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의 편지] 이야기 다섯
싹둑싹둑. 약이 하루에 두 알씩 늘었다.
이것이 내 슬픔에의 사망선고였으면 좋겠다고 잠시나마 염원했다. 그러나 이제 막 오르막에 오르는 중일 뿐이라고 뒤에서 등을 떠미는 누군가가 자꾸만 속삭이는 것 같아. 잊을 만하면 내 목을 옭아매 조여오는 그 그림자가.
에스시탈로프람. 신경전달물질의 양을 조절하는 항우울제. 세로토닌 흡수 차단제. 공황장애. 불안장애. 강박장애의 치료제. 일일 이십 밀리그램을 초과하는 용량을 복용 시 안정성이 확립되지 않는다. 내가 복용하는 양은 하루에 십오 밀리그램이다.
알프라졸람. 진정 및 안정 효과로 우울증에 수반되는 불안 증상을 개선하는 항불안제.
인데놀. 심박독수와 심박출량을 감소시켜 혈압을 조절하는 부정맥용제.
몇 번째 먹는 약인지 이젠 셀 수도 없어. 쓴 맛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러나 약이 흡수되면 머지않아 망각되겠지. 기억을 옅게 만드는 약이니까.
강물의 물고기들이 버려지는 약들이 녹아든 물에 살면서 두려움을 잊어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미쳐가는 사람을 멈추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약들이 살아있는 다른 것들을 미치게 만든다. 미쳐가는 사람을 만든 그것들이 약을 만드는 것들이다. 순환되어서는 안 되는 순환. 나는 언제부터 갇히게 된 걸까. 언제부터 갇힐 운명에 놓인 걸까.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약을 먹는다고 말한다면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할까.
이게 거짓말이 아닌 마지막 나쁜 말이었으면.
생각한다.
이 년 전 여름으로부터.
집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다음 정류장까지 천천히 걸으면서 눈을 감아보았다. 어릴 적에는 자주 눈을 감고 걸었었는데. 그렇게 아무것도 안 보이는 앞을 보며 걷다가 갑자기 앞에 뭐가 있을까 두려워질 때가 내 스스로 내가 살아있음을 가장 절실하게 감각할 때라고 믿곤 했었다.
눈을 감고 걸으면 절대로 볼 수 없을 것 같은 빛이 들어온다. 그러나 모두가 태어나기 전인 것처럼 몹시도 낯익은 빛이다. 그러다가 문득 태어날 때. 눈을 뜬다.
내 안의 무언가가 다시 태어난다. 내가 손수 묻어버리기 전까지는 언제까지나 살아있을 무언가가.
이 년 전 여름으로부터.
추신.
자살에 성공한 사람들 외에는 그 무엇에 성공한 사람도 부럽지 않던 학창시절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우울을 죄다 주워 담아다가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몸을 내던지면 그것으로 더 바랄 것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때 우리는 모두 그랬다. 그들 모두를 증인으로 삼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안에 있던 무수히 많은 나는 언제나 그랬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너는 죽고 싶었던 적이 있냐는 말을 들은 건 열한 살의 봄이었다. 나보다 세 뼘은 더 키가 큰 그 아이의 얼굴에는 높은 나무의 나뭇잎들이 건들거리며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저 아이가 나랑 동갑이라는 게 순간 믿기지 않았다. 그 큰 키도 그 말도. 아직 우리에게 주어지기엔 너무 일러. 나는 내심 그렇게 생각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대신에 죽고 싶었던 적은 없지만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 같다고 대답했다. 앞부분만 거짓말이었다.
그렇게 비로소 내 머릿속에는 이전까지는 차마 똑바로 자각하지도 못했던 죽음의 형태가 푸른 불꽃의 색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해 느끼는 이만큼의 무게는 내가 실제로 죽는 그 순간까지는 어떻게 해도 떠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학년이 바뀌면서 그 아이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졌지만 그런 건 내게 이미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바야흐로 인생에서 처음으로 갈망하는 것의 윤곽이 막연한 그늘을 벗어나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 너무 이르다느니 하는 안일한 예단은 집어치우기로 했다.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바라왔던 거잖아. 사라지고 싶다는 말과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의 중첩에 자리한 진실은 너무 뻔하니까. 단지 나는 지금까지는 그 아이와 같은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혹은 거짓말에 너무 길들여졌거나.
죽고 싶었던 적이 있어. 실은 숨을 쉬는 모든 순간에 그렇게 생각해.
나는 언젠가 그 아이를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꼭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비록 다시 그 아이를 만났을 때 그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얼굴이 아니라면 이미 질식했을 그 심장의 끄트머리에라도 그렇게 속삭여주고 싶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런 불꽃으로 번져 흘렀을까. 번지다 못해 흘러넘치는 것은 오직 명도가 다른 푸르름뿐이던. 이젠 손가락에 다 꼽기도 벅찬 계절과 계절의 지난함. 그런 굴곡의 도돌이표를 몇 번인가 왕복하는 사이 내 키는 이미 그때 그 나뭇잎의 코앞까지 닿아 있었고 그날 처음 느꼈던 그 갈망을 조소하듯 거짓말과 웃음의 구분은 내게서 점차 무의미해져 갔다. 다른 사람 앞에서 웃을 때면 얼굴 가죽 전체가 가면으로 굳어지는 것만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타인을 위한 웃음을 멈추지 않는 이 가장 가까이서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체 누구일까. 나는 내 몸에 비해 너무 두껍고 거대한 알 속에 든 만들어지다가 만 불량품이었다. 아무리 두들겨봐도 그것은 깨뜨려지지 않는다. 차라리 누군가가 껍질에 작은 구멍을 뚫어서 그 사이로 물을 부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떠오른다는 게 뭔지도 모르는 채로 익사할 수 있도록.
까르르륵. 내 목소리를 한 웃음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하나의 목숨이 세상과 작별할 때 나는 작은 파열음도 덩달아 섞여 들어온다. 까르르르륵. 살려주지 않아서 고맙다고 인사한다.
그런데 대체 어째서야. 어째서 우리는 거짓말도 웃음도 없는 세상에서 살 수는 없는 거냐고.
까드드득 이를 갈며 가면의 뒷면을 향해 비수를 살포하는 것은 코끝의 숨결. 이걸 봐. 아직은 다 잠기지 않았어.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여기로부터 벗어나서 그런 세상으로 갈 수 있다면. 어쩌면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시끄럽지도 과묵하지도 않고 오직 고요한 진동의 소리만이 들리는 곳. 실은 알을 깨고 나아가고 싶다고 누구에게라도 고백할 수 있는 곳이 그 세상의 어디에라도 있다면. 어쩌면 멈추지 않고 가고 싶어질지도 모른다고.
그런 말들을 거짓말인 양 찬란하게 치장해서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렸던 것도 같다. 단지 그런 세월일 뿐이었다.
지금 여기에 있고 싶지 않다고. 여기에 있기 싫다고. 제발 나가게 해달라고. 어디로든. 가게 해달라고. 자꾸만 살고 싶은데 그 말을 하는 방법을 몰라서 죽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 그런 아이들이 있었다. 자살에 성공한 사람들을 추종하면서도 실은 그렇게 되고 싶지만은 않았다. 단지 어른이 되어 내가 아는 그 어른들처럼 살 수가 없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아직도 끝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한 채 십수 년을 한결같이 날마다 숨을 참는 연습을 한다. 날마다 날마다. 비축된 목숨의 대척점이 늘어난다. 도달하려면 얼마나 멀었을까. 한숨 돌릴 만큼은 되는 것 같다.
거짓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