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끝

다정함이 칼날이 될 때

by 기록습관쟁이

요즘 SNS를 넘겨보다 보면 마음이 서글퍼질 때가 있습니다. '착하면 호구된다', '이기적인 사람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들이 마치 불변의 진리처럼 떠돌더라고요. 그 말들 틈에서 상처받고 있을 수많은 다정한 사람들을 위해 이 글을 썼습니다.


현장에서 20년 가까이 땀을 흘리며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은 선과 악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본질을 꿰뚫는 현명함을 가졌느냐 아니냐로 나뉜다는 겁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사실 영악한 게 아니라, 기록하고 대비하는 게 귀찮아 남의 걸 훔치려는 게으른 사람들일 뿐입니다.


당신이 한없이 착해도 괜찮습니다. 가끔 바보 같다는 소리를 들어도 좋습니다. 다만, 그 다정함이 휘둘리지 않도록 현명함이라는 무기를 장착하세요. 지혜를 가진 당신의 선함은 누구도 함부로 담을 수 없는 거대한 그릇이 되어서, 결국 세상 모든 흐름을 그 안에 품게 될 거라 확신합니다.


오늘도 현장에서, 혹은 일상에서 묵묵히 자신의 선(線)을 긋고 있을 모든 다정한 동료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부산 신항 가덕도 인근, 바다와 맞닿은 통신실 공기는 점액질처럼 끈적였다. 8월의 태양은 컨테이너를 집어삼킬 듯 내리쬐었고, 그 열기를 고스란히 머금은 통신실 안은 기계들이 내뿜는 기계음과 팬 돌아가는 소리로 가득 찼다.


7년 차 엔지니어 김 대리는 랙(Rack, 통신 장비 거치대) 뒤편의 좁은 틈새에 몸을 구겨 넣은 채 땀을 흘리고 있었다. 입에 물고 있는 손전등 빛이 어지럽게 널린 광케이블들을 비췄다. 손톱보다 얇은 유리 섬유들이 수만 가닥 엉켜 있는 이곳은, 까딱 잘못 건드렸다간 항만의 모든 데이터가 마비되는 예민한 곳이었다.


"아이, X발... 이걸 이렇게 억지로 쑤셔 박아놨으니 선이 꺾이지."


김 대리가 읇조리며 땀을 훔쳤다. 옆에서 휴대폰으로 주식 창을 들여다보던 박 팀장이 귀찮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는 에어컨 바람이 잘 드는 곳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있었다.


"야, 김 대리. 적당히 해, 적당히. 어차피 뚜껑 닫으면 아무도 몰라. 네가 그렇게 미련하게 선 하나하나 다 만지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널 만만하게 보는 거라고. 요즘 스레드나 이런 데 안 보냐? 착하면 호구되는 거야. 이기적인 놈들이 결국 에어컨 밑에서 편하게 사는 거라고, 인마."


박 팀장은 소위 정치질의 달인이었다. 그는 실무 지식보다는 윗사람 비위 맞추기와 사고 터졌을 때 아랫사람에게 덤터기 씌우는 기술로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김 대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꺾여 있는 케이블의 외피에 적혀 있는 고유번호를 수첩에 묵묵히 기록했다. 대답할 기운조차 아까운, 습도 90%의 지옥 같은 오후였다.


재앙은 다음 날 오전에 찾아왔다. 항만의 거대한 크레인들이 멈춰 섰다. 배에 실린 컨테이너를 내리지 못하면 분당 수천만 원의 위약금이 발생한다. 원청인 항만 운영사의 이 팀장이 눈이 뒤집혀 현장으로 들이닥쳤다.


"박 팀장님! 어제 분명히 최종 점검 끝났다고 사인하셨잖아요! 지금 크레인 제어 신호가 아예 안 잡힌다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비상 연락을 받고 달려온 박 팀장은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특유의 미꾸라지 화법을 가동했다. 그는 습관적으로 김 대리를 쳐다봤다.


"아이고, 이 팀장님. 제가 분명히 어제 김 대리한테 그 구간 꼼꼼히 보라고 몇 번을 강조했거든요. 근데 이 친구가 워낙 착해 빠져서... 다른 부서 애들 도와준답시고 돌아다니다가 정작 자기 할 일을 설렁설렁했나 봅니다. 야, 김 대리! 너 어제 이거 내가 확인하라고 한 거 맞아, 아니야?"


현장에 모인 엔지니어들과 원청 직원들의 시선이 김 대리에게 꽂혔다. 그 시선들 속에는 '역시 박 팀장이다', '김 대리도 이번에 제대로 걸렸네' 하는 동정과 냉소가 섞여 있었다. 박 팀장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번에도 김 대리에게 모든 책임을 밀어 넣으면, 자신은 부하 직원의 실수를 수습하는 유능한 상사가 될 수 있었다.


그 비릿한 미소를 보는 순간, 김 대리의 머릿속에 5년 전의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첫 사수였던 정 과장. 그는 지독하게 성실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당시 차장이었던 박 팀장은 정 과장을 가스라이팅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자네만 믿네", "이거 잘되면 내가 승진 밀어줄게"라는 사탕발림으로 정 과장의 개인 시간까지 착취했다. 정 과장은 박 팀장의 지시대로 온갖 궂은일을 다 해냈지만, 결국 박 팀장이 비용을 아끼려고 무리하게 지시한 부실 공사가 터졌을 때 모든 화살은 정 과장에게 향했다.


"제가 지시한 적 없는 일입니다. 정 과장이 독단적으로 처리한 거예요."


그 한마디에 정 과장은 10년 넘게 몸담은 회사를 자진 사퇴 형식으로 쫓겨나듯 떠났다. 짐을 싸던 정 과장의 떨리던 손과, 마지막 술자리에서 "김 대리,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착한 게 능사가 아니더라"라며 눈물을 쏟던 그 뒷모습. 김 대리는 사원 시절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현명함이 없는 다정함은 곧 독약임을 뼈저리게 배웠다.


박 팀장은 지금, 5년 전 정 과장에게 썼던 그 칼을 다시 꺼내 김 대리의 목에 대고 있었다.


하지만 김 대리는 정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당황하지도, 억울해하지도 않았다. 그는 천천히 작업 가방에서 태블릿 PC와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냈다.


"팀장님, 어제 제가 다른 부서 일 도와준 거 맞습니다. 팀장님이 협력업체 사장님 골프 접대 가야 하니까 대신 좀 봐줘라고 지시하셨잖아요. 여기 업무 대행 지시 기록 다 있습니다."


박 팀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무슨... 내가 언제!"


"그리고 지금 문제 된 구간 말입니다. 제가 어제 노후된 케이블 교체해야 한다고 세 번이나 말씀드렸죠? 그때 팀장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공기 단축해서 회식비나 챙기자, 대충 테이핑 하고 넘어가라'라고 하셨던 거. 여기 통신실 안 CCTV 카메라에 음성 녹음되어 있습니다. 이 팀장님, 한번 보시겠습니까?"


현장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김 대리는 박 팀장이 편하게 살기 위해 던진 무책임한 지시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해두고 있었다. 착하게 웃으며 박 팀장의 지시를 따랐던 건, 그를 믿어서가 아니었다. 언젠가 그가 들이밀 칼날에 대비해 성벽을 쌓고 있었던 거다.


김 대리는 멍하니 서 있는 박 팀장을 지나쳐 서버 랙 앞으로 다가갔다.


"이 팀장님, 이거 10분이면 복구합니다. 박 팀장님이 돈 아깝다고 교체하지 말라던 그 노후 부품, 혹시 몰라 제가 어제 미리 챙겨뒀거든요. 지금 바로 갈아 끼우겠습니다."


김 대리의 손은 정밀하고 빨랐다. 단순히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문제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완벽하게 장악한 자의 움직임이었다. 10분 뒤, 멈췄던 항만의 전광판에 다시 파란 불이 들어왔다.


사태가 수습되자, 원청 팀장은 박 팀장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김 대리의 손을 잡았다. 박 팀장은 입만 뻥긋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박 팀장이 김 대리의 팔을 붙잡았다.


"야, 김 대리. 너 이 새끼... 너 나 감시했냐? 네가 그러고도 나랑 한 팀이야? 네가 그러고도 착한 놈이냐고!"


김 대리는 박 팀장의 손을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뿌리쳤다.


"팀장님, 제가 착한 건 맞는데요. 멍청한 건 아니거든요. 팀장님이 이기적으로 사는 게 편하다고 하셨죠? 아뇨, 팀장님은 그냥 게으른 거예요. 남의 공을 뺏는 게 편하니까, 기록을 남기는 게 귀찮으니까 남을 이용하신 거죠. 근데 그 게으름이 진짜 현명한 사람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습니까?"


김 대리는 차갑게 식은 믹스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정 과장님은 팀장님을 믿어서 당한 게 아닙니다. 팀장님 같은 인간이 있을 거라는 걸 대비할 만큼 지독하지 못했을 뿐이죠. 전 정 과장님한테 배운 게 많거든요. 특히, 팀장님 같은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요."


박 팀장은 본사 감사팀의 호출을 받고 현장에서 쫓겨나듯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제 김 대리를 보며 수군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지나갈 때마다 묘한 경외심 섞인 인사를 건넸다.


퇴근길, 김 대리는 자신의 낡은 트럭에 몸을 실었다. 창문을 내리자 부산항의 짠 내 섞인 밤바람이 들어왔다. 5년 전 정 과장이 떠나던 날처럼 노을은 여전히 붉었지만, 오늘 김 대리의 시야는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세상은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나뉘는 게 아니었다. 현명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뉠 뿐이었다. 착함은 그 자체로 무기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착함이 현명함이라는 칼날을 장착했을 때, 그건 세상 그 어떤 이기심보다도 단단하고 거대한 그릇이 된다.


김 대리는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그는 내일도 현장에 나갈 것이다. 여전히 누구보다 먼저 땀을 흘리고 남의 어려움을 도울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이용하려 들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제 자신의 다정함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예리한 무기를 가진 사람이 되었으니까.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어두운 해안 도로를 길게 비췄다. 김 대리는 비로소 정 과장의 망령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선(線)을 긋기 시작했다.




착해서 힘들게 사는 게 아니라, 현명하지 못해서 당하는 겁니다. 이기적인 그들의 게으름에 휘둘리지 않을 당신의 다정함을 응원합니다.


**이 글은 착할 선(善)으로 시작해서, 자신만의 선(線)을 긋는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라고 이해하시면 글을 읽는 맛이 더 깊어질 것 같습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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