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자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
가장 나약할 때 보는 관계의 열매
하나의 병실, 여섯의 가족이 있다.
병실배정을 받을 때마다 같은 방 환자의 나이도, 사연도, 환자를 대하는 보호자의 태도도 제각각이다. 항상 다르지만 매번 같은 것도 있다. 애석하게도 병실의 환자 중 내 남편이 가장 어리다는 것이다.
커튼을 쳐서 할 수 있는 사생활 보호란, 눈만 간신히 숨기고 제 몸이 다 숨겨지지 않아도 꼭꼭 숨은 것처럼 생각하는 어린아이의 숨바꼭질과 같다. 타 환자와 직접 접촉할 일이 없어 겪지 않아도 되는 촉각과 미각을 제외하고 시각을 가리면 남는 감각은 후각과 청각이다. 이 두 가지만 경험하더라도 건넛병상의 사정이 짐작되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커튼 사이로 스멀스멀 넘어오는 불쾌한 냄새를 맡으면 맞은편 병상 보호자가 할아버님의 기저귀를 가는 행동이 그려진다. 냄새를 맡음과 동시에 창을 연다. 이번에 배정받은 자리가 창가라서 다행이다.
창가자리는 장단점이 명확하다. 봄이 오기 전, 따뜻함을 시기하는 겨울바람이 아직 가시질 않아 창 사이로 밤새 외풍이 든다. 안 그래도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찬 바람에 얼굴이 시린 것이 싫어 얼굴 끝까지 이불을 덮고 잠이 든다.
창이 있는 것이 장점이 될 때가 더 많다. 냄새에 예민한 내가 불쾌한 냄새가 날 땐 자발적으로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할 수 있다. 창가자리가 아니라면 냄새가 흩어질 때까지, 혹은 창가자리의 환자 보호자가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할 때까지 참아야 한다. 창가자리는 창가선반을 수납용도로 사용해 너르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무엇이든 장점만 있지도, 단점만 있지도 않은 것이다. 사람도 관계도 모두 이와 같겠지 싶다.
구수한 음식 냄새가 병실 안에 퍼진다. 옆 병상의 90세 할아버지 환자의 보호자(할머님)가 삼계탕을 포장해 왔다. "여보~이거 먹고 기운 좀 차리소. 내 두고 어찌 갈라해. 당신 가면 나는 어찌 살라고. 하느님 아직 데려갈 때가 아니여라." 구십 세가 넘으셔도 죽음이란 참 두려운 존재구나. 저렇게 오래 사신 분도 죽음이 두려운데 이제 갓 마흔을 넘긴 내 남편의 속은 어떨지 짐작조차 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조근조근 내뱉는 애정 어린 말을 듣고 있자니 할아버님이 할머님에게 참으로 잘하셨었나 보다. 할머니는 간병하는 내내 할아버님에게 쉴 새 없이 말을 거신다. "하느님. 이 사람 아직 할 일이 많이 ~ 남아있으니 데려가지 마셔요"라는 말과 함께.
구수한 삼계탕 냄새를 맡으니 나도 남편에게 삼계탕을 먹이고 싶어졌다. 죽만 겨우 먹는 남편을 위해 오늘저녁엔 삼계죽을 포장해 와야겠단 생각이 퍼뜩 든다. 죽 한통을 사도 한 끼에 종이컵 반컵정도도 못 먹으니 좀처럼 줄어들지를 않는다.
지온이가 아빠 맛있는 거 사주라고 용돈을 털어 내게 주었다. 꼬깃꼬깃 반에 반 접힌 만원을 주며 "엄마! 아빠 맛있는 거 사주세요!"라고 말했다. 오늘 삼계 죽은 이 꼬깃한 만원으로 사 먹여야겠다.
수많은 입원을 통해 본 병상에서 보호자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그 사람(나이가 든 환자)이 그의 인생동안 소중한 사람(보호자) 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보게 되는 인생의 축소판 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첫 *개두술을 했을 때 바로 옆 병상에 60대 초반정도 되는 남자환자가 있었다. 머리를 여는 큰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을 거쳐 들어와 "아이고아이고" 앓는 소리를 크게 지르는데도 아내 보호자는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자리를 치우고 닦고 그의 시중을 들뿐이었다.
어쩜 저리 담담할까. 아니면 담담한 척을 하는 걸까. 내심 그 속사정이 궁금했다. 그리고 반나절도 안되어 그녀의 사정이 조심스레 짐작되었다. 남자는 쉴 새 없이 그녀를 귀찮게 했고 말투는 매사 짜증이었다. 이래라저래라 참견하긴 일쑤에 명령조로 하인 대하듯이 부리는 걸 듣고 있자니 나까지 피곤해졌다.
'머리를 여는 대수술을 하고도 저렇게 기운이 넘치다니' 생각에 놀라웠다. 아픈데도 저런 것을, 아프지 않을 때는 더 심했을 터이다. 기간이 얼마든 그런식의 감정소모는 상대를 질리게 만든다. 게다가 그는 본인이 마뜩찮아하는 그 사소한 일 조차 하지 못해 그녀의 손을 빌리는 지경이었는데도 불평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그제야 왜 그녀가 그가 없을때 더 편해 보였는지, 어찌하여 큰 수술을 마치고 온 남편을 목석같이 대했는지 알게 되었다.
아픈 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대하는 보호자(자녀)를 보면 그 부모가 아프지 않고 건강했을 적 그 자녀분을 어찌나 소중히 대했는지 설핏 그려진다. 가장 나약할 때 나를 가장 소중히 대해주는 사람, 그게 내가 일생을 거쳐 뿌린 관계의 열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나의 심신이 가장 나약할 때 나를 지지해 줄 사람들이 누구일까, 그리고 추려진 그들과의 관계를 현재 내가 잘 다듬어 가고 있는지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물론 세상사 다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헌신을 쏟아부어도, 내가 애정을 매만져 정성껏 주어도 단 한 톨도 다시 돌려주지 않는 돼먹지 못한 관계도 많다. 받기만 하고 주는 법을 모르는 몰염치한 자들에게 상처받지 않는 날이 되길, 그리고 그런 자들이 선량한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 자식부터 염치 있는 인간으로 길러야지 다짐한다.
*개두술: 두개골을 절개하여 뇌를 노출시킨 상태에서 진행하는 수술
ps. 이 글은 24년 2월 15일에 적었던 글을 수정하여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