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글할매의 행복한 역이민 생활
지난 달에 독감 예방주사를 우리 집 양반하고 같이 맞고 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내가 먼저 독감이 심하게 오고, 남편은 나한테 옮았다.
그래도 그나마 예방주사를 맞아서 약하게 온 거라고 의사 선생님께서 설명을 하시는데, 약한 것이 이토록 아픈 것이면, 제대로 걸리면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다.
이래서 노인들이 독감이 걸리면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고 있다.
팔십대에, 처음으로 감기 몸살을 앓아본 우리 집 양반 역시,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만큼 끔찍히도 아픈 이번의 독감에, 그저 할 말을 잃는다.
늘 감기를 달고 사는 나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평생 감기 한 번 안 걸리는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다니던 우리 집 양반도, 이번 독감을 못 피해가는 것을 보고는,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나이가 들었나보다라는 생각에 괜히 또 짠해진다.
한 열흘을 독감으로 인해 입 맛이 떨어져서,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이것 저것 만들어보아도, 입안이 껄껄해서 도저히 넘어가지를 않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은 ‘남이 해 주는 밥’이란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늘 남한테 밥 하나만큼은 많이도 베풀고 살았는데, 막상 내가 아플 때는 누구 하나 와서 밥 차려주는 사람이 없다.
이럴 때 서러운 것이다.
바라지도 않았지만 내 몸이 아프다보니, 평소와는 다르게 섭섭함이 밀려온다.
잘 먹어야 병도 빨리 낫는 법인데, 이런 상황에서도 아픈 사람 데리고, 집에서만 먹겠다고 고집부리는 우리 삼식이 아저씨가 정말 미워 죽겠다.
안되겠다 싶어서, 오늘은 큰 맘 먹고 남편 설득에 들어갔다. 아내가 기운을 차리고 딱 제 자리를 버티고 있어줘야, 그 집안이 비로소 평안해 지는 것이라고, 일장 연설을 했다.
웬일로 한참을 아무 소리 안하고 듣고만 있던 남편이 하는 말이, 참 가관이다.
집안의 평안하고, 먹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에, 나 역시 그만 할 말을 잃는다.
할 수 없이, 드럽고 치사하지만 사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워낙 죽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서귀포에 있는 성미가든에서 맨 마지막에 나오는 녹두죽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먹어보기전에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를 못하는 맛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만큼은 이 녹두죽을 먹어야만 내가 살아날 것 같으니까, 제발 나 좀 데리고 가 달라고 통 사정을 했더니, 무슨 동냥이라도 하듯이 알았다고, 가잖다.
모로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고, 나 역시 아무리 치사하게 얻은 기회이지만, 성미가든에 가서 이 맛있는 녹두죽만 먹을 수 있다면 만사 오케이 인 것이다.
우리 집에서 조금만 가까웠어도 아마 자주 갔을 것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애월에서는, 교래리에 있는 이 성미가든까지 무려 한 시간이나 걸린다.
드라이브를 즐기는 우리 남편은, 먹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늘 이 곳을 스쳐 지나가기만 하고, 근처의 드라이브 코스만 부지런히 다녔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하고 오랫동안 남는 추억거리는 바로 먹는 것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는 나는, 남편하고 드라이브를 다닐 때, 비록 그 순간에는 들릴 수가 없어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하고라도 이 곳을 찾을 지도 모른다는 소박한 희망으로, 늘 두 눈을 부릎뜨고 근처의 맛집을 스캔한다.
어쨌거나 아픈 허리를 달래가면서, 드디어 성미가든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입구의 작은 주차장이 전부였었는데, 그동안 장사가 얼마나 잘 됐으면 주차장을 상당히 넗힌 것 같다.
식당 입구로 걸어가면서, 남편을 설득했다는 자부심과 함께, 오늘의 꿈을 달성했다는 뿌듯함에, 먹기도 전부터 감격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닭 샤브샤브랑 백숙에 더 관심이 있지만,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이런 것들을 다 먹고 난 다음에 나오는 ‘녹두죽’에만 있다.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닭 샤브인데, 닭 가슴살을 얼마나 얇게 져미었는지, 닭의 속 살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이다.
원래부터 샤브샤브를 좋아하는 나는, 샤브라면 질색을 하는 남편을 만난 덕분에, 평소에 즐겨먹지를 못한다.
양념 되어있는 맛있는 고기들을 놔두고, 왜 하필 물에 씻어서 먹는 그 맛없는 것을, 나보고 먹으란다고 하면서 신경질부터 부리는 신랑인지라, 둘이서 나란히 샤브 집을 방문하는 것은 일찌감치 꿈을 접었다.
다행히 이곳 성미가든에서는 메인인 백숙이 나오기 전에, 그다지 많지 않은 양의 닭가슴살 샤브가 나와서 나한테는 안성 맞춤이다.
노인이 될수록 단백질을 더 챙겨먹으라고 해서, 평소에 나름대로 식단을 단백질 위주로 만들기는 했지만, 이런 샤브샤브나 백숙같은 것은, 집에서 쉽게 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가끔 한 번씩은 바람도 쐴겸 나가서 사 먹는 것이 훨씬 편하다.
문제는 우리 집 삼식이 아저씨가 외식을 안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하느님이 도우셨는지, 웬일로 이 먼 곳까지 와서 나의 소원을 들어준다. 이래서 부부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사이인가 보다.
밉다가도, 풀어지고, 그러다가 또 불쌍해서 봐주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서로 늙어가는 모습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난 소원을 풀었다.
이런 기회가 언제 또 나를 찾아올 지 모르는 것이기에, 이번 감기 몸살에 아직도 입맛을 찾지 못했지만, 지금 난 또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먹고 또 먹는다.
샤브가 끝나면, 우리 집 양반이 그나마 맛있다고 잘 먹는 백숙이 나온다.
그냥 일반 닭이 아니라, 토종닭이다.
우리 집 양반 설명에 의하면, 토종닭은 일반 닭보다 천천히 자라기 때문에, 씹을 수록 더욱 더 감칠 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난 오히려 약간 질긴 것 같아서 부드러운 일반 닭이 나은 것 같은데, 먹을 줄 아는 사람들은 반드시 토종닭 전문집을 찾아 다닌단다.
녹두를 집어넣고 푹 고아낸 백숙의 맛이 일품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집인데, 둘 다 지독한 몸살로 입 맛을 잃어서 생각만큼은 많이 먹지를 못했다.
대망의 녹두죽이 나왔다.
이 녹두죽 한 그릇을 먹기 위해서, 아침부터 난 그토록 울어댔나보다.
일반 죽 집에서 파는 녹두죽하고는 비쥬얼부터가 다르다.
껍질을 제거하지 않은 조금은 투박해 보이고 시골스러운 느낌이 나지만, 맛 하나만큼은 정말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이 있다.
아무리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이라도, 이곳의 녹두죽만큼은 진정 별미라고 너나나나 할 것 없이 좋아한다.
그래서 난 이곳의 녹두죽 한 그릇을 먹기위해 기꺼이 닭 한 마리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곁들여 나오는 갓김치와 배추김치, 그리고 깍두기의 맛 또한 나무랄 것이 없다.
요즘은 어딜가나 지나치게 건강들을 생각해서인지, 어떤 곳은 김치마저 너무 싱거워서 맛이 없는데, 이곳 성미가든의 김치는 제대로 짠 맛도 살리고, 걸죽한 양념맛도 살려서, 모처럼 고향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참 맛이다.
아무리 건강이 중요하더라도, 어쩌다 한 번씩 찾아가는 그 지역만의 특색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건강 생각하지 않고 제대로 옛날 맛을 살린 그런 음식이 그립다.
어쩌다 한 번 맵고 짜게 먹었다고, 앞으로 남은 인생에 큰 지장은 없는 것이다.
그저 생각날 때 맛있게만 먹을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보약인 것이다.
어쨌거나 너무 잘 먹었다.
이렇게 먹고 싶은 음식을 원없이 먹고나면, 아무리 지독한 몸살이라도 떨어져나가기 마련이다.
틀림없이 오늘부터는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것이다.
감기 몸살로 이렇게 일주일 이상을 드러 누워보기도 처음이다. 아무리 아파도 하루를 넘기지를 않고 할 일은 하면서 앓았었는데, 이번에는 영 기운을 차릴 수가 없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노쇠라는 달갑지 않은 병이 찾아왔기 때문인 것도 같다.
노쇠야, 물렀거라!
몸살아, 물렀거라!
업글할매 가는 길에 제발 재만 뿌리지 말아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