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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풍토끼 Apr 07. 2024

2019년 11월: 난 절대 스스로 죽지 않을 거야

둘째 동생의 결혼식은 웃음이 넘치고 따뜻한 예식이었습니다. 셋째 동생이 결혼하고 일 년 뒤 치른 예식이라 가족들도 생각보다 여유가 있었고, 식을 치르는 동안 동생은 내내 웃음을 머금고 있어 '신부가 뭐 저리 웃니' 하는 시샘 섞인 야유도 들었습니다. 비록 동생의 결혼식 전날 밤, 아버지는 이미 고친 바깥 계단을 다시 수리하고 어머니는 십자가 목걸이 장식벽을 다시 정리했지만요. 


둘째 동생은 집에 잘 있지 않았지만, 얼어 있던 집의 균열을 채운 눈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밝은 웃음과 지혜로운 생각 덕분에 위기를 넘긴 적이 많았고, 대화거리와 친구가 없었던 제게도 편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동생이 결혼해 독립해 나가니, 집에 남은 아버지, 어머니, 제 마음에 구멍이 난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술을 드시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말로는 아버지에게서 독립해 나가겠다고 저희 자매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어떠한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독립을 위해 모아놓은 자금으로 아버지 공장에 들어가는 세금을 냈다고 하셨을 때, 저는 어머니와 독립하겠다는 마음을 접고, 1인 가구 시절부터 본가로 들어올 때까지 펴지 않았던 이삿짐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제서야 짐을 풀기 시작하자 어머니께서는 제 등 뒤로, "너는 자기방어가 너무 심해"라고 불평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집의 분위기 메이커가 되었던 동생이 떠나고 집의 분위기가 나빠진 것을 제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하셨던 것 같습니다. 


마음이 끓어오르는 듯한 시기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고, 부모님의 공격이 시작됐고, 이를 중재해줄 사람조차 없이 부모님과 저는 서로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습니다. 가장자리에 물기가 어린 시야로 몇 주를, 치이면 치이는 대로, 굴리면 굴러가는 대로 살았습니다. 우울감은 마음과 입술을 움직일 힘조차 빼앗아 갔고, 저는 제가 무엇을 했는지도 모른 채 "너는 자기방어가 너무 심해"라는 말을 반복해서 들어야 했습니다. 


누더기가 된 마음으로 떠올린 것은, 전문 상담소를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본가가 있는 지역에도 몇 군데 전문 상담소가 있었고 어머니도 이것을 권하셨지만, 어쩐지 어머니와 친분이 있다는 사람들의 상담소에는 가고 싶지 않았고, 비과학적이거나 비전문가, 아니면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곳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노하실 것을 각오하고, 서울을 알아봤습니다. 몇 군데와 전화로 상담을 한 끝에 한 곳을 방문했습니다. 


처음 겪어본 상담은, '힐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마음을 휘젓고 추한 나를 온전히 들여다보는, 일종의 역동이었습니다. 천사가 와서 물을 휘젓는다는 베데스다 못이었습니다. 못을 휘젓는 것은 상담사였고, 못을 채우는 것은 눈물이었습니다. 50분은 짧았습니다. 지하철과 고속버스 안에서, 가져온 휴대용 게임기를 켜지도 못한 채 혼이 나간 상태로 실려 돌아왔습니다. 심해에 적응해 살다가 실수로 물 밖으로 튀어 오른 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 채 뻐끔거리다 질식해 죽을 것 같은 물고기가 바로 저였습니다. 가족이 주는 압력, 자신이 주는 압력에 적응해 살다가 그 무엇도 될 필요가 없는 공간으로 끄집어 올려지면 편하다며 숨을 쉴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었습니다.


휘저어진 마음과 눈물 속에서 한두 문장은 확실히 기억이 납니다. 나는 바뀔 필요가 없다. 내가 바꾸지 않아도 된다.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자신을 분리해야 한다. 누구나 할 수 있던 위로였지만, 아무도 제게 해주지 않았던 말이었습니다. 문장으로는 제가 일기장에 썼던 말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온기가 실린 목소리, 나를 이해해 주겠다고 말하는 타인의 목소리로 전해지니 얼떨떨해지더군요. 나중에 조금 진정된 후에는 후련하기까지 했습니다.


간신히 집에 들어와 짐 정리하고 옷도 갈아입으니 그제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타인의 눈으로 봐도 이 가정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고, 그 확신을 얻었다는 생각은 새로운 힘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가방을 정리하고 있자니, 어머니가 오셔서 '자기방어', 그리고 '행동 수정'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흘려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상담사 자격이 아니라 어머니와 딸 관계에서 네 행동 수정을 하겠다"도 하셨는데, 비전문가인 제가 들어도, 그거 좀 이상하지 않나? 라는 의문을 품을 수 있게 됐습니다. 


어머니는 대학원에서 상담을 공부하고 계셨지만, 정식 상담사도 의사도 아니었고 종교적, 비의료적 치료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제는 어머니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날 이후, 어느 정도까지는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해도 속상하지 않고,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저는 저 자신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의 내원, 한 번의 상담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어머니의 영향력을 아주 약간 털어내긴 했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술을 드셨고, 어머니는 회피하며 저를 공격했고, 저는 취한 것처럼 자신을 스스로 질식시키는 우울의 압력을 다시 느꼈습니다. 간혹 즐거운 일이 있었던 것도 같지만, 그런 일과 감정은 두고두고 곱씹을 만큼 오래 가지 않아 금방 잊게 됩니다. 필사적으로 붙잡아야 하는데, 깨닫고 보면 이미 포르르 날아가 버렸습니다. 누가 행복을 새로 비유했던가요. 그리고 우울을 늪과 바다로 비유했던가요.


2주 후, 다시 상담소에 가서 MMPI 검사 해석을 들었습니다. 상담사님이 주목한 것은 비정상적으로 낮은 자존감, 거의 작동하지 않는 방어기제, 매우 높은 불안과 우울(이에 따라 조현병 수치도 높은 편), 네거티브 성향이었습니다. 자기통제는 보통보다 낮은 편이고, 즐거움 등을 느끼는 감각은 역시 바닥이지만 못 느끼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긍정적인 감정을 못 느끼는 건 아니지만, 우울과 불안으로 모든 감정이 빨려 들어가 악순환이 이어지는 상태라는 분석이었습니다. 이 상태가 굉장히 오랫동안 고착된 상태이며, 가능한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것과 멀어지라는 조언이 따라왔습니다.  


집중도도 굉장히 낮게 나왔어요. 그러니까 우울 불안, 집중력 저하, 지가 비하, 외부 자극에 방어 안 됨, 우울 불안, 집중력 저하…. 이런 악순환이 이어지는 중인 거죠. 그러고 보니 화풀이라는 걸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지도 모를 정도로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부정적인 감각과 기억, 감정이 해소되지 않고 쌓이기만 하는데, 자기방어도 통제도 거의 안 되는 상태이기 때문에….  


"저는 OO 씨가 살아있는 것이, 살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살아줘서 고마워요."


네, 저 노력했어요. 죽고 싶은데, 죽고 싶었는데 그러지 않았어요. 열심히 살았어요. 죽지 않으려고. 와르르 무너진, 나였던 것의 조각을 그러모으며, 바다와 흐린 하늘과 뇌운과 소리 없는 바람과 흔들리지 않는 밀밭과 둥글게 일그러진 별빛을 의지해 살아왔어요. 알아줘서 고마워요. 


적어도 한 사람이 알아줬으니 이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상담에서 상담사님은 제 과거를 듣고 말했습니다. 정말 죽고 싶었을 텐데, 시도도 하셨다고 했는데, 왜 죽지 않으셨을까요? 상담사님은 그 이유를 제 종교심에서 찾았지만, 저는 종교가 제 목숨을 살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단 한 사람이라도 제게 잘 살아있다고, 살아줘서 고맙다고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상담을 다녀온 뒤 집에서는 변화 없이 환경이 이어졌고,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인류의 절반이 죽고, 황폐해진 도시의 한 골방에 갇혀 인터넷에 일기를 올리며,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사람들과 소통하려 하는 생존자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불면과 우울로 상담을 청한 친구에게 '문제를 문제로 삼으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찬양 들으면서 신앙을 키워라' 같은 조언을 주고 계셨습니다. 아마 나에게도 똑같이 하고 싶으셨을 말들. 이제는 그 안에 담긴 폭력성과 무지가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저는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저런 말이 나를 죽이려 들지언정, 나는 스스로 죽지 않겠다고. 

난 절대 스스로 죽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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