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찔찔이 Jan 21. 2024

9. 성장도 다 못했는데, 퇴행이 와버렸다.

대머리 아저씨와의 소개팅에서 냉동난자까지, 나의 모태솔로 탈출 분투기

 마지막으로 우리가 만난 곳은 온 벽마다 취한 이들이 써 내려간 낙서로 가득한 시장 앞 호프집이었다. 긴 플라스틱 음료컵에 오는 사람마다 가득 따라주는 골뱅이 홍합 육수가 어찌나 시원한지 나도 모르게 소주 한 병을 주문하게 되고, 굵은 쌀떡 그리고 꽈리고추까지 함께 바삭하게 튀겨 나오는 옛날 통닭은 한점 뜯으면 나도 모르게 생맥주를 추가하게 되어 내가 애정하는 공간이었다. 나는 그에게 꽤나 잘 어울릴 것 같은 그 집을 소개해주고 싶었다.


 네 번째 만남에서 이미 그는 나에게 자신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며 너와 연애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황당하게도 나는 그 와중에 그럼 그 호프집에 같이 못 가는 거냐고 물었다. 그는 웃으며 친구로 지내자면서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그에게 친구가 많냐고 물었다. 그는 별로 없다고 했다. 그가 거절을 한 줄도 모르고 나는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고 착각했다.


 호프집은 서로의 집에서 5분 거리에 있었지만 그는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웬일로 그가 먼저 나와있었다. 그날이 마지막 만남인 줄도 눈치채지 못하고 나는 이 집이 얼마나 맛있는지 호들갑을 떨며 가게로 들어섰다. 평소 같으면 늘 손님이 많았을 텐데 이른 시간에 만난 탓인지 가게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통닭도 금방 나왔다.


 평소와 달리 그는 말을 많이 했다. 그가 자신의 발에 생긴 티눈 치료를 위해 만난 괴짜 피부과 의사 이야기를 했고 내가 깔깔 웃는 동안 치킨은 식어가고 있었다. 전과는 달리 그가 편안해 보였다. 치킨이 거의 다 남았는데, 이런저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던 그가 그만 일어나자고 했다. 그렇게 맛있다고 요란을 떨었는데 뭔가 그의 입맛에는 안 맞았나 걱정하며 나는 급하게 계산을 했다. 그가 따라와 ‘고맙습니다’ 존댓말을 하며 고개 숙여 인사를 하더니, 가게를 나서자 ‘안녕’하고는 이만 각자 집으로 가자고 했다. 금요일의 초저녁이었다.


 주말 동안 그는 내 연락에 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는 연락하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아’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월말이라 사무실에는 업무가 많았다. 나는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점심시간이 돼서야 그 메시지를 확인했다. 뭐야 이거.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이런 건가? 메시지를 본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뜨거운 기운이 쓱 스쳐 지나가더니, 시간이 멈춘 것처럼 머리가 하얘졌다.

으아악 안 돼.

 차이면 눈물이 흐를 줄 알았는데. 웬걸 메시지를 읽는 순간 갑자기 발에 쥐가 났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질렀다. 옆에 있던 선배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다. 대답도 못할 정도로 아팠다. 악. 악. 소리를 질렀다. 왼발 네 번째 발가락이 뒤틀리는 느낌에 발을 딛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일을 해야 했다. 경련이 날 정도로 발 끝에 힘을 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지친 몸으로 퇴근을 하고 술 한 잔 할 엄두도 못 낸 채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왼발을 내려보았다. 발등에 시커먼 멍이 들어있었다. 술도 안 먹었고 아무것도 걷어찬 적도 없는데? 무서워진 나는 급히 한의원에 갔다. 한의사 선생님께 어제 심하게 쥐가 났는데 아침에 이렇게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대수롭지 않게 한마디 했다. ‘퇴행이 시작되신 겁니다. 몸이 경고하는 거예요. 물리치료받고 가세요.’


 아. 제대로 된 연애도 못해봤는데, 나는 아직 어른이 덜 되었는데, 퇴행이 시작되어 버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8. 인생에는 튜토리얼이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