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1등?
모험은 그 자체만으로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아멜리아 에어하트)
부산교육대학교는 사회생활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설명한 대로 부산교대에 합격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하였다. 지난번에 소개한, 생각하고 기도하며 공부에 몰두한 내용에 추가하여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 싶다.
1. 부산교대 합격자 중 최고 점수
305점.
수석으로 합격했던 친구 T의 점수였다. 그는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다니다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어서 재수하여 우리 학교에 다시 입학하였다. 그 친구는 함께 스터디를 할 때, 고등학교 시절에 러셀(Bertrand Russell)의 행복론(The Conquest of Happiness) 영어 원문을 번역하였다고 했다.
2. 부산교대 합격자 중 최저 점수
2022년 11월 9일, 부산의 모 초등학교에 학부모와 학생에게 강의를 하러 갔다. 거기에서 부산교대 동기인 Y선생을 만났다. 그녀는 일찍 명예퇴직을 하고 해외에 다녀오면서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대화 중에 우리가 부산교대에 입학할 때에는 성적이 모두 좋았다고 회상하였다. 당시에 커트라인이 246인가 247점이었다고 말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Y선생의 기억력에 놀랐다.
3. 나의 합격 등수
이보다 기쁠 수 있을까?
나는 정원 440명 모집에 440등으로 입학하였다. 최종 합격자라는 세 가지 증거가 있다.
첫째, RNTC로 군복무를 대체하기 위하여 망미동 국군통합병원으로 신체검사를 받을 때, 조교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대답을 하며 바라보았더니 “네가 440등이구나”라고 말하였다. 아마도 신입생 서류에 입학 석차가 기록되어 있었나 보다. 당시에 친구들은 긴장하였는지 귀담아듣지 않았으나 나는 또렷하게 들었다.
둘째, 교대에서 친하게 지내던 같은 반 친구랑 이야기하는 중에 자기는 부산교대를 꼴찌로 들어왔다고 하였다. 웃으면서 내 점수를 말해주었더니 자기는 원래 249점이었으므로 꼴찌나 다름없어서 그렇게 말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대입안내 월간지인 ‘진학’에서는 부산교대 합격자의 최저점이 246점이라고 나왔기에 자기 밑에 한 명 더 있구나라고 생각하였다고 했다. 세 번째 증거는 위에서 말한 Y선생의 기억이다. 끝에서 1등이란 말은 누가 만들었는지!
4. 아버지의 친구들이 부러워함
나의 선친은 전라남도 진도에서 부산으로 이사하셨다. 1975년에 진도의 주산업은 농업과 어업이었다. 당시에 우리나라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공업이 발달하여 많은 가구와 청년들이 도시로 이사를 나갔다. 우리 부모님과 친구 몇 분은 서울 경기 대신 부산을 선택하였다. 아버지와 친구들의 자녀들은 모두 큰 공장이나 조그만 회사에 다녔다. 그런데 내가 교육대학에 합격하자 나보다 아버지가 축하 인사를 더 많이 받았다. 아버지는 부산으로 이사 왔던 친구들 중에 아들을 맨 먼저 대학에 보냈기 때문이다.
5. 환자에서 건강한 몸으로
부산은 항구라서 외항선원이 많았다. 외항선원인 친척들이 통신사가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통신학원에 다니면서 모르스 부호로 통신하는 법을 배웠다. 통신사 시험에는 합격했으나 신체검사에서 OO판정을 받아 선원이 될 수 없었다.
부산교대에 입학하기 전 군대 의무복무를 위하여 신체검사를 받았다. 두 번의 신체검사에서 OO으로 인하여 2년 동안 연기처분을 받았다. 화학제품 회사에 다니면서 분진을 마신 환경, 어릴 적부터 차와 배 멀미로 인한 체력 저하, 고등학교 때 자취하면서 반찬은 별로 없이 밥과 면 종류만 먹은 영양 결핍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리라.
당시에 교육대학은 남학생에게 5년간 교사로 근무하는 조건으로 재학기간 동안 군사훈련을 했다. 그래서 교육대학에 합격한 후에 예비역하사관(RNTC) 적합여부를 판단하기 위하여 망미동 국군통합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당연히 동일한 증상으로 면제를 받을 줄 알았는데 정상으로 판정받았다. 지난 1년 반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생활습관이 규칙적으로 바뀌고 건강하게 살아서 병으로부터 회복되었으리라 추측한다.
6. 시력은 낮아짐
고등학교까지는 양쪽 눈의 시력이 1.5 정도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할 즈음부터 먼 거리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 입학을 준비하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책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두운 화장실, 햇볕 강한 길, 흔들리는 버스 등에서 집중하여 책을 읽었다. 이로 인하여 시력이 나빠졌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안경의 유리알이 더욱 두꺼워지고 있다. 영광의 상처 정도로 생각하며 산다.
7. 삼촌 도우러 서울 갔다가 소득 없이 돌아옴
삼촌은 부동산 중개업무를 하면서 아파트의 분양, 매매와 전세업무를 보았다. 8월 초순 서울에 도착하여 다음날 삼촌을 따라 사무실에 갔다. 삼촌은 유인물을 주면서 밖에 나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그것을 오전에 행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무실로 들어와 삼촌이랑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은 후에 식곤증 때문인지 사무실 뒤의 소파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 삼촌이 깨워서 시계를 보니 퇴근시간이라 삼촌 댁에 와서 저녁을 먹고 잤다.
다음날도 출근하였는데 오전과 오후 내내 소파에서 잠만 잤다. 삼촌은 매우 인자한 분이셨는데, 다음날 나보고 당분간 부산 집에 내려가서 지내라고 말씀하면서 서울역까지 데려다주셨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삼촌과 통화를 하셨는지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Adventure is worthwhile in itself. Amelia Earh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