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1: 농인과 청인의 세상을 잇는 수어 통역사, 장진석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다양한 일과 삶의 이야기를 글과 영상을 통해
세상에 전달하는 인터뷰팀 ONF입니다.
한 사람의 ON과 OFF를 함께 조명하며
그 고유한 이야기를 더욱 입체적으로 담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 ONF의 의미이자 목적입니다.
ON: 직업, 일. 사회적 시선에 노출되는 대외적인 모습의 ‘나’
OFF: 일을 제외한 일상, 휴식, 다소 꾸밈이 없고 자연스러운 모습의 ‘나’
“우리가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 미세한 마음의 떨림과 인간적 교류는 결국 세상을 향해 보내는 신호입니다”라는 책의 한 구절을 참 좋아한다.
퇴근길 반쯤 기울어져 나를 비추는 노을빛이 유달리 따뜻하게 느껴지는 날.
나를 가로지르는 시원한 공기를 온몸으로 받고 싶은 날.
이럴 때, 삶에서 견디기 버거운 것들을 손님처럼 맞이할 힘이 생기며, 지금 이 순간을 삶 속으로 확 끌어당길 수 있게 된다.
수어 통역사 장진석 님의 모습도 이와 비슷했다.
본인의 일에 대해 설명을 쏟아내는 모습이 마치 오랜 내공의 장인 같았고, 나도 모르는 사이 그의 손님이 된 듯 나는 이 대화 속에 숨어있는 환대를 누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인생에 초대된 것이다.
이 대화를 통해 여러분들에게도 그의 기쁨이 전해지길 바라며, 그가 묻는 안녕에 반응할 수 있길 기대한다.
안녕하세요, 진석 님. ONF 독자분들을 위한 인사와 간단한 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저는 수어 통역사로 일 한지 20년 쯤되니 통역사 장진석입니다. 지금은 수어통역 협동조합을 만들어 열심히 통역의 기회를 늘리고, 농인들에게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아직 좋은 서비스는 못 제공하고 있지만요.
미생물학과를 졸업하셨더라고요. 그 당시 주변에 농인이 있으셨던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수어 통역을 하면서 살아야겠다, 마음먹은 순간이 있나요? 아니면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선택하게 되셨나요.
어느 날 TV에 나오는 학교 선배님이 통역하시는 모습을 보고 적어도 먹고살 수는 있겠다, 싶어서 수어통역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엄청난 열정이 생겨서 수어 통역사의 길을 걷게 된 거냐, 물으시는 분들이 종종 있는데, 사실 아니에요. 학교 다닐 때 공부를 하기 싫어했거든요. 공부 되게 못했어요. 공부가 하기 싫어서 수업도 땡땡이치고, 다른 걸 하기 시작한 거죠. 그렇게 접하게 된 수어를 배우러 그 당시 전국에서 유일하게 존재했던 청각장애인 복지관인 청음회관에 가기 위해 용인에서 서울로 왕래하고 그랬어요.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수어 통역사로 지내고 있네요.
대학생 때 수차례 진행한 수어 공연이 어느 순간 부끄럽게 느껴지신 적이 있다고요. 어떤 깨달음으로 기존의 편견 된 생각에서 탈각하실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 경험이 왜 기억에 남으시나요?
공식적으로 수어를 처음 배운 건 복지관이 맞지만, 그전엔 학교에서 배웠어요. 학교 선배가 복지관에서 가서 교육받고 온 초급, 중급 수어를 저희한테 가르쳐주곤 했죠. 대학생 때 한국어 가사에 수어 단어를 쪼르르 붙여 수어 공연을 진행했습니다.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는데, 그때 모금한 돈으로 소망재활원이라는 곳에서 나들이 갈 비용을 댈 수 있었어요. 이땐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이 수어의 전부인 줄 알았네요. 하하하.
이 믿음이 깨진 건 조금 지나서였습니다. 먼저, 수화통역사 시험 제도가 생기고, 공부를 하다 보니 노래로 전달하는 수어에 정말 잘못된 것이 많구나, 하는 걸 깨달았고요. 또, 제가 수화통역사 자격증을 따고 한참 일을 하면서 이상하게 농인분들 중 저의 수어를 못 알아듣겠다고 표현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거예요. 긴 문장을 전달하거나 화자가 발화할 때 행간을 읽어야 하는 경우 제대로 전달이 안 됐나 봐요. 이런 경험들을 하면서 관념이 깨진 거죠.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전부가 아닐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던 중, 저의 사부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을 통해 본의 아니게 농인 구락부에서 제가 사용하는 수어를 많이 수정받을 수 있었어요. 방식은 간단했어요. “그냥 가만히 있어라. 일단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눈으로 보기만 해라.”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구락부는 클럽의 일본식 표현입니다. 한 때 변질된 일부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지탄을 받은 적도 있지만, 농인 사회 내에서 이 구락부는 농인들을 이어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요.
자의이든 타의이든, 이렇게 청년 장진석은 사부님이 운영하시는 농인 구락부를 통해 새로운 세상에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좋은 멘토를 만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 같으신가요? 사부님을 만나 뵙고 어떤 소중한 경험들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별말씀 안 하셔도 편한 느낌을 주신 분이에요.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대신해 서울의 아버지 같은 역할도 해주셨고요. 사부님은 제게 수어 선배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부분을 만들어가는 데 많이 영감이 되는 분이셨어요. 무엇보다 저에게 “너, 여기 떠나지 말고 있어”라고 하셨거든요. 제가 있어봤자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는데, 그냥 있으래요. 제가 되게 맘에 드셨나 봐요, 따져보면 별로 잘해드린 게 없는 것 같은 데도요. 워낙 섞이기 쉽지 않은 농인 사회인데, 왠지 든든한 백이 생긴 것 같았어요. 그렇게 많은 파도를 대신 맞아주셨죠. 알게 모르게 사부님 친구셨던 할머니, 할아버지 농인 분들이 제 백이 돼 주시기도 하셨고요.
커리어 초기에 현장에서 통역을 하면 엄청 떨렸는데, 관중 속에 앉아계신 사부님의 친구 한 분 한 분 덕분에 떨리는 마음이 좀 가라앉기도 하고, 연사의 좋은 말씀을 전하고 난 후 농인들이 수어로 전하는 박수는 뜨거운 감동이었어요. 정말 황홀합니다. 그건 경험하시지 않은 분들은 절대 모르실 거예요.
(수어로 어떻게 박수를 표현할까요? ft. 29분 55초)
수어통역협동조합을 만드셨어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단체인가요?
수어 통역사들이 자격증을 취득한 이후 수어통역센터에 들어가지 않는 한, 일을 구하기가 여간 쉽지 않습니다. 그런 날들이 지속되다 보면, 일을 점점 찾기가 힘들어지죠. 반대로, 수어 통역이 필요한 장소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농인분들이 병원에 가시거나, 구청에 민원을 보러 가실 때, 그리고 학원에서 수업을 들으러 갈 때가 대표적인 예시예요. 학원에서 수어통역을 제공하기엔 제약이 많죠. 배우고자 하는 농인 분들 입장에선 얼마나 답답하시겠어요. 이런 연유로, 더 많은 인원이 이런 곳들에 파견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어 통역사들에게는 일이 들어오지 않고, 농인들은 수어 통역사를 구하기 힘든 악순환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이었어요. 안 그래도 저와 일부 다른 통역사들이 일이 상대적으로 많아 다른 통역사들에게 나눠주고 있는 중이었고, 한 지인이 조합을 만들어보는 것이 어떻겠냐, 싶어 협동조합을 무작정 만들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말씀드릴게요. 일단, 제가 가지고 오는 일감을 협동조합 내 통역사들 사이에서 나눕니다. 통역을 하고 받은 금액 중 15%의 수수료를 떼갑니다. 이렇게 전입한 수수료를 가지고 통역을 꾸준히 받아야 하는 학원에 통역사를 보냅니다. 이러다 보니 아무래도 매번 적자가 나네요. 하하하. 이렇게라도 선순환이 유지된다면, 농인분들은 더욱 많은 분야에서 수어통역을 지원받을 수 있고, 통역사들을 더욱 지속적으로 일을 해나갈 수 있겠죠. 서로 윈윈이니까. 이게 저희 목적이에요.
수어 통역사는 대개 프리랜서로 일한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약 20년간 프리랜서로 일하시면서, 힘든 점이 분명히 있었을 것 같아요. 어떤 점이 가장 힘들게 느껴지셨나요?
아무래도 경제적인 부분이 가장 걱정이지 않았을까요? 저도 연봉 30만 원인 시절이 있었죠. 따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습니다. 비닐하우스 가서 파도 뽑고. 그 당시에는 통역비 지불에 기준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어요. 통역 건수당 3만 원 받을 때도 있고, 7만 원 받기도 하고 했죠. 2000년대 초중반에 건당 10만 원을 받았는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상황이 그다지 나아지지는 않았네요.
청인 사회에서도 시대가 바뀌면 새로운 언어가 생기 듯, 수어에서도 그럴 것 같아요. 새로운 언어들을 더욱 빨리 습득하기 위해 진석님께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계신가요?
신조어가 만들어지면, 청인 통역사들은 수어 단어를 먼저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농인 사회에서 해당 신조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관찰하고, 물어봐요. 이렇게 생겨난 새로운 수어들이 널리 사용되고, 농인 사회 내에서 공유되는 겁니다. 서울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부산에서도 똑같은 수어로 만들어지기도 해요. 농인 분들끼리 생각하는 방식이 서로 비슷하더라고요. 시각으로만 세상을 본다는 공통된 특성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수어 통역사가 청인들의 언어를 농인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다 보니 책임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진석님이 걸어오신 길에 대해 해 주신 말씀을 보면 ‘잘 해내야 한다’는 집요함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어떤 어려운 문제를 집중 공략하는 듯한 느낌도 들고요. 어떤 마음으로 수어 통역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유무죄가 달라질 수 있는 등 한 사람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수 있는 게 수어 통역이에요. 그래서 신중하게 진행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매번 통역사들에 동시통역이 요구된다는 점이 참 아쉬운 것 같아요.
저희에게는 발언 중지권이 있어야 해요. 어느 하루는 선거 공약에 대한 의견을 전달하는 농인 분의 수어를 천천히 보고 통역하려고 하던 중이었는데, 옆에서 “빨리빨리 하지 시간 없어 죽겠는데"라는 말이 나오더라고요. 순간 너무 당황했죠. 터무니없는 이유를 대면서 통역사가 교실에 함께하는 걸 허용하지 않는 교수님도 있었고요. 그 후, 남들이 뭐라 하든 간에 정확히 통역해야 한다는 신념이 생겼습니다. 저 같은 경우, 일부러 큰 소리로 말씀하신 의도가 맞는지 물어보고, 농인분의 수어를 정확히 확인하지 못했을 경우, 정확히 보고 말씀드리겠다고 전달드립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표현하니 사람들이 오히려 나무라지 못하더라고요.
요즘 세상에는 엉터리 배움이 많은 것 같아요. 무엇이 의미 있는 것인지 분별하기 위해서는 깨어있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 같고요.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혹은 어떻게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현장에 답이 있습니다. 본인이 그 상황에 뛰어들어야 해요. 언어를 배우고 싶으면 외국인을 만나야 하잖아요. 학원에서 아무리 배워도 만나서 대화를 해봐야 내가 배운 것들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요. 예전에는 어느 현장에서 소위 고수들을 찾아다니면서 배울 수 있었다면, 요즘은 주변에서 보고 듣는 것들이 워낙 많아서, 무엇이 맞는 말인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죠.
옛날에 통역 일을 하면서 장애인 영화제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 인도에서 오신 요리사 분에게 너무 말이 걸고 싶은 거예요. 저도 모르게 “Hi” 했는데, 그분이 막 영어로 말하기 시작하시더라고요. 손짓발짓 써가면서 대화를 여러 번 주고받다 보니, 아주 수월하진 않지만 제가 어느새 그 분과 대화를 하고 있더랍니다. 덕분에 뭐든 부딪히면 되나 보다, 생각하게 됐죠.
수어도 똑같아요. 농인분들과 자꾸 대화를 시도하다 보면, 내 수어가 먹히는지, 안 먹히는 지도 보이고, 무얼 고쳐야 할지까지 보이거든요. 부딪히려는 노력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디에나 방법은 있어요.
.
누구나 소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장애에 대해 편견을 갖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듯, 본인과 다른 사람들을 향해 무분별한 비판을 쏟아내는 소리들이 많아요. 함께 상생하기 위해, 마땅히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 본 바 있으신가요?
저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어서 부끄럽긴 하지만, 이렇게 말해볼게요. 다들 잘 몰라서 그래요.
통역사들 중에서도 농인들을 일반화하시는 분들도 있고, 농인들도 다른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있어요. 농인들 사이에서도 농인 퀴어 집단 등 다른 소수자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고요. 어딜 가든 똑같아요. 누구든지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죠. 다른 사람의 입장에 귀 기울이고, 충분히 공감하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가 더욱 여유를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공감을 시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것뿐이죠.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수를 하고, 매번 새로운 상황에 부딪히죠. 그땐 제 아무리 내 말이 옳아 보여도, 돌아서면 아닌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우리의 다듬어지지 못한 모습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줄곧 일기를 써왔습니다. 잡생각이 들 때 이전에 쓴 내용들을 둘러보기도 해요. 그럴 때마다 저 때의 나는 왜 저렇게 생각했을까, 하며 부끄러워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부끄러웠으니 됐다. 지금의 나는 부끄러움을 안다는 거잖아?’. 저를 돌아본 일주일간 저를 스쳐간 책 구절들을, 지인과 나눈 대화들을 활짝은 아닐지라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이니까요.
배움에 익숙해집시다. 나도 모르는 사이, 새로워진 나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조금 가벼운 질문을 드릴게요. 일적인 시간 외에는 보통 어떤 일을 하면서 보내시나요. 요즘 진석 님의 시선을 자꾸 빼앗는 것이 있다면요?
작년에는 여행을 많이 갔었어요. 여름엔 세 아이들 데리고 물놀이하기 좋은 데에 놀러 가죠. 요즘은 인터넷에 캠핑장, 풀빌라, 온천 등 싸고 좋은 곳이 많이 올라오더라고요. 간혹 출장을 가게 되면 잠깐 제 시간이 날 때가 있어요. 이럴 땐 드라마 보고, 제가 좋아하는 옛날 노래를 한참 들어요. 이문세 아저씨 노래요.
노래 듣다가 울적해져서, 혼자서 훌쩍거리기도 해요. 그러고 나면 좀 마음이 편해져요. 또 차 타고 이동하면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까, 혼자 운전하다 막 큰 소리로 노래도 부르기도 하고요. 노래하는 거 좋아하긴 하거든요. 실력과 상관없이. 하하하.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 본인의 삶을 앞으로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길 원하시나요.
진짜 어려운 질문인데요. 이건 저 말고 명사 분들에게 해야 되는 질문 아닌가요?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요, 그냥 제가 어떤 삶을 바라는지 얘기해 볼게요.
제가 원하는 삶이 있기는 한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는 사랑을 많이 받고 싶습니다. 특히 가족들에게요. 다행히도 가족들이 저를 많이 아껴줍니다. 이 사랑 덕에 제가 사람이 됐죠. 예전에는 제가 정말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았거든요. 살짝 성질도 괴팍했고.
아직 제가 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행복하고 싶다는 건 분명해요.
지금 당장 바라는 건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크고, 아이들이 조금 실수하더라도 별로 큰 소리 내지 않는 아빠가 되고 싶어요. 저도 그렇고, 누가 짜증 나게 하면 막 열이 오르잖아요. 위험한 거 아니면 별로 꾸짖지 않고 싶네요. 이렇게 살다 가면 좋지 않을까요? 제가 아직 철이 덜 들었나 보네요. 하하하. 여하튼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Editor's Note>
거짓된 배움, 올바르지 못한 충고가 넘쳐나 모두 혼란스러움을 겪는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난 누구보다도 착실하게, 본인에게 주어진 바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보면 경외하는 마음이 생긴다.
내가 본 진석님은, 마주한 어려움을 헤쳐나가며 본인의 신념을 삶으로 살아낸 사람이다.
그러한 그를 인터뷰할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는 것에 큰 기쁨을 느꼈다.
이 대화를 통해 선물 받은 ‘좋은 기분'이 세상의 고민들로 막혀있던 내 가슴을 뻥 뚫었으며, 그와의 대화로 데이터와 결괏값만으로 표현될 수 없는 더 깊은 세상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이 생겼다.
더 감사한 건, 세상에 좋은 기분을 전파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에게도 어떤 손님이 내 삶에 찾아올지 기대하는 설렘 가득한 마음이 유지되길 기대해 본다.
격주 목요일 오전 8시, ONF "시소레터"가 새롭게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구독 바로가기] https://maily.so/onf.interview
당신의 소중한 인생 역사 중 한 페이지를
진심을 다해 기록해 드립니다.
Editor : Kat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