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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율 May 14. 2024

더 맨 끝으로 가자

[일전의 편지] 이야기 다섯

싹둑싹둑. 약이 하루에 두 알씩 늘었다.

     이것이 내 슬픔에의 사망선고였으면 좋겠다고 잠시나마 염원했다. 그러나 이제 막 오르막에 오르는 중일 뿐이라고 뒤에서 등을 떠미는 누군가가 자꾸만 속삭이는 것 같아. 잊을 만하면 내 목을 옭아매 조여오는 그 그림자가.


에스시탈로프람. 신경전달물질의 양을 조절하는 항우울제. 세로토닌 흡수 차단제. 공황장애. 불안장애. 강박장애의 치료제. 일일 이십 밀리그램을 초과하는 용량을 복용 시 안정성이 확립되지 않는다. 내가 복용하는 양은 하루에 십오 밀리그램이다.

알프라졸람. 진정 및 안정 효과로 우울증에 수반되는 불안 증상을 개선하는 항불안제.

인데놀. 심박독수와 심박출량을 감소시켜 혈압을 조절하는 부정맥용제.


몇 번째 먹는 약인지 이젠 셀 수도 없어. 쓴 맛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러나 약이 흡수되면 머지않아 망각되겠지. 기억을 옅게 만드는 약이니까.


강물의 물고기들이 버려지는 약들이 녹아든 물에 살면서 두려움을 잊어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미쳐가는 사람을 멈추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약들이 살아있는 다른 것들을 미치게 만든다. 미쳐가는 사람을 만든 그것들이 약을 만드는 것들이다. 순환되어서는 안 되는 순환. 나는 언제부터 갇히게 된 걸까. 언제부터 갇힐 운명에 놓인 걸까.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약을 먹는다고 말한다면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할까.

     이게 거짓말이 아닌 마지막 나쁜 말이었으면.

     생각한다.


이 년 전 여름으로부터.


집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다음 정류장까지 천천히 걸으면서 눈을 감아보았다. 어릴 적에는 자주 눈을 감고 걸었었는데. 그렇게 아무것도 안 보이는 앞을 보며 걷다가 갑자기 앞에 뭐가 있을까 두려워질 때가 내 스스로 내가 살아있음을 가장 절실하게 감각할 때라고 믿곤 했었다.

     눈을 감고 걸으면 절대로 볼 수 없을 것 같은 빛이 들어온다. 그러나 모두가 태어나기 전인 것처럼 몹시도 낯익은 빛이다. 그러다가 문득 태어날 때. 눈을 뜬다.

     내 안의 무언가가 다시 태어난다. 내가 손수 묻어버리기 전까지는 언제까지나 살아있을 무언가가.


이 년 전 여름으로부터.


추신.


자살에 성공한 사람들 외에는 그 무엇에 성공한 사람도 부럽지 않던 학창시절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우울을 죄다 주워 담아다가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몸을 내던지면 그것으로 더 바랄 것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때 우리는 모두 그랬다. 그들 모두를 증인으로 삼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안에 있던 무수히 많은 나는 언제나 그랬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너는 죽고 싶었던 적이 있냐는 말을 들은 건 열한 살의 봄이었다. 나보다 세 뼘은 더 키가 큰 그 아이의 얼굴에는 높은 나무의 나뭇잎들이 건들거리며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저 아이가 나랑 동갑이라는 게 순간 믿기지 않았다. 그 큰 키도 그 말도. 아직 우리에게 주어지기엔 너무 일러. 나는 내심 그렇게 생각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대신에 죽고 싶었던 적은 없지만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 같다고 대답했다. 앞부분만 거짓말이었다.

     그렇게 비로소 내 머릿속에는 그때까지는 차마 똑바로 자각하지도 못했던 죽음의 형태가 푸른 불꽃의 색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해 느끼는 이만큼의 무게는 내가 실제로 죽는 그 순간까지는 어떻게 해도 떠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학년이 바뀌면서 그 아이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졌지만 그런 건 내게 이미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바야흐로 인생에서 처음으로 갈망하는 것의 윤곽이 막연한 그늘을 벗어나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 너무 이르다느니 하는 안일한 예단은 집어치우기로 했다.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바라왔던 거잖아. 사라지고 싶다는 말과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의 중첩에 자리한 진실은 너무 뻔하니까. 단지 나는 지금까지는 그 아이와 같은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혹은 거짓말에 너무 길들여졌거나.

     죽고 싶었던 적이 있어. 실은 숨을 쉬는 모든 순간에 그렇게 생각해.

     나는 언젠가 그 아이를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꼭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비록 다시 그 아이를 만났을 때 그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얼굴이 아니라면 이미 질식했을 그 심장의 끄트머리에라도 그렇게 속삭여주고 싶었다.


어른들이 좋았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좋은 어른도 본받아야겠다는 결심이 들 만한 어른도 적어도 내 주변에는 없었다. 잠깐의 믿음의 끝은 결국엔 늘 배신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거짓말을 했고 때로는 거짓말만 했다. 그리고 매사 자신의 거짓말에 스스로 도취된 듯 뻔뻔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이죽거렸다. 마취약에 절여진 실험용 생쥐 같다고 종종 생각했다. 어쩌면 실제로도 그럴지도 모를 일이었다.

     햇병아리라고도 불리던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벗어나면서부터 나 역시도 본격적으로 어른들을 속이는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어른들도 아이들을 속이는 재미로 인생을 산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죄책감 따위는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아무리 까뒤집어 탈탈 털어봐도 도무지 행복했던 기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내 성장기를 통틀어 그나마 유일하게 숨을 쉴 만한 구멍은 고작 그런 것들뿐이었다. 기망과 기만. 받은 만큼 되갚아주겠다는 외톨이 나무병정의 싸움. 피노키오라는 이름을 저주하고 제페토에게 칼을 겨누라는 목표. 첫 시도는 학원에서 내준 숙제였다. 등원할 시간은 가까워오는데 도저히 숙제를 할 결단은 서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숙제가 있는 페이지 사이사이에 잘게 자른 육포를 골고루 뿌리고는 문제집을 덮어 내 강아지에게 던져주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는 바보 같은 개가 하필이면 숙제를 해야 할 바로 그 부분만 찢어먹어서 숙제를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거짓말을 들킬까봐서가 아니라 이 수법이 그렇게 자주 써먹을 만한 건 아닌 것 같아서 더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른들도 늘 마찬가지니까. 중요한 건 들키지 않는 거짓말이 아니라 여러 번 써먹을 수 있는 유용한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기회는 열한 살에 유치가 빠지기 시작하면서 찾아왔다. 친구에게서 자살을 향한 일념을 배운 그 봄의 같은 해였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거의 모든 신체 발달이 또래에 비해 더뎠지만 치아와 관련된 것만은 유독 심해서 그 나이가 되어서야 빠진 이를 처음 얻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건 갈수록 빈약해지던 내 거짓말의 클리셰를 보완해줄 소재로 써먹기에 더없이 충분했다. 타겟은 주로 영어 학원의 수업시간으로 설정되었다. 나는 살강살강 흔들리는 유치가 생기면 학교와 다른 과목의 학원에서는 어떻게든 그걸 보존했다가 영어에만 들어가면 주먹으로 뺨을 후려쳐서 이가 빠지게 만들었다. 영어를 싫어하는 감정을 가득 담아 세게 후려치면 이는 금방 잇몸에서 탈주해 시뻘건 피와 함께 손바닥에 안착하곤 했다. 그러면 곧장 선생님을 불러서 지금 갑자기 중차대한 부상을 당했으므로 지혈을 하고 와야 할 것 같다고 당당한 어조로 짐짓 협박과도 같은 동의를 구한다. 입안에서 침이랑 같이 핏물을 좀 머금고 있다가 선생님을 부르는 그 타이밍에 입술 사이로 흘려보내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처럼 연출하면 아무리 깐깐한 선생님이라도 어서 니가 원하는 대로 하라며 밖으로 내보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책상에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열댓 명의 아이들에게서 일제히 쏠리는 그 부러움의 시선을 한껏 만끽하며 부러 큰 소리로 교실의 문을 열고 나선다. 세상이 음소거되는 기분이란 이런 걸까. 그 문 너머에서 온갖 쓸모없고 시끄러운 소리들을 가득 숨기고 있는 교실들이 일렬로 늘어선 과묵한 복도를 천천히 거닐며 나는 양팔을 있는 힘껏 좌우로 뻗고는 덩실덩실 춤을 췄다.

     그것은 자유. 순전히 내 노력으로 얻은 실로 값진 자유였다. 그 복도가 아주 길게 길게 늘어져서 이대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마지막 유치가 빠지기 전까지라도.

     나는 그때까지 내 몸의 어느 부분도 딱히 대단하다고 느끼지 않았지만 유치를 남들보다 훨씬 오래 간직했다는 것에만큼은 어째서인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같다. 유치라는 말에는 어쩐지 생명의 원형과 연관된 무언가가 서려있는 것 같아 좋았다. 반면에 영구치라는 말은 한없이 슬펐다. 마치 영구히 지우지 못할 대죄를 뒤집어쓰고야 마는 것처럼. 어려서 죽지 못하고 어차피 어른이 되는 것처럼. 나무로 된 칼을 빼앗긴 채 차가운 금속 갑옷 속에서 실에 매달려 행진하는 그의 이름은 아직도 피노키오였다. 슬픔이 서글픔으로 진화할 때까지 끝내 코끝을 잘라내지 못한 불행한 제페토의 자식.


그다지도 불성실하고 의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태도에도 성적이 늘 좋았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만큼 절박함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언젠가부터 언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며 살다보니 세간의 평판 같은 것은 별로 의미가 없었다. 다만 날마다 얼굴을 보는 아이들에게 꿀리기는 싫었기 때문에 학교에서의 반 일 등만큼은 쉽게 내주지 않을 뿐이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얼굴이 친숙한 애가 나를 조롱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 참을 수가 없는 일이니까. 반면에 학원에 같이 다니는 애들과는 의도적으로 친해지지 않았고 낯을 익히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어쩌다가 내 성적을 건너 건너 듣고서는 토끼눈을 하고서 나를 찾아와 니가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게 맞냐고 묻는 아이들도 있었다. 맨날 자해공갈해서 수업 빠지는 너가 말이지. 그럴 때면 나는 가능한 눈앞에 있는 아이의 얼굴을 각막으로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공갈이 아니라 실제로 이가 빠지는 거라고 대답하곤 했다. 내 작고 연약한 유치가 영어가 그렇게 싫다는데 어쩌겠냐고. 그래도 중간 기말에는 백 점은 나온다고. 나는 그거면 된다고. 여기서 더 잘하고 싶다는 열망 따윈 추호도 없으니까.

     실제로 그랬다. 어른들은 내 성적표를 볼 때마다 어느 대학을 가겠다느니 어디 커트라인에는 들겠다느니 하는 별의별 망상들을 늘어놓기 바빴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목을 매달거나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상상을 하느라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줄 시간이 없었다. 우울증이라는 말은 이미 책에서 봐서 알고 있었지만 내 상황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아서 딱히 눈여겨보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딱히 엄청나게 불행한 일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숨 쉬는 모든 공기가 불행했고 해질녘이 되면 더는 친구들의 집에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이 불행했고 내가 아닌 내 성적만 보는 선생님들이 불행했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가 불행했고 나를 인형으로 아는 게 분명한 아버지가 불행했고 내가 죽으면 행복해질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의 존재가 아주 조금씩 불행했을 뿐이다. 그 미약한 불행들 역시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이러다가 어영부영 어른이 되어버리기 전에 그저 한시라도 빨리 죽고 싶었다.

     몇 년간의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그 굴곡의 도돌이표를 몇 번인가 왕복하는 사이 내게서 거짓말과 웃음의 구분은 점차 무의미해져 갔다. 다른 사람 앞에서 웃을 때면 얼굴 가죽 전체가 가면으로 굳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내 몸에 비해 너무 두껍고 거대한 알 속에 든 만들어지다가 만 불량품이었다. 아무리 두들겨봐도 그것은 깨뜨려지지 않는다. 코끝의 길이 따윈 더는 무의미해서 이제는 저주할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다. 차라리 누군가가 껍질에 작은 구멍을 뚫어서 그 사이로 물을 부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떠오른다는 게 뭔지도 모르는 채로 익사할 수 있도록.

     까르르륵. 내 목소리를 한 웃음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하나의 목숨이 세상과 작별할 때 나는 작은 파열음도 덩달아 섞여 들어온다. 까르르르륵. 살려주지 않아서 고맙다고 인사한다.

     그런데 대체 어째서야. 어째서 우리는 거짓말도 웃음도 없는 세상에서 살 수는 없는 거냐고.

     까드드득 이를 갈며 가면의 뒷면을 향해 비수를 살포하는 것은 코끝의 숨결. 이걸 봐. 아직은 다 잠기지 않았어.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여기로부터 벗어나서 그런 세상으로 갈 수 있다면 어쩌면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시끄럽지도 과묵하지도 않고 오직 고요한 진동의 소리만이 들리는 곳. 실은 알을 깨고 나아가고 싶다고 누구에게라도 고백할 수 있는 곳이 그 세상의 어디에라도 있다면. 어쩌면 멈추지 않고 가고 싶어질지도 모른다고.

     그런 말들을 거짓말인 양 찬란하게 치장해서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렸던 것도 같다. 단지 그런 시절일 뿐이었다.


지금 여기에 있고 싶지 않다고. 여기에 있기 싫다고. 제발 나가게 해달라고. 어디로든. 가게 해달라고. 자꾸만 살고 싶은데 그 말을 하는 방법을 몰라서 죽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 그런 아이들이 있었다. 자살에 성공한 사람들을 추종하면서도 실은 그렇게 되고 싶지만은 않았다. 단지 어른이 되어 내가 아는 그 어른들처럼 살 수가 없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아직도 끝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한 채 십수 년을 한결같이 날마다 숨을 참는 연습을 한다. 날마다 날마다. 비축된 목숨의 대척점이 늘어난다. 도달하려면 얼마나 멀었을까. 한숨 돌릴 만큼은 되는 것 같다.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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