엔 영화에 대해 단 한 치의 진심도 없는 허세쟁이들만이 즐비하다.
한국 영화의 몰락은 영화 산업의 문제 그 자체이기도 하다만 이같은 관객의 태도에도 일견 문제가 있다. 우리 모두 영화를 좀 유하게 봐야 하지 않을까? 이해도 못 하는 영화 머리 꽁꽁 싸매고 힘들어하며 보다 자기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말 몇자 찍 적고 별점 붙이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오로지 영화를 즐기고 그에 참여했던 90, 00년대의 비디오 키드들 처럼 우리도 다시 순수를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본 박보영 영화는 정말 별로였다. 너무 못 만들어서 이게 공포가 아니라 코미디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했다. 배우의 숙명은 참 가혹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방학 전까지 몇 편의 싸구려 영화들을 켰다 껐다 하며 시간을 보냈고 난 아주 길었던 중학교에서 졸업식 날 같이 밥을 먹을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슬프게 깨달으며 집으로 오는 버스를 탔다.
그 때 나랑 비슷한 처지의 같은 반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도 말은 안 했지만 나와 정말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 친구는 “원래 찐친은 고등학교 때 친구랬어”라는 농담을 던졌다. 그게 그렇게 기억에 남는다. 친구의 말투가 너무 씩씩했어서…
나는 고등학교 때도 친구를 많이는 못 사귀었다. 난 사람들이 언제나 바보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 마음도 못 알아주고… 그러다 재작년인 열여덟에 우연히 영화와 재회했고 동네 도서관의 영상자료실은 내 쉼터가 되었다. 디비디를 집어넣는 순간은 경건한 의례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그곳에서 나는 귀중한 영화를 많이 만났고 내 어렸을 적의 비디오 키드를 다시 찾아냈다. 공상가의 운명은 비참하다는 걸 알지만 난 상관 없을 것 같다. 언제나 젊고 어린 비디오 키드로 살고 싶다. 테이프 안에서 뱀파이어처럼 영원히 죽지 않고 싶다. 그리고 영화 속 배우들은 내 소망대로 결코 늙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도 그들은 그대로 그 안에 있다. 영화는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