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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율 May 02. 2024

우리는 서로에게 따뜻할 수 있을까

[일전의 편지] 이야기 넷

오늘은 날씨가 좋아. 서두르지 않는다면 바람도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날씨다.

     아무렇게라도 되어가는 수많은 것들에서 우리가 답을 찾고 있는 거라면 그 답이 꼭 정답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겠지.


이 년 전 여름으로부터.


내 안의 알맹이는 깎여나가고 그저 껍데기의 관성으로 하루하루를 지나는 것 같다.


요즘엔 뭘 먹어도 구토감이 몰려온다. 배는 고프지만 먹고 싶지 않거나 먹으면 속이 쓰리다. 헛구역질을 몇 번이고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도 거의 달고 산다. 지금도 속이 쓰려서 죽을 맛이야. 이미 잘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졸리지도 않을 정도랄까. 이럴 때는 약만 먹으면서 살고 싶기도 하다. 아니면 약을 먹고 죽거나.


다시 시를 쓸 수 있을까. 모르겠어. 술을 먹으면서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적은 있다. 하지만 약 같은 건 이제까지 떠올려본 적도 없어. 그런데 결국은 이렇게 되었잖아.

     만약에 약이 나를 멋대로 도려내고 짜집기해서 지금의 나를 만들어놓은 거라면. 이제부터 시를 쓰는 나는 진짜 나인가. 아니면 자기 스스로를 얼룩말이라고 믿는 고양이일 뿐이려나.


아. 얼룩말과 고양이를 생각하다 보니까 어느새 속 쓰린 게 사라졌어. 그럼 이제 횐 곰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나쁜 게 머릿속을 채우려고 할 때마다 흰 곰 생각을 하라고 어디선가 그랬었지. 그런데 흰 곰은 진짜 흰 곰일까. 진짜 희고 곰인 걸까. 글쎄. 알 수 없다.

     다만 내 나쁜 걸 지워주려는 사명감을 띤 흰 곰이 언젠가라도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기쁘게 껴안으며 내 시집을 선물할 것 같다.

     그러면 곰은 내가 연어가 아닌 것에 실망하겠지.


팔의 자해를 한 상처는 오늘따라 유난히 아프게 날 괴롭혔다. 올해의 첫 반팔을 입은 날이었어.

     그래 흰 곰. 넌 그냥 북반구에 그대로 박혀 있는 편이 낫겠다.


이 년 전 여름으로부터.


추신.


어떻게 해도 올바르게 산출될 수 없는 각도로 끊임없이 쏘아대는 빛의 파동. 천만 가지 갈래로 쪼개진 프리즘은 종내에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우리는 어쨌거나 항상 같은 말을 하려고 한다. 어차피 무슨 짓을 저지른들 닿지 않는다는 사실에 매 순간 몸서리치면서도 조금이라도 색다른 틈새를 발견하면 거기로 향해 내달리지 못해서 어쩔 줄 모른다. 그러나 오늘 내지르는 그 열띤 고함은 어제 울부짖었던 차디 찬 비명과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어쨌거나 우리는 같은 말을 항상 하려고 한다. 생각해 보라. 오늘 당신을 이루고 있는 사상과 물질들은 당신이 그것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위상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당신이 그것에 대한 무수히 많은 지도를 그린다고 해도 그것은 당신과 동일한 차원에 위치할 수 없다. 만약 옮기고자 하는 것이 어떤 소행성의 표면 정도라면 수억 장에서 많아야 수백억 장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제각각 조금씩의 오류야 있겠지만 그의 존재를 이해한다고 선언하지 못할 만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인간의 삶은 책상 위의 조각보처럼 간단히 타협되지 않는다. 아무리 촘촘하게 이어붙이고 꿰매더라도 그것이 불가해의 그늘로부터 벗어나 실체를 드러낼 가능성은 결코 영의 확률보다 커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진술하는 모든 낱말과 문장이 실로 그렇다. 그렇다면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내가 너의 말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어떤 각도에서 그 핍진성을 조명하는가. 그리고 대체 왜 조명되지 않는 나머지 모든 형상은 너무도 쉽게 일축해 버리곤 하는가.

     실제로는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 그 허구의 감각에 휘둘릴 수 있고 또 휘둘려지고 마는 것.

     그 이해하지 못할 것을 어쩌면 우리는 마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의 말에 같이 눈물을 흘려본 적은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과하게 예민한 언어의 상투성에 상처받은 적은.

     그럼에도 단순히 공기를 들이마시는 일에 기쁨을 느낀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비난한 적은. 혹은 마음이라는 것의 언저리에 저마다의 아픔을 느낄 법한 갖가지 미물들에 자신을 대조하며 슬퍼한 적은. 오리. 두더지. 토끼. 고양이. 흰 곰과 검은 얼룩무늬의 백마.

     그러나 무엇에 견주어 비유해 보더라도 사람은 결국 그들과는 다르다는 고통스런 진실만이 홀연히 떠오를 뿐이다.

     더는 길을 걷다가 맹수에게 공격당할 일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일지라도 우리의 몸은 여전히 심장으로부터 쿵쾅쿵쾅 울려퍼지는 본능적인 위험에의 공포를 놓지 못한 채 상처투성이의 삶을 살고 있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에게 사냥감이 되고 먹잇감이 되는 고도의 문명. 이것은 과연 몇몇 선구자들의 예지만큼이나 사회를 위해 이로운 발전인가. 늘 정답에 도달할 날이 머지않았을 거라고 장담하던 그들의 언어는 이제 모두 한없이 도태된 사어가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죽은 덫에 걸려 나아가지 못한다. 어차피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은 과연 편리한 위안이다. 변화를 따라가기에 우리가 지도를 그리는 방법은 아직도 너무 원시적인 평면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까.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무언가를 묘사하기는 했는가. 압사된 꽃잎처럼 고유의 빛을 잃은 평이하기 짝이 없는 등고선을 제외하고 말이다.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는 천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마음을 정확한 직각으로 분질러서 그 단면을 교수된 시체처럼 널어놓는 것으로 사람으로서 말해야만 하는 모든 언어를 대신하고 싶다는 충동도 종종 이를 뒤따른다. 그러나 정말로 이 응어리진 슬픔에도 나이테가 있다면 그것에 칼을 대지 않고도 살펴볼 수 있는 혜안 역시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단 한 가지의 진리에 고착화된 파편을 과감히 깨부술 수만 있다면.

     깊은 어둠에 잠식된 마음의 텅 빈 공간에조차 공평하게 내리쬐는 햇살의 노랗고 붉은 빛이 없다면 이 모든 생명의 알갱이들은 얼마나 보잘것없고 무의미한 것인가. 어차피 한낱 바람이 부는 속도로만 움직이다가 사라질 모래먼지일 뿐인 우리가.

     그럼에도 여전히 폭풍을 만날 시간을 기다린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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