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장마가 시작되었다.
심연으로 가라앉는 기분.
무언가 나를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처음엔 신들린 줄 알았다. 뭔가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기분, 바람이 불 때면 내 옆에 애기 동자가 있는 기분이었다. 하필 그때 남자친구가 "저기 공원 옆에 애기동자 받은 무당집이 있대"라는 말을 했고, 나는 '아 드디어 내 곁에 가까이 왔구나'라는 생각도 했다. 언제는 남자친구한테 악마가 씐 것 같았다. 딱히 무언가를 하진 않았지만 그냥 눈빛이 그랬다.
지나가는 사람이 코를 비비는 이유도 나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집 앞에 주차된 차 번호도 무언가 메시지를 주는 줄 알았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착각에 빠진 것이다. 그것도 아주 깊게.
망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약을 먹으니 금방 좋아졌다. 하지만 이미 시간은 많이 지났고, 어느덧 가을이 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실, 휴직하기 전에 충분히 가족들한테 힘들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러나 원래 신입은 힘든 거라는 말만 했을 뿐, 나는 너무 억울하고 답답해 집을 나와 남자친구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가족과 담을 쌓고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알고 보니, 남자친구가 내가 어딜 갈 때마다 무엇을 무서워하고 어디서 힘들어하는지 엄마한테 수시로 문자를 하고 있었다. 진득이 내리는 빗 속에서도 나의 우산이 되어준 사람이다.
이번엔 주사로 약을 바꿨다. 매번 저녁때마다 약을 챙겨 먹기도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엉덩이가 남아나질 않겠지만 그래도 훨씬 편해졌다.
남아있던 공황이 지하철에서, 횡단보도에서, 길거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때마다 주변사람들에게 무섭다고 말하는 일은 참 도움이 되었다. 나의 힘듦을 공론화하는 일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느껴본 사람만 안다.
시간은 많이 흘렀고, 비에 젖은 뒤 나는 스도쿠라는 취미를 갖게 되었다. 스도쿠가 하나씩 끝날 때마다 장마로 젖은 나의 옷들이 마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