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풍토끼 Dec 09. 2023

2019년 9월: 꿈은 오 년, 펜은 만 년

브랜드 모를 보라색 줄무늬 샤프펜슬. 샤프심은 B. 중학생 때부터 손에서 놓지 않았던 이 샤프는 학생 시기를 지나면서 점차 꺼내는 일이 줄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노트북을 꺼내 글을 빠르게 날려주는 것이 미덕인 직군에 있었고, 너무나 바쁘고 지쳐 자신을 돌아볼 시간조차 낼 수 없었던 햇병아리였으니까요. 집에서 나오고 이사를 다닐 때에도 필통은 항상 책상 위에 있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이나 샤프를 꺼내볼까 싶었습니다.


쓰이지 않는 것의 시간은 더디게 흘러갑니다. 손에 쥐지 않는 펜은 때도 타지 않고, 샤프심도 닳지 않은 채 필통 속에 잠겨 있습니다. 연약한 심줄을 몸통 안에 넣고, 혹시라도 부러질까 밖으로 내보내야 할 끄트머리조차 안으로, 안으로 눌러 넣습니다. 일기를 써볼까, 혹시라도 누가 들춰볼까 쓰다 말았고, 시를 써 볼까, 누구에게 보이기 부끄러워 찢어 버리고,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은 심지를 안은 채 어둠 속에서 홀로 침잠해 있었습니다. 


샤프는 아마도 옛 꿈을 꾸고 있었겠지요. 집을 나가 혼자서도 잘 사는 어른이 되리라. 술을 마시지 않아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도, 주위에서 전부 색색깔의 볼펜을 쓸 때 혼자 샤프를 쓰고 있어도 자기 일은 잘 해내는 어른이 되리라. 볼펜이 아니라도 괜찮고, 색깔이 없어도 괜찮은 미래를 바라면서, 눈물 자욱을 피해 다짐을 써 내려간 일기장의 꿈을 꾸고 있었겠지요. 


쓰이지 않은 꿈은 5년 만에 끝났습니다. 


갈수록 험악해지는 본가와 직장 환경은 저를 우울증과 공황, 범불안장애와 자살 충동으로 몰아세웠습니다. 계속 벼랑 끝에 서 있다간, 무릎 꿇는 순간 끝나겠구나, 깨닫고 가던 길을 포기했습니다. 제가 포기한 것은 단순한 직장과 직업이 아니라, 어떻게든 한 사람으로서 이 사회에서 살아보고자 했던, 한 인간으로서 쓰이고자 했던 꿈이었습니다. 목적을 잃은 채 덩그러니 있던 필통 같은 원룸에서, 조절되지 않은 우울증 약의 부작용, 모든 것이 불안하고 공황이 올까 무서워 나갈 수 없었던 마음이 합쳐져 '은둔형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열리지 않는 방에 담겨 멍하니 시간을 보내기를 일 년. 약이 어느 정도 몸에 맞게 조율되자 조금은 정신이 돌아오더군요. 무언가를 쓰고 싶었습니다. 쓰다 말았던 몇 년 전 일기장의 마지막 장을 펴고, 필통을 열었습니다. 묻어둔 그 샤프를 꺼내 그날의 날짜를 먼저 썼습니다. 


... 이게 'B'가 맞던가? 왜 이렇게 안 보이지?


언제까지나 그대로일 것이라 생각했던 제 눈은 이제 연필색조차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빠져 있었고, 오랫동안 펜을 쥐지 않은 손으로 쓴 글자는 잔뜩 웅크려 있어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힘을 주어 획을 여러 번 그으면 선이 진하게 되겠지만 모든 글자를 그렇게 칠하듯 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뒤로 되돌아간 끝에 학생 시절 썼던 그 샤프펜슬을 다시 손에 쥐었지만, 저 자신이 너무나 멀리 와 버렸습니다. 필통 속에서 더디 흐른 시간과 현실의 시간이 어긋나 흐려졌습니다. 단순하게, 모든 것을 그만두고 되돌아간다고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갇힌 마음과 생각 속에서 길을 잃고 빙글빙글 돌다 보면 때로는, 똑하고 부러지듯이 엉뚱한 심지가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이제 이런 글자조차 못 쓰고 못 읽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니! 하며 스스로를 걷어차고 걷어차이던 때에, '그럼 진한 펜을 쓰면 되지 뭐야!' 반발심이 들어 쇼핑 앱을 켜 버렸습니다. 다음날 만년필과 잉크 카트리지가 택배로 왔고, 밤새 잠 못 들던 외톨이는 자신의 세계에 오래된 새로움을 초대했습니다. 비록 현대에서 세 발짝 뒤떨어진 구식 펜이었지만, 그 정도의 느림이 딱 맞았습니다. 


의외로 샤프와 만년필은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심이 되는 부분은 자칫 손에 묻어나고, 항상 준비해야 하며, 한 때 열심히 쓰지만 더 이상 쓰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그렇습니다. 샤프의 후임으로 수성펜이 아니라 만년필을 선택한 것은, '더 이상 쓰이지 않음'에서 동질감을 느낀 것일지도 모릅니다. 학생 때 쓰던 샤프도, 만년필도, 손글씨도 제 꿈도 저라는 인간도 여기까지, 더 이상 쓰이지 않음. 흐리고 보이지 않고 엉망으로 변하고 낡아져 버렸기 때문에.


2019년 9월 7일, 토, 태풍. 택배 왔다.


퇴사 후 1년을 기약 없는 은둔형 외톨이로 보낸 뒤, 새롭게 손에 쥔 펜으로 쓴 그날의 짧은 일기는 여전히 잔뜩 웅크린 글씨체였지만, 눈에 잘 들어오는 진한 검은색 잉크로 쓰여 있었습니다. 더 이상 쓰이지 않으리라 여겨진 인생의 한 때, 오랜 시간을 함께 한 펜을 눕히고, 황금기가 지나간 만년필로 5년 만에 일기를 썼습니다. 


만년을 간다는 펜과 함께 새로운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2018년 10월: 그만두니 홀가분하던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