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금빛에서 물의 빛까지
― 빛이 하루를 여는 방식
이른 아침,
동이 막 트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아직 아침식사 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묵고 있던 농가 숙소 밖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차분하고 고요한 공기 속에서 하루가 열리는 순간을 직접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발도르차의 능선 위로 해가 아주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마치 서두르지 말라는 듯, 이곳의 하루는 늘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밤새 잠들어 있던 초록 들판은 아침 햇살을 받아 조금씩 깨어나면서, 짙은 초록은 연해지고,
연한 초록은 이내 금빛에 가까워집니다.
들판과 언덕 사이를 잇는 굽은 길, 작은 연못, 사이프러스 나무, 그리고 드문드문 자리한 농가들까지
하나씩 또렷해집니다.
이렇게 부드럽게 번져가는 아침 햇살은 발도르차를 따뜻하게 감싸며 아무 말 없이
하루의 시작을 알립니다.
아침의 여운을 안고 저희는 와인의 언덕 도시, 몬테풀차노로 향했습니다.
여행은 늘 그렇듯 작은 골목에서 시작됩니다.
골목 끝에서 마주하는 피아자 그란데는 이 도시의 심장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작은 도시의 광장치고는 유난히 웅장해 보이는데, 그 이유는 중세 시대 귀족들이
서로의 권위를 과시하듯 경쟁적으로 건물들을 지어 올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4세기에 세워진 시청 건물은 피렌체의 팔라초 베키오를 본떠 만들어졌고,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은16세기 타르지 가문과 곤투치 가문의 저택들입니다.
광장 중앙의 우물 위에는 두 마리의 사자와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 남아 있습니다.
이 도시는 한때 피렌체의 영향 아래 있었고, 그 흔적은 이렇게 조용히 남아 있습니다.
몬테풀차노 대성당의 외관은 지금도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당시 예산이 부족해 정면 파사드는 벽돌 그대로 멈춰 섰다고 합니다.
광장을 뒤로하고 다시 골목을 따라 천천히 내려옵니다.
황토빛 중세 건물, 따뜻한 햇살,
그리고 느리게 흐르는 공기.이 도시의 매력은 화려함보다
이런 소박한 첫인상 속에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골목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풍경들조차 하나같이 매혹적이고,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오래된 시간이 조용히 열리는 느낌이 듭니다.
몬테풀차노는 ‘가장 걷기 좋은 다이어트 도시’라는 농담이 있을 만큼
경사가 심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윽고, 골목 끝에서 만난 시계탑 인형, 풀치넬라. 나폴리 전통 희극 속 익살스러운 캐릭터로,
17세기 나폴리 출신 주교가 고향을 기념하기 위해 이 시계탑에 올려두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매시간 종을 울리며 이 언덕 도시의 시간을 툭툭 두드려 줍니다.
다시 광장으로 돌아와 시청 뒤편 전망대에 섭니다.
말이 필요 없는 순간입니다. 부드러운 언덕의 곡선, 바람에 스치는 포도밭, 붉은 지붕의 농가들,
그리고 멀리까지 이어지는 초록 들판. 이 풍경은 마치 커다란 캔버스 위에
자연이 직접 그려놓은 회화 작품처럼 보입니다.
몬테풀차노 여정의 마지막은 메디치 요새 전망대입니다.
이곳에서는 몬테풀차노와 발도르차의 풍경이 하나로 이어져 보입니다.
우리가 지나온 골목들, 언덕 위를 스치던 바람까지 모두가 조용히 섞여
마음속에 오래 머무는 순간입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발도르차에서 가장 독특한 마을, 바뇨 비뇨니였습니다.
이곳의 중심에는 광장이 아니라 온천수가 솟아나는 거대한 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로마 시대부터 이어진 이 온천은 중세에는 성지 순례자들이 반드시 들르던 휴식처였고,
성녀 카타리나 역시 이곳을 자주 찾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온천 풀을 둘러싼 돌집들과 오래된 담, 돌길은 이 마을만의
조용하고 포근한 공기를 만들어 줍니다.
지금은 온천 풀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중세 건물들이 물 위에 고요히 비치는 풍경만으로도
이곳은 충분히 특별합니다.
화려한 볼거리는 없지만 ‘시간이 쉬어가는 마을’이라는 말이 이보다 잘 어울리는 곳도 드뭅니다.
끝없이 펼쳐진 초록 평원, 한 줄로 곧게 뻗은 사이프러스 길.
토스카나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있다면 아마도 이런 장면일 것입니다.
이곳의 이름은 포죠 코빌리. 발도르차를 대표하는 포토 스폿입니다.
사이프러스 나무들은 과거 농가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순례자들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저 길 하나일 뿐인데, 나무와 평원이 만들어내는 선과 리듬 덕분에
어디에서 찍어도 한 장의 작품이 됩니다.
그래서 이 풍경은 광고와 영화 속에 유난히 자주 등장합니다.
이곳의 한 농가는 영화 글래디에이터 속 막시무스의 집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실제 촬영지는 조금 떨어진 다른 장소입니다.
그럼에도 이 풍경은 누구라도 그렇게 착각할 만큼 충분히 압도적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의 집으로 실제 촬영된 장소에 도착합니다.
지금은 개인 사유지라 안쪽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많은 여행자들이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며
이곳에 잠시 머뭅니다.
피엔차에서 남서쪽으로 차로 약 10분. 완만한 구릉을 따라가다 보면
작은 예배당 하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비탈레타 예배당.
16세기부터 순례자들이 찾던 작은 기도의 공간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이곳은,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줍니다. 들판의 색은 차분히 가라앉고, 멀리 농가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며 발도르차의 저녁은 고요하게 깊어갑니다.
마지막 빛이 조용히 예배당 벽을 스치는 순간, 하루의 끝이 이렇게 고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아쉬움을 가득 안은 채 발도르차를 뒤로하고 사투르니아 온천으로 향햇습니다.
사투르니아 온천은 지층에서 솟아오른 따뜻한 물이 계단처럼 흘러내리는 자연 노천 온천입니다.
화면으로만 보던 풍경을 이렇게 직접 마주하고 몸을 담그니 물빛도, 흐름도
훨씬 더 생생합니다.
이곳은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처럼 느껴집니다.
아침의 빛으로 시작해 물의 빛으로 끝난 하루.
그래서 발도르차에서의 시간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았습니다.
https://youtu.be/ieJCf9mHXQY?si=RH2q9AmZYNX1sq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