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되찾은 땅인 한국은 조선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이들이 되찾은 조선이다.
논란의 여지없이 2차세계대전과 일본제국 붕괴의 산물인 한국이라는 민족국가는 줄곧 "잃어버린 것의 회복"이라는 사명에 그 정당성을 기반해왔다. 1948년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는 북쪽의 땅을 "빨갱이"들로부터 되찾아야 한다는 그것이었고, 이것은 정부가 없었을 적 이념의 기반이 되었던 독립운동, 즉 일제로부터 빼앗긴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근대식 민족국가 건립에 대한 열망의 연장이었다. 오늘날 헌법이 인지하는 국토가 조선의 그것이고 민족주의의 주춧돌이 되는 문화재, 위인, 국사 등이 조선시대의 주류문화였던 유학과 떼어놓고 논해질 수 없음을 고려할 때 되찾아야 하는 땅은 조선의 땅, 되찾아야 하는 민족의식은 조선 성리학 엘리트들의 그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주역들이 원했던 것은 (남북을 막론하고) 경복궁 안의 왕권 복권이 아닌 헌법제정과 징병제, 보통선거제, 민주주의였던 것을 미루어보면, 이들이 되찾고자 했던 빼앗긴 땅은 어쩌면 "한 번도 현존하지 않았던 과거", 즉 실제조선시대에서는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민족주의 기반의 근대국가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시계를 조금더 돌려 일제강점이 시작되기 전 조선시대를 보면 이는 더 명확하다. 나중에 독립운동의 주역이 될 인물들은 영어와 일본어 공부를 열심히 한 경우가 많았고, 유학을 갔거나 가고 싶어했다. 없어진 조선을 재건하고 싶어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이 실재하던 시절엔 조선으로부터의 독립을 꿰했었다. 이는 엘리트계층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고, 세기말 동학운동, 천주교 유행의 주역이었던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기존 질서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고자 했던 노력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다시말해, 오늘날 되찾은 땅인 한국은 조선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이들이 되찾은 조선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접근했을 때 헬조선에 대한 담론으로 발전한 비판적논의와 "외국"을 닮고 싶은 마음은 반공, 반일에 의존해왔던 기존 한국의 민족주의에 새로운 이념적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냉전시대가 끝나고 북한을 포함한 사회주의진영이 더이상 실질적인 위협으로 기능하지 않으며 통일, 즉 잃어버린 북쪽영토의 회복이라는 과제가 오늘날 범국가적인 설득력을 갖지 못하듯 일본산 제품을 국가차원에서 보이콧하고자 했던 노재팬 운동은 반일감정의 장기적인 상기, 지속, 확산이 아닌 민족의 정기를 끊어놓은 주범이어왔던 일본에 대한 범국민적인 적개심을 해체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전자는 대한민국의 정당성과 한민족의 정체성을 자유주의와 친미주의로부터 분리시키는 역할을, 후자는 제국주의의 피해자, 혹은 피식민국가로서의 역사의식에 물음표를 던지게 한다.
그러나 우리의 상실감의 원인이 북한이 아니고, 일본도 아니라는 인식전환은 상실감과 부재하는 무언가에 대한 욕망 자체를 해체시키지는 않는다. 상실의 원인에 대한 적개심은 오히려 '페미', '꼰대', '좌빨', '일베충' 등의 내부원인, 혹은 스스로의 "흑역사"에 대한 부끄러움과 죄책감으로 방향을 돌린 반면, 부재의 원인 역시 외적요인보다는 스스로의 부족함, 우매함, 가족내 불화, 개인적 트라우마와 같은 (유사)심리학적 담론에 의존도를 높이면서 자기반성적인 서사가 대중문화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원인분석의 방향전환은 언뜻 보기에 기존사회의 해체, 정치에 대한 무관심, 개인주의의 확산 등으로 귀결되는듯 보이나 이러한 현상을 사회적차원에서 일반화할 수 있음은 역설적으로 그것이 특정시대 또는 사회를 정의하는 새로운 상징성을 갖는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전환 속에서도 여전히 지속되는 요소는 서구의 선진문명에 대한 욕망이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의 한국인의 수많은 셀피들은 백인을 프레임에 넣거나 백인이 먹는 음식, 백인이 즐기는 문화, 백인의 예절에 대한 이미지를 재생산하면서 스스로의 지위를 과시한다. 한국인, 또는 "똥양인"인 나와 유럽인, 미국인인 그들과의 좁힐 수 없는 거리와 주인인 그들, 백인사회에서 그들의 기준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여전히 나와 우리를 정의하는 주체의식의 필요조건으로서 잘 기능하고 있다. 만약 민족주의가 정말 해체되었다면, 그래서 나를 벨기에사람, 필리핀사람, 콩고사람과 구분하는 잣대가 한국이라는 나라이름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부재의 인식과 욕망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헬조선에 대한 담론과 자기계발/커리어성장에 대한 욕구, 사주 또는 타로카드점에 대한 수요증가는 욕망의 지향점을 새롭게 설정함으로써 기존의 상실감을 대체시키는 민족주의의 새로운 표현수단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조선후기 천주교가 확산되었던 배경과 비슷하지만 계급의식에 기반하여 각각 기존왕정과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으로써 민족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동학농민운동과 독립운동의 외향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외향성은 한국의 대중문화를 수출하여 우리의 민족정체성을 해외에 이식하고자 하는 보편화와 관련이 더 커보인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 제국주의의 대안으로 어필하지만, ... 그 스스로가 대안적인 제국주의로 도약한다.
K-POP(이하 케이팝)은 형식적인 면에서 미국의 팝, 일본의 J-POP의 섭장르인듯 보이지만 이는 특정사회에만 해당했던 국지적인 민족주의가 모든 사회에 적용가능한 보편적기호로 도약하는 이동수단에 가깝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기술적, 미적인 면에서 해외의 그것을 모방하고 좇긴 했으나 백인 또는 일본인으로 설정된 우월한 문화 혹은 주인에게 인정받는 컨텐츠를 생산하려는 노력과는 거리가 멀어왔다. 관련사업의 이권을 가지고 사업을 확장하는 문화의 '소유주'인 기획사들은 타겟소비층을 해외 팬으로 확대시키면서 한국국적이 아닌 연습생을 "한국식"으로 양성시키고 한국말을 가르쳤다. 케이팝이 해외에서 점진적으로 저변을 확대하면서 인기그룹의 멤버들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서방의 소외계층의 정치적이익을 대변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하며 오늘날 "한국적"이라고 널리 인식되는 미적요소들을 BLM, 성소수자인권보호 등의 저항정치운동의 상징으로 각인시키는 성과를 이뤄냈다.
이러한 양상은 기존정치역학에서 이분했던 제국과 식민지, 제1세계와 제3세계의 주체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미국, 프랑스에서 케이팝은 인종적, 사회적, 성적 소외계층에 공감하는 정서로 어필해왔고 팬들은 "코리아부"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비주류문화의 추종자로 폄하되기도 한다. 일반화를 가미할 수 있다면 서구에서의 케이팝은 기존주류 대중문화와 전통적인 고정관념, 미적체제에 도전하는 대안적인 하위문화로서 어필해왔다. 한편 90년대 이후 할리우드영화를 보고 자란 전세계의 아이들이 그랬듯, 10대때부터 케이팝을 접한 이들은 한국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을 품고 한국과 한국적인 것을 부재의 원인 혹은 욕망의 대상으로 설정한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제 3세계국가의 주체성과 공감하고 지구화된 자본주의시장체제에서 구석으로 몰린 이들을 재흡수함으로써 제국주의의 대안으로 어필하지만, 기획사와 팬이라는 비대칭적인 관계덕에 그 스스로가 대안적인 제국주의로 도약한다
지역적인 것을 일방적인 보편으로 제시하는 다이나믹은 "문화적패권", "소프트파워"등의 말을 처음 개념화한 미국정치 엘리트들의 전략을 모방한 것이다. 다만 미국의 대중들이 미국 바깥세상에 대해 무관심해왔던 것과 달리 한국의 대중은 상실의 원인을 안에서 찾으면서도 부재하는 욕망의 대상은 한국 바깥으로 설정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헬조선에 대한 부정이 독립운동의 연장으로서 유효하려면 백인과 닮고 싶고 백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열등국민의 주체성을 스스로 알아채고 저항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한국대중문화의 보급이 제3세계 주체성의 보편화일지, 지구화의 또 다른 하나의 양상일지는 두고 봐야 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