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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민 Nov 07. 2024

토리의 선택부터 빅토리아의 계승까지 4

셸리 리드의 소설, 『흐르는 강물처럼』을 읽고 4

■ 모성(母性)과 신성(神性) 그리고 상상력     


  빅토리아가 산막에서 홀로 아들을 낳는 장면과 더불어 소설에서 가장 긴장된 순간은 공터에 소풍 온 가족의 자동차 뒷좌석에 갓난아기를 놓고 도망가는 장면이다. 아기를 발견한 양모는 엄마가 현장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하고 바위 위에 복숭아 한 알을 놓아둔다. 그 후 빅토리아는 아들의 나이만큼 하나씩 돌멩이를 올려놓는다. 자신이 발견된 현장을 찾은 아들도 큼지막한 복숭아 모양 돌멩이를 얹는다. 이 복숭아와 돌 들은 빅토리아와 아들을 이어주는 객관적 상관물인 동시에 모성을 상징한다. 산막 주변에서 조우한 작고 가냘픈 어린 사슴에 감정이입하고, 동생 세스와 오클리네 삼 형제가 황소개구리에게 등유를 붓고 불을 붙이는 모습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흘리는(71쪽) 빅토리아의 심성은 한 인간의 어머니를 넘어서 대자연(Mother Nature)으로서의 모성을 뜻한다. 빅토리아의 아들을 기른 잉가 테이트의 모성도 잊지 않아야 한다. 잉가가 벤치에 앉아 아들 ‘루카스’에게 그를 발견하게 된 일련의 과정과 아들로 받아들이기로 하는 결심을 털어놓고 ‘숲의 어머니’ 빅토리아를 위해 편지를 쓴 것도 위대한 모성에 기인한다.


  대자연으로서의 모성은 신성(神性)으로 확장된다. 아이올라는 마치 세속의 수도원 같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생활, 해마다 이루어지는 복숭아 농사, 보수적인 가정의 분위기까지 말이다.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던 엄마의 슬하에서 자란 빅토리아는 자신을 둘러싼 일련의 일을 종교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빅토리아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그리스인 조르바》의 화자가 조르바를 바라보듯 윌을 신성시한다. 강렬했던 만남과 급작스런 이별은 사후의 추체험으로 윤색되었을 것이다. 윌은 “그는 좀처럼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 없었고, 과거를 돌이키는 일은 그보다도 없었으며, 후회도 아쉬움도 없이 오로지 현재의 순간만을 두 손에 소중히 담고서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경탄하는 사람이었다.”(29쪽)같은 문장을 보면 윌은 마치 ‘카르페 디엠(Carpe Diem)’,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체화한 조르바 같지 않은가. 유년 시절의 멘토였던 사촌 캘러머스가 죽은 뒤에 윌이라는 버팀목이 나타난 것이다. 윌은 조르바를 넘어 예수의 현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느님의 의지(Will)를 뜻하는 윌의 이름처럼 빅토리아의 아픈 발목을 문질러주었을 때 통증과 부기가 사라지게 하고(128쪽), 루비 앨리스의 죽어가던 새끼 강아지를 두 손으로 문질러 살려냈다(131쪽). 신비로운 능력은 그의 아들 루카스에게도 계승된 것처럼 보인다. 성경에서 예수가 나병 환자를 치료하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병자들을 낫게 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윌이 피부를 벗겨진 채 협곡에 내던져졌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예수는 대체로 어떤 행동을 하기보다는 ‘말씀(Word)’으로 치유하는 예언자에 가깝다면 윌은 대상을 어루만지고 직접적으로 접촉한다. 


  모성과 신성의 바탕에 빅토리아의 상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빅토리아의 상상과 꿈의 장면에 자주 머물렀고, 그녀의 상상 속의 장면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빅토리아가 현실에서 윌과 같이 보낸 시간은 짧다. 회상과 기억으로, 상상 속에서 그와 보낸 시간이 훨씬 더 길다. 사촌 오빠 가족이 토네이도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61쪽), 초경으로 피 묻은 침대 시트를 앞에 두고 “특별한 피에 이끌린 어떤 악의 무리가 마당에서 우리 가족을 스토킹하고 나를 공격하려고 숨어 있다는 상상”(65쪽), 윌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어머니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강인하게 서서 휘몰아치는 홍수를 막아주는 꿈(66쪽), 휠체어가 두 동강 나서 이모부를 바닥에 패대기치는 상상(79쪽), 아빠가 침대 위에 놓인 편지를 발견하고 천천히 편지를 열어보는 모습을 상상(166쪽), 아빠도 저기 어두컴컴한 벽장 속에서 나처럼 숨어 있을 거라고 상상(183쪽) 등.


  상상은 억압된 욕망의 배출구인 동시에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미래이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강물처럼 빅토리아는 또다른 땅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내시 복숭아나무를 상상했을 것이다. 상상은 결코 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윤슬이 반짝이는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 계승과 선택  

   

  나는 이 소설을 씨실과 날실로 정교하게 엮은 대칭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루카스의 생모인 빅토리아와 양모인 잉가, 빅토리아의 막무가내 남동생 세스와 루카스의 쌍둥이 맥스웰, 빅토리아가 아들을 낳았던 숲과 숲을 휘감고 돌며 흐르는 강, 저자 자신과 작가를 꿈꾸었던 잉가 테이트 등. 또한 소설은 주인공이 실수와 방황을 딛고 땅과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자신의 실존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적인 면도 있다. 비루한 삶을 살던 여성이 ‘토리Torie’라는 허물을 벗고 ‘빅토리아Victoria’의 세계로 들어가 자신의 깨달음(토양의 회복력, 어려움을 기꺼이 마주하기, 시간의 의미, 흐르는 강물처럼 살기)을 아들에게 전하는 ‘계승’의 테마가 존재한다. 선대부터 이어온 복숭아 농사는 빅토리아에 의해 명맥을 이어간다. 신비한 치유 능력을 보여주었던 윌처럼 그의 아들 루카스도 특별한 손으로 동식물을 치유했다. 윌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그의 아들 루카스를 찾아가는 과정, 양모 잉가가 쓴 비닐봉지 안 두툼한 쪽지 뭉치를 통해 빅토리아에게 전해지는 아들의 성장스토리 등 개인의 삶과 땅의 역사를 계승하는 일이 고스란히 소설에 담겨 있다. 루카스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빅토리아는 선택의 바통을 자신의 아들에게 넘겼다. 사실과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어떤 미래를 선택을 할 것인지는 루카스의 몫이다. 그들은 ‘상실과 슬픔의 공동체’를 넘어 이제 ‘선택의 공동체’의 일원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26장)은 프롤로그처럼 빅토리아가 저수지 끄트머리에 서서 물에 잠긴 고향 집을 상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책의 겉표지를 보면 노을이 지는 언덕에서 복숭아 과육 속에 한 여자가 흐르는 강물과 들판을 바라본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등만 보인다. 빅토리아는 출산을 위해 가출하면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남기면서 토리라는 이름 대신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남겼다. 컴컴한 옷장 속에 웅크려 있던 토리는 문을 열고 나와 빅토리아가 되었다. 


  행복한 삶이란, 스스로 선택하고 자존감을 가지고 사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즉 자기결정권을 제대로 누리는 삶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의 바람과 욕구대로 행동하고 만족을 얻는 삶이다. “누구든지 웬만한 정도의 상식과 경험만 있다면,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 방식 자체가 최선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 방식대로(his own mode)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것이다.”(존 스튜어트 밀, 앞의 책, 145쪽) 합천에서 아버지가 용기를 내어 어머니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면, 돈을 벌기 위해 부산으로 가지 않았다면 나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직장을 부천에서 얻지 않았다면, 지금의 아내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의 내 아이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우연과 우연이 겹치고 겹쳐 내 삶의 물결이 이어져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계승에 관한 상상을 하다 보니 내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은 강물처럼 흘러 하나의 장면에 도달한다.      


  여름내 뙤약볕을 먹고 무럭무럭 살찐 나무그늘 아래 다리에 철심은 박은 아버지를 이끌고 대관람차를 탔다. 보온병에 담아 온 말들을 아껴가며 나눠 마셨다. 올라갈수록 기다래지는 침묵, 몰래 올라 탄 귀뚜라미 울음소리, 아버지의 움푹 팬 볼우물에 고이는 가을볕. 거대한 러시안룰렛이 천천히 굴러간다. 베팅을 하는 도박사처럼 아버지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다리를 찢고 물가에서 목을 축이는 기린처럼 가쁜 숨을 내쉬는 아버지 덥석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온힘을 다해 숨을 불어넣는 유리공처럼 아버지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짐승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수레바퀴처럼 이번엔 어린 아들이 내 손을 잡아끈다. 자동차의 백미러에 비치는 풍경처럼 느티나무 아래 아버지가 점점 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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