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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May 24. 2024

이상한 하루

[내 마음의 영화 #2] / 엘리펀트

'03 구스 반 산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나의 개인적인 사담을 조금 늘어놓아야 한다.


 열네살의 어느 날들 그리고 중학교는 쌀쌀했다. 어머니는 여드름이 덕지덕지 난 그때의 나에 대해 "내 아들이지만 몹시 징그러웠다"며 한 마디 농담을 하셨었다. 더 이상 나의 룰대로 세상이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극히 오랜 시간이 걸렸고 깨우침은 한 순간에 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매우 더디게, 그것이 오고 있는지조차도 모를 정도로 아주 느린 시간에 걸쳐 내 안에 자리잡았다.


 "넌 이게 문제야. 너 내가 말하는데 계속 이렇게 살면 너 나중에 병신 돼" 내용이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배짱있는 짓을 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내가 내빼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이상한 웃음으로 상황을 넘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열네 살 먹은 아이가 어떻게 친구한테 그런 쓰라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중세/전근대의 잔혹 동화들에서 어린이들을 그냥 몸집 작은 어른으로 취급했던 것은 단순히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잔인했다. 무지에서 오는 사악함은 잔상이 오래 남는다.


 그 날 나의 인생은 규정당해 버렸고 나는 영원한 이방인이 되었다. 모든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고 모든 제안을 수락할 수도 없게 되었다. 나는 유리를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자신이 루저였다는 걸 깨닫는 것은 묘했다. 그건 아프기 보다는 꽤 무기력하다. 차라리 아팠었으면 내 마음을 회복해가는 데에 더 이득이 되지 않았을까? 학교는 영원히 나에겐 어떤 무덤 같은 존재로 남아있다.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99년도에 실제로 일어났던 총기난사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엘리펀트>에 대해서 내가 가장 크게 칭찬하고 싶은 부분은, 실제의 비극을 다루는 태도의 윤리성 등도 물론 있겠지만, 바로 십대들 들의 학교 생활 그리고 일상을 담아내는 사실적이고도 몽환적인 촬영에 있다.


 영화를 정말이지 아무런 내러티브가 없다. 어쩌면 이것이 다큐멘터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대사와 플롯은 해체되어 있고 그 빈 자리엔 영양가 없는 대화들과 규칙적인 움직임만이 남아 어떤 장엄한 영화적 폐허를 형성한다. 주정뱅이를 아버지로 두고 있는 존, 그런 존을 위로해주는 아카디아, 잘 나가는 얼짱 커플, 왕따를 당하는 미셸, 허구한 날 필름과 카메라에 파묻혀 사는 일리아스, 거식증에 걸린 소녀들... 그리고 어른들. 모두가 어렸던 날들에 한 번쯤은 마주쳤을 틴에이지의 스테레오타입이며 어떠한 독특한 인물성 따위도 없다.




 그러나 그 해체는 꽤 매혹적이다. 시종일관 아이들이 걷고, 뛰고, 혹은 가끔 말하는 장면들로만 이루어진 전반부의 40분은 정말이지 나를 사로잡는다. <엘리펀트>는 비극을 다루는 일종의 윤리적 우화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가장 원시적이고도 기초적인 요소들로 대사 몇 줄 텅텅 빈 각본을 풍부하게 요리한다. 다시말해 <엘리펀트>는 우아한 최면술과도 같은 작품이다.


 인물이 걷는 장면엔 항상 자연광이 렌즈 플레어만치 도드라지고 롱테이크가 사용된다.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아웃 포커스로 우린 오로지 인물들의 얼굴 측면만을 응시할 수 밖에 없고 화면비는 제한적이다. 따라서 출발부터 도착까지의 여정이 긴 호흡으로 담겨진다. 무표정하게 걷는 인물 그리고 희미하게 들리는 명상적인 효과음들과 함께 관객은 인물의 발걸음에 맞추어 시적인 운율감을 느끼게 된다.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에서의 낯설음 그리고 뜻밖의 리듬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굉장히 신비로운, 어쩌면 무속적인 순간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최면에의 동참은 총기 난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시종일관 지속된다. 영화는 오히려 놀랍도록 평온하고 일상적인 풍경들을 제시함으로써 극 후반에 언젠가는 발생할 총기 난사를 더욱 불안하고 두렵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의 지연으로 구체화된다. 걷고 뛰고 말하는 십대들은 한 공간 혹은 여러 공간에서 끊임없이 교차되고 연결된다. 카메라는 교무실에서 존을 보여주다가도 어느새 한 커플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 생일 서프라이즈를 받는 교사로 그 움직임을 연결한다. 똑같은 시간의 사건이 다른 인물들의 시점으로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개인의 몸짓으로부터 얻어지는 박자감은 어느새 영화의 모든 인물의 교차 지점에서 다시금 살아남으로써 이 영화 전체의 운문적인 아름다움을 형상화한다.



 그리고 카메라를 든 소년인 '일리아스' 의 행동들에게서도 역시 놀라운 각운을 발견할 수 있다. 필름을 현상할 때 필름통을 위 아래로 반복적으로 뒤집는 그러한 몸짓 그리고 빨간 현상실 조명 아래 사진을 한 장 한장 현상해 내는 일리아스의 행동들은 마치 <검모> 처럼 장면 하나하나가 어떠한 시를 이룰 수 있게 해주는 듯 보인다. 또한 일리아스는 현상 도중 한 아시안 여학생과 꽤 가까이 붙어서 대화를 하게 되는데 대사와 대사 사이의 공백 그리고 남녀 사이 어떠한 긴장감으로 그 운율감의 깊이를 더해준다. 개인들 간의 아주 찰나의 순간조차 작품의 미적 요소로 알뜰히 사용하는 감독의 예술적 재량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일리아스는 무장을 하고 나타난 난사범들을 아무런 편견 없이 카메라로 찍어준다는 점에서 꽤 상징적이다. <엘리펀트>의 카메라는 누구를 어떻게 향하고 있는가? 감독은 마이클 무어처럼 총기 난사라는 사회적 현상을 물리적인 인과로 국한시키지도 않고 그들을 불쌍한 학교폭력의 피해자로 대상화하는 한국 신파같은 우를 범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들의 건조한 살인 계획 그리고 일상조차 하나의 시구로서 작품 안에 스며들고 다른 평범한 인물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제시된다(알렉스가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하는 장면은 너무나 아름답지 않은가).


 우리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비극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영화 말미에 새로이 등장하는 '베니' 라는 건장한 흑인 청년은 이 윤리적 질의에 대해 흔히 제기된 오답을 시정한다. 베니는 피와 불로 난장판이 되어버린 학교를 침착하게 거닐며 충격에 빠진 아카디아를 잘 내보내주고 난사범들의 뒤를 밟는다.


 그 순간 우리는 범죄영화에서만 보던 통쾌한 복수에 대한 상상을 은연중에 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베니는 이 영화에서 일리아스와 더불어 꽤 기능적으로 사용된 인물이다. 교장 선생을 위협하는 테러범 뒤로 슬금슬금 다가가는 베니는 무기력한 관객을 대신해 마치 어떠한 물리적 정의를 실현해 줄 것만 같다. 그러나 미카엘 하네케의 <퍼니 게임>과도 같이 관객이 가진 무법적 희망은 자비없는 총알로 끝나며 목숨을 보전한 것만 같던 교장 선생도 끝내 농간에 죽어버린다.


 이 작품에서 구스 반 산트가 부린 이 놀라운 윤리적 트릭에 대해 <퍼니 게임>처럼 기분 나빠하는 관객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오히려 자신의 윤리관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될 것이다. 똑똑한 감독은 유럽의 문화 엘리트마냥 2시간 가까이 관객을 조롱해대며 "나는 너희들과 다릅니다"라고 연설하지 않는다. <펄프 픽션>을 비판하던 그 우둔함같이 독자들을 폄하하지 않는다. 감독은 베니라는 간단한 허구적 대리인으로 관객의 내면 가장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가는 효율성과 기민함 그리고 예의를 보인다. <엘리펀트>가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장 큰 연유를 바로 이러한 것들에서 유래한다는 의견이다.




 

 다시 첫 문단으로 회귀해본다. 짧은 영화였기에 짧게 마치고 싶다. <엘리펀트>는 일상의 재발견이라는 꽤 지루한 미학 워딩을 아주 철두철미하고 집요하게 일구어낸다. 상투적이고 뻔한 말을 진심을 담아서 할 때 되려 그 효과가 기하급수적으로 강력해지듯 <엘리펀트>의 예술적 성취도 분명 그러할 것이다.


 내가 세상과 단절되었다고 쓸쓸하게 고백한 것은 애달픈 자기고백이기도 하지만 오글거리는 허세이기도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대상과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학교를 왔다 갔다 하며 사람들의 패션 표정 그리고 몸짓을 집요하게 따라가는 것은 나의 굉장한 취미 중 하나가 된지 꽤 오래되었다. 나는 그러다 엄청 멋진 사람들을 발견할 때마다 존재하지도 않는 카메라로 그들을 필름 속에 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곤 한다(나같은 사람들이 캐스팅 에이전시에 취직하는 것일까?). 인간이 만들어내는 원시적이고도 축복스러운 반복적인 몸짓들 그리고 세련된 패션들을 기억의 콜라주로 재구성하며 놀아보는 것은 꽤 즐거우면서도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엘리펀트>는 이러한 내 미학적 지향에 가장 잘 일치했기에 더 큰 의미를 둘 수 있던게 아닌가 싶다. 무의미를 차곡차곡 모아 거대한 의미를 도출해내는 것은 내가 단지 일체의 상상만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경지였다. 범인들이 상상할 때 예술가들은 이미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미적 충격, 일체감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값진 경험을 얻을 수 있었고 여타 내 마음의 영화들처럼 내 영화보기 공식이 점점 강화되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도 이런 영화를 보고 졸문을 남길 수 있는 여지가 조금씩 주어질 때마다 기분이 점점 나아지는 것을 느낀다. 나는 분명히 성인 ADHD가 있다. 매사 부정적인 것도 그렇고 말이다. 그렇지만 희망적인 소식은 나도 점점 긍정의 힘과 마음의 여유를 조금씩 챙기기로 다짐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순례와 치유의 길에는 이런 아리따운 시네마들이 동참해준다. 운동만큼이나 예술은 삶에 적극적인 동력원이 되어 준다.\


 하하... 내일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야한다. 나도 군대에 가는구나. 갑자기 절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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