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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

보드게임

by JULIE K

조그맣던 아이들이 어느새 자라서 함께 놀 수 있는 시기가 찾아왔다. 우리 가족이 유일하게 모여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 수 있는 놀잇감은 보드게임이 유일하다.


승부욕이 강한 우린 서로를 방해하거나 이용해서 우승을 차지하려고 매 게임 진심으로 임한다. 근 들어서는 머리가 제법 커진 녀석들이 우승을 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치열한 접전을 펼친 뒤 거머쥔 1등이 주는 쾌감은 짜릿할 것이다. 기분이 상당히 좋은 아들은 매번 이길 때마다 한 마디씩 했다.


"나 요즘 승률이 좋은 거 같아. 게임할 때마다 이겨."


게임에서 이길 때마다 저리 기분이 좋은지... 녀석의 위풍당당함은 나의 숨어있던 장난기를 쿡쿡 찔렀다.



마침 하드보드지 필통을 만들고 보드 한 개가 남은 것이 눈에 띄었다. 쓸 곳이 없으니 활용해 보기로 했다. 추진력과 집념이 쓸데없이 강한 나는 하드보드지를 들고 와서 자와 펜을 쥐고 선을 시원시원하게 쭉쭉 그어나갔다. 5분도 안 돼서 간단한 표를 완성했다.


"이제부터 게임할 때마다 이긴 사람은 여기에 스티커를 붙이자. 진짜 승률이 누가 높은지 기록해 보는 거야. 어때? 재밌겠지?"


아이들은 나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녀석들이 이해하는지 못하는지는 내겐 관심밖이었다. 그저 이 삐뚤어지지 않게 반듯하게 긋는데만 집중할 뿐이었다.


표의 맨 앞칸에 각자의 이름을 적고 개별 공간마다 줄을 나눠서 우리가 자주 하는 보드게임의 이름을 적었다. 카탄, 부루마블, 루미큐브, 그 외에 들어가는 게임들까지 칸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명예의 전당'


뭔가 거창한 게 있어 보인다. 엄마가 뭘 하는지 전혀 감을 못 잡던 녀석들은 표가 완성되자 조금씩 승부욕이 발동됐는지 당장 스티커를 사 와야 한다며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진정한 승부의 세계가 시작됐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게임을 진행했다. 치열한 접전 끝에 첫 우승은 내가 차지했다.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그 어느 때보다 힘든 게임이었다. 기세등등하게 첫 스티커를 붙인 나는 희열을 느꼈다. 아이들을 상대로 이겨놓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아무렴 어떠한가? 스티커가 주는 힘은 생각보다 강렬했다. 열심히 싸워 이긴 자에게 주는 작은 보상인 셈이다.


명예의 전당에 대한 가족 고객님들의 만족도는 상당히 높았다. 우리는 할 일 없는 사람들처럼 주말 저녁마다 모여서 게임을 속전속결시켰다. 스티커를 하나씩 붙여나갈 때마다 모두에게 웃음꽃이 피었다.


눈앞에서 증명된 승점으로 저마다 어느 게임에 강한지 한눈에 파악되었다. 나는 전략게임에 강했고 남편은 추리게임에 강했다. 예상외로 두 아이들은 카드게임에 강했다.


정말 놀라운 것은 막내의 숨겨진 실력이었다. 름대로 전략을 짜고 게임을 진행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얕은 꼼수를 쓰며 이겨보려 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정정당당하게 정해진 규칙에 따며 아무도 예상하지 못 한 순간 승리를 거머쥔 꼬마의 기쁨은 어느 때보다 짜릿했을 것이다.

역대급 승리를 거머 쥔 순간들



2025년 새해가 밝으면서 게임의 판도가 뒤바뀌었다. 카탄 게임에서 영원할 것 같던 나의 독점 우승을 끊어 내고 아들이 첫 승리를 거뒀다. 절대강자로 10승을 눈앞에서 놓쳐버렸다. 아무래도 게임을 확장시킬 때가 온 것 같다.


지난 추석연휴 때 그랬던 것 저럼 이번에 찾아 올 기나긴 설연휴에도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예상된다. 쩌면 체력을 미리 비축해둬야 할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스티커를 붙이는 그날까지 우리의 전쟁은 나날이 발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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