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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제란 Jul 27. 2024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독후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작가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옮김 : 박찬기

출판사 : 민음사     


[1부: 스포 포함 X]

부끄럽게도 괴테의 작품을 처음 읽어봤다.

‘베르테르 효과’의 현상을 먼저 접했던 나는, 혹여나 내가 이 작품에서 접하게 되는 어떤 우울에 전염되어 슬픈 생각이 나면 어떡하지,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는, 괜한 걱정이었다.

실제로 당시 일어난 사건들은 몇 건에 불과했고, 신드롬, 효과를 붙일만큼 많은(수십 수백건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주인공 베르테르가 입었던 복장이 대히트를 쳐 패션의 판도를 바꿨다는 것,

괴테의 초상화가 그려진 찻잔 세트가 스페셜 굿즈로 팔렸다는 것,     

그 사실들은 이 작품이 당시 얼마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 지 증명해준다.     


이전 소설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대단하신 분들(신의 아들, 황자, 왕자, 어느 가문의 대단한 자녀 등)이었다면, 이 책은 오롯이 개인을 주인공으로 든 소설의 시작점이었다고 한다.

또 서간체 소설로 주인공의 마음이 어떻게, 어떤 혼란을 겪는 지 적나라하게 표현된 것 또한 귀족으로서 갖춰야 하는 절제, 가식에 질린 그 시대의 청년들의 마음을 울렸던 것 같다.(작품이 쓰여질 당시 독일은 합리적인 이성, 격한 형식, 절차 따지기 등이 사회에 만연했다.)     


비슷한 유형이 이미 많아진 지금, 소설 자체로 센세이션을 느끼긴 어려웠다. 다만, 읽으면서 고전 특유의 불편감, 답답함 없이 읽혀지는 걸 보면 여전히 세련된 소설임은 분명하다.     


안 읽어볼 이유가 없다!     


[2부: 스포 포함 O]

*책을 다 보신 분들만 읽기를 권장드립니다.*     



1.

[ “선생님이 쓰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영향을 받아 많은 젊은이들이 자살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난 그걸 쓰고 나서 슬픔에서 벗어났는데?”]     


누군가의 슬픔과 죽음은,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는가.     


베르테르 현상이 왜 일어났을까, 조심히 추측해보자면 베르테르의 감정이 독자에게 너무 고스란히 전해져서 그런 것 같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혼란, 자책의 감정은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젊은 청춘에게 큰 울림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베르테르의 죽음을, 나아가 자신의 죽음까지 이해하고 합리화하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선한 영혼을 가진 분들이시여

베르테르와 똑같은 충동을 느낀다면 그의 슬픔에서 위안을 얻으십시오”

베르테르 현상이 일어나자 괴테가 서문에 추가한 글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괴테는 따라하라고 쓴 소설은 아닐 것이다.

구태여 서문에 상기 문구를 추가했던 것은,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베르테르에게서 위안만 얻어가라는, 그게 가능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누군가의 죽음과도 같은 슬픔은 어떻게 다른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글로 풀어 그 누군가의 마음을(혹은 내 마음을) 활자로, 정리된 언어로 마주했을 때, 마음이란 결국 나의 것이며, 내가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감정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느 드라마에서 우울하거나 스트레스가 극심할 때 일기를 써보라고 하는 장면을 봤다.

나는 그 장면과 비슷한 결로 이해가 되었다.     


나는 아직 일기를 못쓴다. 글을 정리되게 쓰지도 못하고, 결국 일기에도 거짓말을 하게되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내가 일기에서조차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와 동화되어 다시금 이 빠지고 싶지 않은 감정에 빠지게 될까봐.     


언젠가 나도 나의 상처, 감정을 직시할 수 있을 때, 글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한다.     



2.

“첫인상은 우리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다. 인간은 원래 어떤 신기한 일이라도 쉽게 곧이듣게끔 만들어져있다. 그러나 일단 곧이듣고 믿게 되기만 하면 단단히 달라붙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법이다. 그것을 다시 지우거나 말소시키려는 것은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실망할 때는 상대방이 내가 기대하지 않은 모습을 보였을 때다.

멋대로 상대방을 재단하는 나의 탓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소설 안에서는) 인간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니 뭔가 나 대신 합리화를 해준 기분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면, 내가 알고 있는 상대방의 데이터를 모아 그 사람을 임의로 정의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와 다른 점을 발견하고, 그게 불편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더 이상 피로한 관계를 이어가지 않는다. 그 말은 즉, 오래 만나 알고 지낸 사람보다 얕게 아는 사람이 더 많을 수 밖에 없다. 또 그 말은 즉, 내가 진정 아는 사람보다 첫인상에 가까운 이미지로 판단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고 물어보면, 그냥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내가 아는 누군가는 A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몇 번의 만남 후,

그 사람은 B, C의 성향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사람의 이미지는 데이터가 쌓일수록 여러 방향으로 가지를 뻗는다. 그렇게 어느날, 그 사람은 나의 세상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뿌리를 내린다, 더 이상 H의 성향을 봤을 때 그저 가지가 하나 더 생겨나는 것 뿐, 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는다.     



3.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이후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가 되었는지 모른다.”     


참 많이 공감되었던 말이다.     


누구나 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갖고 살아가야 세상의 풍파에 쉽게 흔들리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의 정체성을 내 속에서 찾아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많을까.     


특히 나는 타인에게서 나의 존재가치를 많이 느낀다.     


누군가의 관계에서, 조직의 구성으로써 내가 가치있고 의미있다고 느낄 때

나는 이것을 할 수 있는 사람.

나는 이걸 잘 하는 사람.

나는 이런 것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     


단계별로 나에 대해 알아간다.     


늘 스스로에게서 자신을 찾아내는 사람을 동경한다.

내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누군가에게 가치를 확인 받는 것이 좋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 받는 것

내가 인정받고 싶은 곳에서 인정받는 것     


아직 나는 그곳에서 행복을 느낀다.     


언젠가는,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찾아낼 수 있기를.     



4.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동시에 불행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과연 필연인 것일까?”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이 화내는 포인트를 보라고 했다.     


인생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반복이다, 인생 그래프는 일정하지 않고 늘 상승과 하락을 반복한다 등 어릴적부터 인내심을 길러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하는 말들을 수 없이 들었는데,

요즘은 ‘행복 총량의 법칙’ 이라는 말이 자주 눈에 띈다.     


사람이 평생동안 누릴 행복은 정해져 있다는 것, 그래서 내가 좋은 날 다음엔 나쁜 날이 올 수 밖에 없다는 것.


어떤 인플루언서는, 너무 행복할 때 ‘나에게 또 얼마나 큰 아픔을 주시려고 이렇게 행복하게 해주는 건가’ 오히려 겁이 난다고 한다.     


조금 돌아왔는데, 그만큼 누구나 행복의 반동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그러니 손에 쥔 것둘을 그리 쉽사리 놓지 못하는 거겠지.     


무엇으로 인해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인한 상실의 반동은 당연스레 따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 오는 시련을 막을 수는 없다.

그저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해 행복해하고, 극복해나갈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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