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긴 리뷰들 쓰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려서 최근 본 작품들의 짧은 평을 조금 모아서 정리했습니다^^ 다 12월에 감상한 작품들입니다.
베를린 필하모닉 그리고 지휘자를 소재로 삼은 영화답게 흡사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 같은 쇼트가 한 장 한 장 덧입혀진다. 길고 어떻게 보면 느슨하기까지 한 영화를 지탱하는 건 군데군데 새어나오는 차가운 대화들과 케이트 블란쳇의 지배적인 연기이다. 21세기 예술계에 대한 다양한 코멘트들을 남기는 영화인데, SNS를 위시한 캔슬 컬쳐에 대한 논의부터, 예술가의 독재, 부풀려진 자아 등 꽤 쏠쏠하게 씹어볼 텍스트들이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다.
우리가 미디어 속에서 보고 있는 타르는 과연 진정한 타르인가? 수정되고 편집된 자아. '린다' 에서 '리디아'로 이름까지 바꾸고 눅눅한 나무집을 탈출한 타르를 우리는 알고 있는가. 우리는 누구를 공격하고 있는가. 타르의 악함을 공격하고 있는가 아니면 대중을 위해 '악해져야만 하는' 타르를 공격하고 있는가. 빗발치는 대중의 무지와 오해에도 꿋꿋히 오케스트라를 독재하던 타르는 달라진 룰에 적응하지 못하고 저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압권은 엔딩 씬인데 여러분이 클래식 아티스트들이 다른 음악(소위 말하는 '대중음악')에 대해 가진 시선을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여러분 역시 그 씬의 엄청난 낙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SF 게임 페스티벌의 공연을 맡게 된 타르는 이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수렁으로 빠져버린다. 그러나 마지막에 들려오는 괴상하고 신비로운 나레이터의 음성으로, 어쩌면 타르가 재기할 수도 있겠다는 묘한 실마리를 풀어놓는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흥미로웠지만 초반 1시간 반 정도가 매우 루즈하고 불친절하다. 조금만 더 템포를 땡겼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독특한 촬영 방식은 마음에 들었다. 특히 바흐의 평균율에 대해 학생과 논쟁하는 긴 롱테이크가 인상적이었다.
영화는 몰입감 있고 아름다웠다. 빅 크런치를 이겨내고 푸른 하늘 아래 달려가는 두 소년의 이미지는 충분히 매혹적이다. 허나 내가 이런 류의 영화를 보고 항상 드는 마음은 세간의 평가보다는 이 영화가 엄청나게 깊이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괴물>은 갈등 상황을 만들고 그 상황을 여러 인물의 입장에서 다시금 서술해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흡사 법정 드라마 처럼)이는 일반적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드라마와는 사뭇 다른 형식이라서 신선했다. 인물들 마다의 입장 차이가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서사적인 쾌감과 뭉클한 감동이 몰려온다.
그런데 그게 전부다. 이 영화는 엔딩 빼곤 영상미가 훌륭하다거나 인상적인 쇼트나 구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가 너무 직선적이어서, 모든 씬이 톱니바퀴처럼 맞춰질 때 탁월하다고 느껴지지, 개별적인 한 장면에는 탁월성이 부족하다. <걸어도 걸어도>가 매 쇼트 쇼트마다 정물같이 계산적으로 배치된 인물구도를 보여주던 것에 비해 많이 아쉬웠다.
<괴물>은 다 보고 나서 후련하고 개운한 마음이 들지만 그게 전부인 영화였다. 딱히 살아가며 어떤 장면이 머릿속에서 문득 떠오른다거나 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영화를 엄청나게는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 예술은 서사도 서사지만 이미지로도 승부해야하기 때문이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은 그것을 온갖 현란한 이미지로 그려내어도 과거를 지워내거나 수정할 순 없다. 이야기 쓰기는 결코 현실도피의 방법이 되지 못하는 건가? 가끔 넘 우울하고 짜증날 때마다 내 삶을 각본화시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줄까 공상하곤 했는데, 이젠 그것이 별 의미 없을 거라는 회의감이 든다. 영화감독은 어머니를 없애버리는 그 장면을 결코 촬영할 수 없다.
중간에 필름 끊기기 전까지는 나름 재미있게 봤다. 특히 촬영이 매우 인상적이다. 오소레산의 무녀와 마주 보고 앉은 소년의 샷이 몹시 매혹적이다. 영화감독이 자신의 어린시절로 돌아가는 그 부분부터 갑자기 ㄹㅇ 노잼이 되어버린다. 전반부의 떡밥들이 다시 대거 출현하고 여러 짐작하기 힘든 이미지가 샤샤삭 펼쳐지는데 여기부터 따라가기가 심히 벅찼다. 이런 영화들은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클라이막스와 엔딩은 만족스러웠다. 특히 엔딩이 꽤나 인상적!
‘전원에 죽다’ 크… 제목 한 번 기깔나게 잘 지었다. 나는 이런 일본어 번역체로 된 문장 같은 거에 조금 집착하는 게 있다. 학술어나 해외 예술작품 제목 같은 걸 찾다 보면 왜인지 모르게 오묘하면서 이상한 기분 드는 게 많은데, 일본어로 번역된 걸 다시 중역했기 때문이다. 어른들 중 이런 일본식 번역을 다시 바로잡아야 한다는 분들이 종종 있었다. 뭐 나도 동감하긴 한다. 그래도 ‘전원에 죽다’는 고치지 말았으면…
어려운 아방가르드 영화여서 기피하는 분이 많을 것 같은데 그래도 일반적인 극영화의 뼈대는 남아있고 영상과 촬영도 황홀해서 취향만 맞으면 재미있게 볼 수 있으니 나름 추천한다. 이 영화가 의외로 영상미가 정말 대단해서 보면서 깜짝 놀랐다. 음악도 개추
그리고 일본 고전들의 친숙한 클리셰가 즐비해서 서사도 꽤 익숙할 지 모른다. 남녀의 야반도주 / 동반자살, 여성들에 대해 도착적인 소년, 끊임없이 남성성을 시험하는 여성들 / 문란한 서커스단 / 아이를 떠나보내는 과부 / 어린 시절을 혐오하는 작가 / 부모에 대한 증오 와 이렇게 써놓고 보니 진짜 소재들 자체는 엄청 익숙하다. 이런 뻔할 수도 있는 소재를 창의적으로 연출해 낸 감독께 경의를 표하고 싶다. 나중에 다시 봐야지...
어린 여자와 늙은 남자는 정말 식지 않는 떡밥이다. 대부분 이런 류의 영화는 비판을 받고 나 또한 몇몇 영화라고 부르기도 좀 그런 영상물들 엄지를 내리고 싶지만 가끔 보석같은 영화도 물론 있다. 대표적으로는 우디 앨런의 <맨하탄> 정도가 떠오른다.
<맨하탄>은 17살 소녀와 42살 뉴요커의 연애를 다룬 작품인데 지금 봐도 굉장히 세련된 영상과 스토리를 자랑한다. 트레이시는 아이작에게 끊임없이 매달고 조르고 그런 트레이시를 아이작은 이끌어준다. 그러나 마지막 엔딩에선 트레이시가 아이작에게 "사람에게 믿음을 좀 가져요"라고 말하는 데 이것은 기존의 수동적인 남녀관계를 한 번에 뒤집어 버리는 굉장히 전복적인 대사이다.
이런 파격적이고 세련된 스토리텔링을 보여준 <맨하탄>과 달리 마찬가지의 늙은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이 자기만족물은 꽤나 실망스럽다. <붉은 돼지>의 향수와 감성은 나에겐 정말 다가오지 않았다. 이 때의 일본 사람들은 전쟁의 경험을 마치 어떤 낭만적인 추억같이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딱히 와닿진 않았다. 그리고 은근히 계속 10대 소녀와 나이 든 아재들을 엮는데 딱히 납득되지도 않고 걍 옛날티만 팍팍 난다.
종합해 보았을 때 지브리의 단점이 고스란히 묻어져나오는 아쉬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못생기고 늙은 남성들은 이런 판타지 그만 찾고 자기관리가 급선무인 것 같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틴에이져 호러물의 클리셰를 영리하게 잘 활용한 이 영화는 최근 개봉한 인디 소품들에서 가장 탁월한 작품들 중 하나라고 칭하고 싶다. 이 영화는 소품이란 딱지를 벗겨 보아도 꽤 여러 방면에서 괜찮은 팔색조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바디스 바디스 바디스' 라는 술 게임은 영화 속 대저택에서 실제의 살인으로 연결된다. 이런 예측 가능한 전개도 내게는 은근히 고전적으로 다가와서(이젠 슬래셔 호러의 뿌리가 매우 단단해졌음을 실감할 수 있는 점이기도 하다)꽤나 설렘을 갖고 서사에 몰입할 수 있었다. 손전등과 야광봉을 두르고 광기의 게임을 진행하는 십대들과 번쩍번쩍한 형광 조명은 약에 취한 듯 황홀하다.
영화는 물론 작품의 의도인 MZ 세대에 대한 비판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문제의 해결을 논의하다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라는 삼천포로 빠지는 대사처리가 매우 리얼할 뿐더러, 각 주인공들의 허영심과 열등감이 함유된 발작 트리거의 재현들도 매우 정확하게 현대 사회의 청춘들의 어떤 지점들을 짚어낸다. 불신과 근거없는 혐오가 독처럼 퍼지는 순간들은 존 카펜터의 <괴물>과도 흡사하다.
모두가 예상 가능했고 허무한 결말과 스토리라인이 진부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 역시 소재보단 활용에 조금 더 초점을 두고 즐겨야 하는 영화이다. 또한 중간중간 무지성으로 터져 나오는 분노와 다툼이 어떤 트리거에서 발화되었는지 집중해서 따라가 본다면 이 영화의 재치있는 각본을 무한으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매~~우 추천하는 작품.
나는 코미디라는 장르가 꽤 어렵고 도전적인 장르라고 생각한다. 재치있는 대사를 써내는 것은 정말 뼈저리게 어렵지만 코미디는 대사만 가지고는 해결되지 않는 난제이기 때문이다. 대사와 인물, 그리고 사건과 배경이 정확하게 맞물려야 그 시너지가 제대로 발휘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스트레스...>는 가장 정석적이고 유쾌한 게임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너무 싫은 직장상사를 죽이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웃기지만 여기에서 세 주인공의 성격과 그들의 상사의 조합이 너무나 완벽하다. 사이코 / 색광녀 / 낙하산이라는 꼴 보기도 싫은 삼종 트리오 보스들은 이 영화의 주된 동력원이다.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 시퀀스들 사이사이로 '마더퍼커 존스' 같은 나사빠진 조연들과 인물들의 맛깔난 대사까지 완벽한 비율로 어우러지며 너무나 만족스러운 코미디를 선사한다.
그렇게 힘들게 보스들을 처리했지만 그들은 다시 또 다른 보스 밑에서 일을 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결국 누군가의 아래에서 일을 해야만 하며 아무리 올라간들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씁쓸한 메세지까지 남겨준다니, 난 이래서 코미디가 좋다. 최근 기분이 좀 꿀꿀했는데 이 영화 한 편으로 극적인 치유를 받았다.
'심리극' 하면 떠오르는 가장 전형적인 스테레오타입은 로만 폴란스키의 초기 영화들일 것이다. <혐오>는 폴란스키식 심리극의 가장 전형적인 작품으로 그 시절 폴란스키의 놀라운 연출력을 보여준다.
사람이 점점 미쳐가는 이야기는 결국 그 과정을 어떻게 서술해야 할 것이냐의 문제인데 폴란스키는 이를 청각적인 요소로 넘겼다. 캐롤이 언니가 떠난 아파트에 홀로 남아 있는 시퀀스들에서는 끊임없이 일상의 소음들이 신경질적으로 들려온다. 더 이상 소음들을 참을 수 없을 때 쯤 그녀는 성폭행을 당하는 꿈을 꾸고 남성들을 살해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인을 혐오하고픈 때가 있다. 영화는 섬세한 대사들을 통해 캐롤에게 상처로 다가오는 여러 상황들을 제시하고 계속해서 침몰해 가는 캐롤의 심리상태를 다양한 소재들로 보여준다(벽과 바닥에 간 금 / 점점 썩는 토끼 요리). 그리고 혐오의 이중성. 캐롤은 남성들을 무조건적으로 혐오하지만 사실 어떤 은근한 욕구를 갖고 있다. 집주인이 돈을 받으러 오자 캐롤은 슬쩍 원피스를 다리 위로 올리고 그가 덮치려 들자 면도칼로 집주인을 살해한다. 이런 부조리한 묘사는 직선적이고 뻔한 광인서사와는 차별되는 독특한 이 작품의 특징이다.
마지막에 옆집 이웃의 "그녀가 영어를 하는 줄 몰랐는데!" 라는 대사는 그녀와 주변 인물들이 얼마나 단절되어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지금 봐도 굉장히 재미있는 영화이며 폴란스키 특유의 탁월한 촬영을 군데군데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젊은 시절 카트린 드뇌브가 다시 봐도 너무 예쁘다. 배우 보는 맛까지 있는 이 영화 크라이테리언 컬렉션을 사지 않을 이유가 없다!!!
Cul-de-sac, 막다른 골목 혹은 궁지는 내가 오랜만에 본 걸작이다. 폴란스키 하면 위의 <혐오>와 같은 스타일리쉬한 연출위주 작품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의 진가는 부조리 코미디와 파워 게임이 합쳐진 뒤틀린 미니멀리즘 영화이다. <물 속의 칼>과 함께 폴란스키의 정수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밀물이 차오르는 고립된 성 안에 사는 소심남 조지와 아름다운 아내 테레사.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총을 든 무뢰배가 끼어든다. 전화선을 자르고 닭장을 부숴버리는 아이러니의 끝 그리고 연속된 부르주아의 방문은 조지를 말 그대로 궁지에 몰고 간다. 영화가 택한 소재들이 정말 너무나 탁월해서 감격했다. 이런 부조리극 특유의 느슨한 분위기를 이끌면서도 중간중간 피식 웃음이 나오는 코미디와 복선, 여러 모순들을 부드럽게 훑는 게 어찌나 대단하던지 모르겠다.
촬영 또한 대단히 인상적인데 좁은 성 안에서 인물들을 더욱 좁게 배치하니(문 틀 같은 곳에 서 있는 것으로)불안불안한 분위기가 영화 전반에 깔린다. 또한 인물들이 서 있는 자세와 배치된 구도들이 너무나 정갈해서 힘을 안 준 것 같으면서도 짝짝 달라붙는 영상이 만들어졌다. 이런 연출은 정말 영화 교과서에 실려야 할 수준이고 오래오래 회자되어야하지 않나 싶다.
시간이 지나면 조수가 밀려오고 조지는 저주받은 것 같은 작가의 성에 갇혀버린다. 다양한 연극, 문학적 요소들을 학습해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해낸 폴란스키는 정말 대단하다. 역시 심플 이즈 베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