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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아 Nov 30. 2023

옥례

휴일

따뜻한 남풍이 감돌며 창신동의 골목길에 봄소식이 들린다. 삼 남매가 사는 경환이네 집은 담 너머로 꽃물이 올라 눈길을 뺏는다. 오늘은 옥례의 휴일로 온종일 집안일을 계획한다. 그동안 겨울을 감싸준 이불들의 홑청을 뜯어 큰 다라에 넣고 빨랫비누로 문질러 거품을 낸다. 수북이 쌓인 홑청은 비눗방울과 합쳐져서 부피감이 장난이 아니다. 손으로 빨기가 힘이 들어 선태가 맨발로 들어가 밟는다. 물들이 사방으로 튀면서 거품 사이로 맑은 물이 점점 회색빛깔로 진해진다. 옆에 작은 통들을 놓고 몇 차례 행군 후에 현중과 선옥이 양쪽에서 잡아 비틀어 물기를 짜낸다. 장독대를 가로질러 길게 세 줄 빨랫줄에 하얀 빨래가 얹어진다. 막내 선희는 빨래 사이에 머리를 디밀며 즐거워한다. 가족이 총출동하여 오전 내내 빨래하는 동안 할머니는 부엌에서 가마솥에 끓인 국수를 건져낸다. 찬물에 헹구어 한 손 가득 말아 대접에 넣고 연탄아궁이 위에서 펄펄 끓고 있는 멸치 육수를 붓는다. 양은 쟁반에 국수 대접을 놓고 가운데 양념장과 송송 썬 배추김치가 먹음직스럽다. 마루에 앉아 일을 한 뒤라 그런지 모두들 정신없이 국수를 밀어 넣는다. 먹성 좋은 선옥은 한 그릇 더 달라고 한다. 빨래를 하고 남은 물은 양동이로 퍼서 변소로 옮긴다. 겨우내 청소를 못해서 상태가 좋지 않던 공간을 함께 청소를 한다. 벽에 뿌리고 바닥을 닦아내며 집 앞까지 마무리한다. 한두 번 행군 물은 나중에 쓰려고 따로 모아서 드럼통에 담는다. 모든 것이 귀하던 시절이라 함부로 버릴 수가 없다. 어제 종로 5가 종묘상에서 사 온 장미 묘목의 줄을 풀어내며 가위로 잔가지를 친다.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옥례는 꽃 가꾸기를 좋아한다. 장독대 옆에 있는 화단에 모종삽으로 거름을 섞고 땅을 파서 다섯 그루의  장미를 심는다. 앞쪽으로는 골을 만든 후에 여름 내내 따먹을 고추와 상추를 심었다. 휴일의 계획을 완벽하게 마치고 모두들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옥례는 한복을 좋아한다. 높임 머리를 하고 고운 한복을 입고 하얀 고무신을 신으면 우아함이 완성된다. 누가 봐도 부잣집 맏며느리로 느껴진다. 오늘도 현중은 집에 남아 신문을 보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친정엄마도 남아서 낡은 옷들을 모아 바느질을 한다고 한다. 나머지 가족들은 노벨 극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나는 난생처음 영화 구경을 한다. 겁도 나고 어떤 상황인지 상상이 안 간다. 표를 끊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커튼을 걷고 들어가니 캄캄한 공간에 사람들이 가득하고 정면에 큰 화면이 열 일을 한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대한 먼저 음악소리와 함께 <대한 뉘우스>를 한다. 여러 가지 뉴스가 지나가고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뉘우스에 <옥례>가 나온 것이다. 은행에서 세금을 납부하는 장면이 보였다. 그 순간 우리 모두는 옥례를 바라보았다. 옥례는 미동도 하지 않고 화면을 주시했다. '본인이 나오는 것을 미리 알았을까?' 궁금했다. 이어서 <저 하늘에도 슬픔이>가 상영되었다. 너무 슬펐다. 계속 울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누가 볼까 부끄러워 울지 않는 척

해가며 목으로 눈물을 삼켰다. 얼굴이 퉁퉁 부어서 영화관에 나와 집으로 발길을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여전히 동네 입구를 지키고 있는 철수네 도나스 가게 앞에 섰다. 나는 찹쌀 도나스를 좋아한다. 옥례는 이것저것 봉투에 담아 돈을 지불하고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할머니가 밥상을 준비하여 우리를 맞이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그릇이 놓이고 가운데는 보글보글 김치찌개가 끓고 있었다. 영화 관람하느라 

허기진 우리들은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항상 그 자리에서 묵묵히 우리 가족을 지켜주는 할머니가 큰 나무와 같았다. 밥상을 치우고 도넛이 담긴 하얀 봉투를 열어 맛있게 먹었다. 바삭하게 튀겨진 도넛이 흰 설탕을 입고 입안으로 들어왔다. 꿀맛이었다. 선태는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일기를 쓴다. 오늘은 왠지 모를 뿌듯한 하루다. 완벽한 행복감이 나를 감싼다. 밤이 되어 이부자리를 깐다. 여동생, 할머니, 선태, 선옥 순으로 불을 끄고 자리에 눕는다. 불을 끄니 천장에 수많은 환상이 비친다. 오늘 있었던 일들, 그리고 관람했던 영화, 그리고 내 곁에 누워계신 할머니... 감사함과 불안함이 겹쳐지며 선태는 속으로 기도한다. 하나님, 부처님, 공자님, 맹자 님, 우리 할머니 오래오래 살게 해 주세요. 깊어가는 밤에 선태는 비몽사몽 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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