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찌 Dec 19. 2023

크리스마스와 빛

x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으며

취리히 시내의 크리스마스 조명


크리스마스를 5일 남겨두고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다.


어렸을 때부터 무수히 겪어왔던 크리스마스에 얽힌 기억들. 이브 저녁에 집에서 자체로 내준 숙제로 독후감을 쓰고 일주일에 한 번 대청소하는 날이라 이브에 일을 하는 게 불만이었던 기억. 12월 내내 서있던 트리 밑에 수북이 쌓인 선물들을 25일 아침에 열어볼 생각에 들떴던 기억. 25일 아침, 밖은 새하얗고 고요한 와중에 아침잠 없는 동생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로 달려가던 소리. 새로 생긴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으면 부엌에서 풍겨오던 맛있는 냄새. 오후엔 온몸을 꽁꽁 싸매고 집 뒤 눈 쌓인 동산에 올라가 눈썰매를 타고 또 탔던 기억.


조금 커서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트리 없는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책상 위에 조그마한 트리를 올리고 네 개의 대림절 촛불을 켜던 기억. 12월의 매 주일마다 하나씩 켜고 불빛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좋았다.

둘이 된 지금도 트리는 없지만 12월이 되면 저녁에 향초를 켜놓고 카드게임을 하곤 한다.


내년 이맘때쯤엔 무얼 하고 있을까,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나는 지금보다 더 행복할까?

그보다 먼저 올해 크리스마스는 어떤 마음으로 보내야 할까.


예수가 태어난 베들레헴에서는 올해 크리스마스를 쇠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현 팔레스타인 땅에서 태어난 예수. 아마도 어두운 피부를 가지고 부모님이 살던 땅이 아닌 낯선 베들레헴이라는 동네에서 얼떨결에 태어나버렸을 예수. 태어나자마자 죽을 위험에 처해 더 멀리 이집트로 피난 가야 했던 예수.


그 옛날엔 로마의 식민지배를 당하며 핍박받고 어린이들이 죽임 당했다면 지금은 이스라엘군이라는 이름의 지배자가 팔레스타인의 어린아이들을 죽이고 있다.

예수가 올해 가자에서 태어났다면 어쩌면 건물 잔해에 깔려 벌써 하늘의 별이 됐을 수도 있겠지.


내가 사는 이곳에선, 예수의 고향에서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관심도 없다.

크리스마스가 한 해 최대 명절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조차 그렇다.

그들만의 축제. 그들을 위해 있는 축제.


트리만큼이나 유럽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다면 조명이다. 집 안과 밖, 길, 가로등 할 것 없이 모든 곳에 조명을 설치해 반짝반짝 빛나게 한다. 나는 특히 매년 취리히 시내에 설치되는 조명을 좋아하는데, 걸어가다 예뻐서 멈춰 서서 구경한 적이 많다. 마치 하늘에서 별빛이 수없이 내려와 바삐 걷는 사람들 머리 위에 앉는 느낌이다.


어둡고 춥고 바쁜 11월과 12월에 따뜻한 촛불과 조명은 큰 위로가 된다. 빛은 서양명절이 된 크리스마스에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예수가 태어난 시기는 아마 이맘때는 아니었을 거고 그렇다 해도 중동과 서유럽은 기후와 역사가 다르니까, 크리스마스 문화가 서로 다르게 발전해 자리 잡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그맣고 평범한 인간아기로 태어난 예수가 온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었다면

그의 고향땅에서 그동안 허무하게 져버린 어린 생명들 안에서 얼마나 많은 빛이 모습을 감추었을까?

그들의 미래는 없어져버렸고 내년 크리스마스엔 무얼 하고 있을까 무슨 선물을 받을까 하는 질문 자체가 의미 없어져버렸다.


예수가 온 세상의 빛, 구세주로 온 게 중동의 작은 마을 마구간 안이었다는 사실이 올해는 이렇게 특별히 다가온다.


올 크리스마스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크리스마스와도 다를 것 같다. 적어도 기쁘거나 설레지 않을 것 같다.

별이 된 모든 아이들을 추모하고, 그들의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고, 머지않은 날 밝은 해방의 빛이 그들의 머리 위에 비추기를 기원한다.


Kyrie eleison, Lord have mercy.


작가의 이전글 아이 Yes or No (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