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선구자들은 어떻게 꼰대가 되었나
그렇다면 386세대의 주체성은 무엇이며, 무엇이었을까? 본래 운동권에 있었으면서 직접 전선에 뛰어들었던 80년대학번 '선배'들을 지칭하던 말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80년대 대학가를 경험한 60년대생들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오늘날 그들이 갖는 상징성은 한강의 기적을 주도적으로 일구고 민주화, 산업화, 선진문화의 도래를 앞장서서 맞이한 세대로서 구시대적 사고방식, 가부장제도, 남존여비사상, 독재정치, 가난이라는 시대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후세의 풍요를 위해 살면서도 젊음을 충분히 즐긴, 새로운 윤리적 표준이자 현대사의 영웅들이다. 이러한 자기의식은 곧 90년대 이후 이들로 하여금 문화의 선구자로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윤리적 권위를 부여했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무엇이 옳고 그르고 바람직하고 지양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 세대의 논의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들은 스스로가 스승보다 낫다고 생각했고 후세대를 한심하다, 또는 불쌍하다고 평가하며 사회의 전반적인 흐름을 교정의 대상으로 삼고 문민정부가 처음 출현했을 때부터 97년 금융위기까지의 과잉기에 대한 향수를 가감없이 표현한다.
이들이 갖는 윤리적권위의 정당성은 오로지 90년대의 낙관적감성을 표준으로 한다. 386세대가 5공화국을 평가하는 잣대와 오늘날의 경제역학, 계층갈등의 특이성을 정의하는 근거는 일관적으로 90년대 그들이 겪었던 전반적인 부흥, 경제성장, 이념해체, 대학가의 비정치화의 물결과 평행한 선을 그린다. 2000년대부터 지금까지 국내에서 오피니언리더로서 의미있는 목소리를 내어온 386세대 지식인들의 정치 및 사회비평은 줄곧 80년대의 이상이었던 수평적관계지향과 (특히 국가)권력에 대한 거부의 감성을 그대로 연장시키면서도 그들이 결과물로 떠안았던 90년대의 시장논리와 그에 따른 정치의 탈전선화, 문화의 세속화를 자유라는 추상으로 뭉뚱그려왔다. 이런 글들은 전반적으로 "독재는 나쁘다"; "열심히 일해야 한다"; "미국에서 한 이것을 우리도 해야한다"는 전제를 깔고 논리의 정당성을 확보하며 기술-정치-문화의 낯선 변화들을 경계하는 관조적 태도와 피상적인 평으로 일관하는 편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학생운동을 구경했던 이들까지도) 줄곧 부흥과 민주화의 원인을 자기들의 공로로 돌리는데에 부끄럼이 없었고, 이러한 자의식은 2000년대 이후 혹은 참여정부 시대를 기점으로 체제긍정으로 돌아선 386세대가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와 무관한 영속적인 선각자로서 사회 모든 계층을 훈계해야 한다는 나르시시스틱한 사명으로 이어졌다. 이들이 오늘날 갖는 서사적권리는 90년대 이전과 이후의 물질적, 기술적인 조건의 차이를 괄시한채 양산되는 술자리 담화가 '사회평론'이라는 이름을 달고 각종 신문과 칼럼에 실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세대정신"의 근본은 "80년대의 운동을 주도했다"라는 그들의 자의식과는 달리 실제로는 영미권 관제학자들이 선호하는 분석철학과 정치적 현실주의, 하옉-프리드먼 계보의 신고전주의경제학과 레이건-대처식 신자유주의 지정학체제에 순종적인 태도가 배경에 상당부분 깔려있다. 오늘날 영어유치원, 영어학원, 영어마을, 영어태권도, 원어민강사의 주 수요원인이 된 학부모들은 대학시절 할리우드영화와 비틀즈의 음악을 이상적 미적기준으로 삼고 낭만을 꿈꾼 세대이다. 80년대가 종결되고 민주주의이상의 체현인 6공화국 헌법이 등장한 이후 독재정권의 폐허 위에 그들이 만들어간 세상은 한편으로는 최단기간에 민주화, 산업화를 이뤘다는 한국의 역사적 특수성을 자축하는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식 또는 본인의 미국유학 및 이민을 삶의 목표로 설정하는 식민지 또는 근접국가의 뱁새근성이 전체적인 톤을 이룬다.
선진문물에 대한 맹목적 추종은 결코 집단의식을 떠나지 않았다. 386세대가 기득권층의 의미있는 부분을 이루면서 대중문화에 만연하게 뿌리내린 가치관은 자유주의, 개인주의, 민주사회시민의식이라는 탈을 썼지만 실제로는 미국에서 인정받는, 미국사람들이 먹는, 미국에서 유행하는 ~에 대한 끝없는 갈망의 표현일 뿐이다. 이는 386세대의 민족주의가 주도적인 분석을 통해 이뤄낸 역사의식에 기반한 창조적인 약진이 되기보다는 "미국"이라는 세계적패권이 지정해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픈 욕망에 기반한 노예의 꿈으로서, 결코 '시대정신'이라는 주체성이 될 수 없다. "미국", "선진국" 등의 기표가 자신의 수족에게 말의 뜻을 정의하고 명령을 내리는 주인의 그것으로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익명의 백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막연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아닐까?
"올바른 영어", "본토의 영어", "프랑스의 식사에티켓" 등을 "완벽하게" 흉내내고 싶은 우리의 마음이 여기에서 근본을 찾는다. 이는 단순히 영미권의 석학 논문을 누가 더 "올바르게" 이해했고 번역했는지에 대한 국내지식인들의 겨루기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간판이 써있는 카페에서 크로와상을 잘라먹는 모습을 인스타그램에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중산층의 과시욕이기도 하다. 이렇게 주인 혹은 지위가 월등한 상위계층을 머릿속에 가정하고 그들을 닮고 싶은 마음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양명학을 반대하고 주희식 성리학에 충성했던 모습, 혹은 아랍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슬람권에서 이해하지도 못하는 고전아랍어로 된 코란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암기하도록 가르치는 근본주의와 교차된다. 먼나라를 본토로 설정하여 (우리가 이해한) 그들의 틀을 통해 오늘 내일의 일상을 끼워맞추며 공론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에 나가본적이 없는 사람도 "한국은 너무 ~해", "한국남자/여자는 ~해" 등등의 비판적 어조를 쓰는 '헬조선담론'이 이 땅에서 가능한 것이다. 만약 정말로 한국이 '너무 ~하다'면, '적당히 ~한' 정상국가는 어디 있는 것일까? "외국"이다. 물론 여기서 외국은 우리가 선진국으로 이해하는 열개 남짓의 유럽-북미국가들의 이름일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실제 캐나다, 호주, 프랑스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원하는 한국에 대한 우회적인 표현인 것 같다.
이러한 열등시민의 집단의식은 오늘날 새로운 삶을 정의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거대한 그림자처럼 드리워져있다. 스스로 민주산업사회로의 도약을 주도했다고 믿는 사람들에 대한 "꼰대"라는 비아냥은 좋았던 때를 회상하는 데에만 탐닉하는 앞선 세대의 머리통을 노크하고 이상향인 본토의 언어를 내가 발딛고 있는 이 땅으로 재설정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