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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May 19. 2024

이제 그만 돌아와 줘요

[내 마음의 영화] 아멜리에


'01 장-피에르 죄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녀가 '오늘의 메뉴'를 적는 내 최애 장면


 때로는 영화는 지극히 개인적인 의미만을 지닌다. 한 작품에 대한 영롱한 동경에는 내 마음이 객관적으로도 합리적이라는 것을 보증해주는 평단의 호평이나 내가 어떠한 사상적 혹은 오락적 보편성의 대열에 합류했음을 느낄 수 있는 박스오피스 수익마저 유치한 사상검증의 수단으로서 무력해진다. 이역만리 먼 땅의 다른 눈 다른 피부 다른 언어의 창작자가 나와 조금이나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살고 있었다는 다소 감상적인 일체감과 감격을 작품을 매개로 선사받는 것. 그것이 내가 주장하는 '개인적인 의미' 로서의 영화이고 주체적인 영화 감상의 유일한 방법론이며, 사실 모든 영화보기는 이래야만 한다는 당위성까지도 지닌다고 생각한다. 유수의 (영화에 대해서 진심인) 시네필들이 아무리 현학적인 워딩으로 활자 속에서 도망을 쳐 봤자 나는 그것이 영화에 대한 "나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요" 라는 일방적이고도 유치한 고백이라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점점 확신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영화를 사유의 담론장이 아닌 그저 기본적인 욕구와 결핍을 채워주는 소모품으로서 여기는 나의 노동자적인(?) 마인드를 당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영화는 그 이상 그 이하의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의견이다. 그저 과시 그리고 상식과 교양을 위한 영화보기는 영화에 대한 무지이자 죄악이라고 생각된다. 영화를 보며 당신은 무척이나 즐거워야한다. 갑자기 라스 폰 트리에와 그 친구들처럼 청중에게 붉은 전단지

를 살포하며 청교도적 계율을 강요하고픈 충동마저 든다. 물론 그러한 일방적 주입은 예술에 대한 또 다른 모독이 될 뿐이겠지.


 <마스터>의 마스터가 프레디를 자신의 종교적 치료의 예시에 대해 완벽한 물증으로 삼았듯이 <아멜리에>는 나의 영화보기 공식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는 운명 같던 영화였다. 2022년 5월의 첫 날에 지갑보다도 더 좁은 화면의 아이폰 12 미니로 관람했었다. 어떤 영화는 스크린과 충만한 음향으로 시청해도 별 감흥이 오지 않는 반면에 좁디좁은 창으로 블루라이트를 받으며 엿보아도 마음을 몇 차례흔들고도 남는 영화가 있다. 내겐 <아멜리에>가 그랬다.


 처음 본 날의 두근거림이 아직도 내 머릿속을 타고 울린다. “와, 세상에… 이런 영화가 있을 수 있구나.“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국어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동화적인 인물들의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통통 튀는 불어가 무척 매혹적이었다. 파리의 푸른빛 지하보도를 거닐어 보고 싶었다. 가끔 유럽에서 아시안 인종차별에 대한 뉴스가 들려오듯이 나 는 유러피안들에 대해 엄청나게 긍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로 나는 그것에 그들의 문화에 대한 동경과 질투로서의 대한 또 다른 반발적 혐오가 아닌지 의심했다. 난 언제나 근대와 현대가 아리땁게 마주앉은 유럽의 문화양식을 흠모해왔던 것 같았다.물론 이것은 외국에 한 번도 나가보지 않은 한낱 '토종 코리안'으로서의 어리석은 사대주의와 판타지에 지나지 않겠지만, 누구든지 그런 어리석고 촌스런 판타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채워주는 지극히 개인적인 예술이 있어줄 것이다.


 <아멜리에>는 이처럼 우리가 '프랑스'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귀엽고 낭만적인 선입견에 충실히 응한다. 오히려 떠오르는 이민자 문제를 지적한 <증오>가 더 프랑스답다면 프랑스다울 것이지, <아멜리에> 속 만화같은 세상은 귀엽고 엉뚱한 상상력과 이미지로 도배되었다. 그렇기에 줄거리 상 단 한 번도 초현실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지만 감독의 독특한 연출과 더불어 이 아리따운 극은 매우 어떠한 판타지처럼 느껴지고 간드러진다. 목적과 주제를 잃은 잡설이 더욱 더 길어지기 전에 어서 이 사랑스러운 걸작에 대한 내 마음을 고해하고 싶다.




로맨스의 필요충분조건



 

 

 우선 <아멜리에>의 로맨티시즘을 이야기하고 싶다. 짐 자무쉬의 <Only lovers left alive>. 이 작품의 부제로 딱이다.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영화 전개의 중심축이 되는 아멜리와 니노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아버린 뱀파이어 커플과도 같다. <아멜리에>의 로맨스의 작동 방식을 너무나 잘 이해시켜주는 단적인 예로 니노가 풍차 카페에서 아멜리를 기다리는 장면이 있다. 니노는 늦게 도착해 기다리다가 앞으로 들어오는 한 미인을 보고 설레하지만 그녀는 아멜리가 아니었다. 여기서 그 여인의 스타일링은 등장인물들의 톤과는 툭 떨어져서 매우 몸매가 강조되고 세련된 모습이다. 아멜리와 니노는 정확한 날짜가 제시되지 않으면 언제 즈음의 사람인지도 모를 정도의 독특하고 아리송한 인물들이고 그 사이로 지나가는 21세기 현대 미녀는 두 공상가 커플이 현실세계로부터 얼만큼 유리되었는지(마치 뱀파이어나 그런 종류의 존재들처럼!) 그 거리를 체감하게 한다.


 우리가 영화 속 로맨스 요소를 보고 '로맨틱하다' 라고 느끼는 것은 그 사랑의 필연성과 유일성 그리고 우선적으로 그들의 비쥬얼에 기인한다. 영화 속 아멜리와 니노는 아웃사이더임에도 너무나 잘생기고 예쁘다(특히 영화를 보고 오드리 토투에게 반하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감정을 이입하는 관객 입장에선 등장인물과 '소외자' 라는 고리로 연결되지만, 관객들과는 다르게 배우들은 상당히 훌륭한 외모를 지니기에 관객들은 외로워하는 아멜리와 니노의 모습이 조금은 나의 모습과 닮아있지 않을까라는 동질감과 최면적 황홀감에 빠진다.


 다시 말해, 아웃사이더인 우리들이 사실 작품 속 그들처럼 아리땁고 매력적이지 않을까하는 비쥬얼적 일체에 빠지는 것이다. 연애영화에서 배우의 외모를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사람들을 보고 단순히 만족하는 데서 끝내는 게 아니라 예쁜이 멋쟁이들과 우리가 어느 정도는 닮아 있지 않을까하는(상황적으로든 외형적으로든)묘한 환상과 착각에 있다. 멜로야말로 가장 판타지적인 장르가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들의 애정은 어떠한 필연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둘에 대해서, 사랑의 서사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과 결핍 등으로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음' 이 강조되며 관객은 이 과정에서 로맨틱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찌보면 꽤 비루하고 슬픈 일일수도 있겠지만 <아멜리에>의 사례에선 정반대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그들은 사랑에 빠질 운명이었다. 그리고 사랑에 빠져야만 했다. 세상에 유일하게 남겨진 귀여운 몽상가 둘의 사랑은세상이 나에게 투척하는 남성적 책무가 어깨를 짓눌러 쓰러지기 직전마다 날 구출해준다. 어쩌면 이 영화를 보는 것이 내겐 어떤 말랑말랑한 의료행위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멜리에>를 그래도 로맨스 영화로 인식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본 나는 이 영화가 나에게 왜 이렇게 달콤하게 다가왔는지 분석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구 반대편에서 내 짝을 만날 확률보다도 더 적은 가능성의, 하지만 꼭 실현되어야만 한다는 필연성의, 그리고 예쁜 배우의 비주얼의 3단 콤보로 구성된 하트 어택이라는 점을 꼭 강조하고 싶었다. 매일같이 내 안에 갇혀 사는 나는 이 싱그러운 로맨스에 동참하고 싶지 않을 수 없었다.


푸른 빛깔의 지하보도에 사랑의 노래가 울려퍼지고 맹인에게 동전을 건네면 그녀 앞엔 그녀와 똑 닮은 남자가 스티커 사진을 모으고 있다.




현실과 예술의 경계


 

 <아멜리에>는 영화에 대한, 정확히 말하면 예술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아멜리의 건너편에 노쇠한 은둔 화가가 산다는 설정이 단지 대본의 길이를 늘리기 위한 테크닉만은 아닐 것이다.


 예민하고 조금이라도 날카로운 것에 닿으면 상처를 입는 '유리 인간' 화가는 수십 년째 해마다 르누아르의 그림을 모작하고 있다. 긴 세월 간 이어진 끊임없는 모방에서도 작가는 어딘가를 쳐다보며 술을 머금는 여자의 표정을 쉽게 그려내지 못한다. 아멜리는 그의 모작에 참여하며 화가와 그림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다. 아멜리는 이 과정에서 여인의 감정을 추측하고 화가는 그에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려나간다. 둘은 영상 콜라주 같은 비디오를 교환하며 서로의 의미구성을 공유한다.


 남들에게 선행과 기쁨을 향수처럼 뿌려주고는 돌연 쉭 숨어버리는 소극적인 아멜리가 유일하게 극 속에서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바로 이 모작에 대한 의미교환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나 또한 어떤 형태에 공상가이기에 마음이 저렸다. 평범한 사람들은 예술을 찾지 않는다. 삶의 결핍을 도저히 채울 수 없고, 아이러니에 수긍할 수 없는 이들만이 상상력과 즐거움의 세계로 도피한다. 내세울 것 없이 소심한 인간들이 유일하게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적극적인 행위자로서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바로 예술의 장이다. 그곳에선 누구나 가면을 쓰고 필름 느와르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돈을 들고 튈 수 있게 되며, 웨스턴의 무법자가 될 수 있다.


 여인의 속마음을 추측해 보라는 화가의 말에 아멜리는 니노에게 다가갈 수 없는 자신의 초라한 마음을 고백해본다. 필름과 활자는 임금님 귀가 어떻게 생겼는지 누구나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는 일종의 대나무 숲이다. 둘은 작가와 독자의 관계로 예술의 내용을 논의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나이 많은 영감과 어린 아가씨의 관계로서 일종의 연애 상담을 진행 중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멜리는 생(生)의 정답지를 들추어보게 되고 점차 용기를 내기로 시작한다. 이렇듯 필름 속 혹은 캔버스 건너편은 그 무엇보다도 왜곡되고 판타지적이지만 때로는 우리 삶에 있어 수학적인 대칭 관계의 해답을 제시해 준다는 것에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술에 대한 환상이 걷혀가고 끊임없는 도파민을 채굴하는 파괴적인 이 지금에서 <아멜리에>는 은은하고 부드러운 커피 한 잔처럼 예술의 올바른 복용법을 제안한다.



 용기를 내야지. 화가가 보내준 최후의 비디오엔 더 이상의 자료화면과 고전영화, 예술에 대한 담론도 없다. 늙은 얼굴로 렌즈를 바라보는 화가의 피부만이 존재할 뿐이다. 위의 장면은 굉장히 신파적이면서도 경건한 느낌까지 드는 듯하다. 돌아가서 그를 잡으라는 최후의 조언에 아멜리는 즉시 집 밖으로 뛰쳐나간다.


 아멜리가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니노가 서 있는 것은 굉장히 상징적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미장센과 세트에 공을 들인 부분은 아멜리의 집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빨간 색의 벽지와 가구 그리고 은은한 노란빛의 조명과 캔들로 수놓은 세트는 몹시 미려해서 손으로 만져보고픈 충동마저 일었다. 내가 아멜리라면 절대 집 밖에 나가지 않을 것 같았다.


 바로 그것이다. 필름메이커들은 영화쟁이들을 집 안 혹은 극장 안에 가두어 버린다.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영화로 삶의 슴슴한 단면만을 쓱쓱 까먹는 예술 애호가들은 더 이상 집 밖에 나갈 용기를 낼 수 없다. 그저 눈물을 흘리며 자두 케이크를 구울 수 밖엔 없는 것이다. <아멜리에>는 이제 그만 돌아오라고 한다. 그림에서, 소설에서, 그리고 영화에서... 더 이상의 도피는 예술을 남용하는 것이라 일침한다. 하필이면 이러한 일침이 클라이맥스에 삽입되어, 조금 신파적이고 다급하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은 하고자 했던 메세지 자체를 강조하는 기능으로서는 나름 성공적이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텔레비전 아래는 마치 종교 의식을 행하는 듯 촛불들이 켜져있고 아멜리는 충만한 눈망울로 화가의 음성을 내려받는다.


 마음이 철렁했다. 영화쟁이들이여, 시네필들이여, 이제 그만 돌아와 주오. 삶이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눈물겨웠다. 개인적으로도 비겁하게 회피해야만 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내 삶을 일종에 소설 그리고 영화와 같은 것으로서 생각했다. 언젠간 플롯 트위스트가 있겠지. 반전이 있겠지. 그러나 돌아와야만 한다. 한 편의 현실에 참여를 해야만 한다. 굳게 마음을 먹고 문을 열었지만 오히려 한 발짝도 나갈 필요 없이 니노는 기다려주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문을 열고 도대체 몇 발자국이나 걸어야 하느냐는 부담감과 무력감이 아니라, 문을 여는 행위 자체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하는 용기와 공포감에 문제이다. 당신이 빨간 문고리를 돌리기만 해도 삶은 상시 대기 중이라는 것을 <아멜리에>는 로맨틱 코미디와 동화적 스토리텔링을 빌려 역설한다. 꽤 메타 시네마적이다. 그리고 감동적이다.




캐릭터는 늙지 않는다




  감독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배우는 죽어서 인물을 남긴다. 이 영화가 오드리 토투만을 위한 것임을 부인할 관객은 아무도 없겠다고 단언한다. 그녀는 76년생으로 이 영화 속에선 우리 나이로 스물여섯이었다. 그렇지만 아멜리는 영원히 필름 속에서 뱀파이어처럼 늙지 않고 살아간다. 이것을 '불멸' 이라는 멋진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박제' 라는 비극적인 뉘앙스로 언급해야 하는 것에 대해선 이견이 많겠지만 오드리 토투만큼은 전자에 해당하는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본디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에밀리 왓슨을 캐스팅하려다 실패하고 불어 각본을 새로이 쓴 죄네 감독은 "왜 그녀를 택했습니까?" 라는 질문에 "광각 렌즈에 담아낼 때 더욱 더 그리고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에" 라고 답했다(이것은 너무나 오래전에 읽은 매거진 기사여서 확실하지 않다). 탁월한 감독의 안목대로 그녀는 원래도 미인이지만 이 영화 속에서 특히나 더 아리따워 보였다. 동화적이고 발랄한 감수성의 인물성을 01년도의 오드리 토투만큼 잘 소화해 낼 수 있을만한 배우를 더 이상 찾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주네의 안목이 정말 탁월했는지 그녀는 이 영화에서 유독 더 달라 보인다.


 아멜리는 여기다가 자세히 적기도 민망할 정도의 소소한 취미거리들을 한 아름 안고 살아간다. 다이애나 비가 세상을 떠난 비극적인 날 우연히 한 남자의 유년 시절을 찾아주려 다짐하는 그녀는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수호천사 같은 존재다. 영화 중후반부 쯤 되면 슬슬 감독이 하고싶은 말 하고 극적인 사건 터뜨려 주고 할 만 한데 감독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싶으면 아멜리가 조약돌을 줍던지 또 누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계략을 꾸민다던지 등의 짧은 에피소드를 연결시킨다. <아멜리에>가 재미없고 아무 내용도 없다는 관객들의 심정은 이런 캐릭터 빌딩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뭐 흥미가 생기냐 안 생기냐의 문제라 길게 논쟁할 이유가 아예 없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어떠한 시의 후렴처럼 지속적인 운율로 반복되는 그녀의 조약돌 수집과 행복 전도의 이벤트들이 너무나 황홀하고 즐거웠다. 아멜리가 벌이는 지인들 그리고 삶과의 마인드 게임은 만화적인 연출과 리듬감으로 포장되어 한 입 깨물면 황홀히 퍼지는 초콜릿처럼 내 마음에 빠르고 그리고 정확하게 배송되었다. 이런 것은 내가 짐 자무쉬나 우디 알렌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짧고 단편적인 스케치를 엮어서 거대한 의미구성을 일구는 각본쓰기 방식을 나는 흠모한다. 이런 점에서 오드리 토투는 탁월한 캐스팅이었고 그녀는 이 영화에서 비로소 불멸성을 획득했다.



 평상시 영화와 거리가 먼 친구들이나 부모님과 대화를 하면 우린 모두 배우를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생각해 보면 내가 영화를 적극적으로 보기 전에는 어떤 영화에 대해 "아 최민식 나온 영화?" 처럼 누가 출연했느냐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 같다(사실 대부분의 정상인들이 당연히 그러겠지). 그렇기에 내가 지인들과의 대화에서 감독에 대해 논하는 것은 조금 freak 같은 행동이 아닐 수 없게 된다.


 이쯤까지 왔으면 모든 영화팬들은 다 감독 이름을 들먹인다. 사실 이것 또한 너무나 당연하다. 색채 구도 편집 연기지도 모든 것이 다 한 사람에게 편중된 영화예술의 특성상 영화를 음미할 때 카메라 건너편의 메가폰을 쥔 사나이 혹은 여인을 떠올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나를 포함해 모두가 또한 명망있는 이름들을 언급하며 텍스트를 발굴해 가지 않는가? 그러나 내가 이 글을 쓰면서도 다시금 너무 놀라는 건 죄네 감독에 대해 다른 감상문처럼 많이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멜리와 오드리 토투에 대해서만 거의 서술해온 것이다. 종국에 '아멜리' 라는 인물만이 내 머릿속에 남았을 때 비로소 내 영화보기 공식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나는 그것을 완결해 낼 수 있었다.


 <아멜리에>는 강렬한 영화가 아니라 스며드는 영화다. 두 시간 내내 나는 영화가 끝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아멜리를 스크린에서 계속 보고 싶었다. 조금만 더... 그리고 영원히. 단 한 순간에 사람을 매혹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그녀와 영화 전체에 사로잡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 너무나 즐겁고 황홀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스타일은 다름아닌 이런 것들이다. "첫 눈에 반했어요" 이런 말은 영화보기에 있어서 조금 더부룩하다. 어느새 홀려버린 듯 영화의 남은 러닝타임을 주기적으로 확인하는 무의식적인 행동을 깨닫게 될 때가 바로 영화와 사랑에 빠짐을 확언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죄네는 영화의 바톤을 자신이 더 이상 쥐고 있지 않고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아멜리는 우리 모두를 유혹했다.




뒷이야기

 

구도가 너무나 좋았다

 

더 무리수를 두기 전에 이쯤 해야겠다.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 영화의 놀라운 구도와 색채 감각이지만은 그건 영화를 본 우리 모두가 좋아요를 마구 눌러주고플 사안이기 때문에 말미에 영상미 좋은 장면 몇 개를 투척하는 것으로 대체하겠다.


 짧고 미숙한 졸문이지만 그래도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큼은 잘 전달된 것은 같아 기분이 후련하다. 내가 자주 쓰는 표현으로 말해보자면 나는 대한민국에서 <아멜리에>를 좋아하는 것으로는 10등 안에 들 자신이 있다. 세계적인 스케일론 뭐... 100위 안에는 들 것이다. <아멜리에>는 정말 인연 같았던 영화였다. 아무런 생각과 고민 없이 가볍게 택한 그날의 픽이었고 더웠지만 청량했던 그 날의 날씨마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영화만 보고있는 내 처지를 정당화 시켜주었다.


 열여덟의 추억과도 깊이 닿아있는 영화라 마음이 더 가는 것도 같다. 참 불확실하고 걱정도 많았지만 친구들이 담배피는 것을 구경하며 한담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위안이 되었던 촉촉한 날들이었다. 이 영화를 본 다음 날엔 바보같은 아이들과 학교 체험학습으로 놀이공원에 가게 되었는데 때양볕 아래 동물원을 <매그놀리아> 러닝타임만큼 걷고 있자니 짜증이 나서 모든 것을 부수고 싶었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전날에 이 영화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뚜벅뚜벅 돌아가는 회전목마와 놀이기구를 보고 니노가 아멜리를 쫓아가는 장면 같은 것들이 눈에 아른거렸었다.


  웬 그들의 여자친구들이 내 친구들을 다 뺏어가버려 짜증이 났을 때 난 그냥 속이 안 좋으니 당신네들 이거 탈 동안 화장실이나 한 번 갔다 오겠다고 했었다(물론 걍 같이 있기 싫어서 둘러댄 말이었다). 5시가 거의 안 되었을 무렵이었는데, 미지근한 플라스틱 생수통을 주무르면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지금쯤이면 아멜리가 니노를 위해 바닥에 화살표를 그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작렬 햇볕을 버틸 수 있었고 무사히 침대로 돌아와 영화를 한 번 다시 또 봤다. 다시 봐도 너무 황홀했다. 내가 영원히 추구할 영화적인 유토피아가 아닐까 한다.


 <아멜리에>는 현실이 너무나 두려워 판타지의 세계로 도망친 남녀들을 위한 숭고한 귀환 의식이며, 한 배우의 아이덴티티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탁월한 영상 런웨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세상에 유일하게 남아버린 예술가 커플을 위한 달콤한 로맨틱 코미디이다.


 


 당신도 살아가며 아멜리를 마주칠 수 있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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