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른과 함께 읽는 창작 동화
‘빗물 정원?’
처음 보는 표지판이었다. 작은 연못 같았지만, 물은 없었다. 그 안에는 내 키보다 큰 풀들이 무성했고,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었다. 비가 그치고 해가 나온 하늘에 무지개가 펼쳐졌다. 예뻤다. 그때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끼익’하고 열렸다. 너무 깜짝 놀라서 숨이 턱 막혔다. 들어가야 하나 망설였다. 커다란 억새 사이로 꽃길이 보였다. 무서운 마음보다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문을 지나 천천히 꽃길을 걸었다. 한참을 걸어갔을 때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지금은 분명 비 온 뒤 구름 낀 봄이었는데, 그곳은 파란 하늘이 펼쳐진 가을이었다. 마치 새로운 공간에 와 있는 것 같았다.
“같이 연 날리지 않을래?”
언덕에서 연을 들고 서 있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너 말을 못 해? 하기 싫으면 말고.”
여자아이는 익숙한 듯 천천히 실을 풀었다. 연은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더니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솟구치기도 했다. 여자아이는 입을 벌리고 쳐다보는 나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
"너도 날리고 싶구나. 그럼 해봐. 대신 줄 감는 건 네가 해야 해."
얼떨결에 "응"이라고 대답했다. 이사 온 이후 처음 한 말이었다. 아이는 내게 얼레를 건넸고, 나는 조심스럽게 실을 감았다. 연은 하늘 위에서 춤을 추듯 날았다.
“오우! 잘하는데? 연날리기 한 적 있어?”
여자아이는 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여자아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얼굴이었다.
“난 소담이야. 너는?”
입술이 달싹였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괜찮아. 이 정원에서는 말 안 해도 돼. 마음으로 알 수 있어."
이상하게 그 말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연이 크게 소용돌이쳤다.
“줄을 풀었다가 다시 감아! 이러다 줄 끊기겠다!”
얼레를 돌려서 실을 풀었다. 처음엔 서툴렀지만, 곧 익숙해졌다. 연이 점점 안정적으로 하늘을 날았다. 우리는 둘 다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줄을 다 감았을 때, 소담이의 목소리는 처음과 다르게 침울했다.
"오늘을 꼭 기억해 주면 좋겠어. 무지개가 다시 뜨면, 그때도 꼭 와야 해."
어둠이 찾아오자, 소담이는 얼굴이 굳었고, 급히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어느새 빗물 정원의 정문은 닫혀 있었고, 무지개도 사라졌다. 꿈을 꾼 것 같았다.
서울에서 이곳으로 이사 온 지 세 달이 지났다. 아빠 회사에 문제가 생겨 집에 사람들이 들이닥치고, 빨간 딱지가 붙었다. 나는 겁에 질렸고, 엄마는 매일 울었다. 아빠는 회사를 정리하기 위해 서울에 남았고, 엄마와 나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친척 할머니가 사는 이곳으로 왔다. 다행히 그 할머니의 빌라 1층에 살 수 있게 되었다. 평소 말이 없던 나는 낯선 환경에서 더 말이 없어졌다. 2층에 사는 할머니는 툭하면 잔소리를 했지만, 이상하게 밉지 않았다.
“비 오는 날은 따뜻하게 입고 다녀라. 난 춥게 입고 다니는 애들이 제일 싫어.”
집으로 들어오는 나를 본 2층 할머니는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하람이니? 비 안 맞았어? 오늘 학교에 우산도 안 가져가고.”
새로운 일을 시작한 엄마는 바빴지만, 늘 내 걱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에게 빗물 정원의 이야기를 하면 더 걱정할까 봐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했다간 아마도 병원에 데려갈지도 모른다.
며칠 뒤 다시 비가 내렸다. 주말이라 다행이었다.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햇빛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나는 가방 안에 물병과 손전등을 넣고 서둘러 빗물 정원으로 달려갔다. 정원 앞에 다다랐을 때, 하늘에 무지개가 나타났다. 물방울로 반짝이는 정문이 또다시 열렸다. 나는 숨을 고르고 안으로 들어섰다. 지난번처럼 빗물 정원 내부는 숲처럼 넓었다. 그곳은 시간도, 계절도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이번엔 흰 눈이 쌓인 겨울 언덕이 펼쳐져 있었다. 신기하게 하나도 춥지 않았다.
“잊지 않고 와 줘서 고마워.”
하얀 털모자를 쓴 소담이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시 밝은 표정이었다. 우리는 눈썰매를 탔다. 바람을 가르며 내려오던 그 순간, 나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빠와 함께 썰매를 탔던 어느 겨울이 생각났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어서 가야 해. 이곳이 무너지고 있어.”
내 손을 잡아끄는 소담이의 표정은 불안해 보였다. 그제야 하늘이 컴컴해지고 눈 덮인 산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소담이가 이끄는 곳으로 전속력으로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한참을 달려 멈춘 곳은 봄날의 정원이었다. 다행히 더 이상 산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벚꽃과 민들레가 가득했고, 정원 안쪽에는 오래된 나무 그네가 있었다.
“이곳은 안전해.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우리는 그네에 앉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엄마랑 자주 탔던 그네야. 노을을 보며 엄마와 가장 많은 얘기를 했던 곳.”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만큼은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노을을 바라보던 소담이는 벌떡 일어나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우리는 풀들이 만들어 놓은 동굴을 기어갔다. 그리고 도착한 정원 깊숙한 곳에는 커다란 작약꽃밭이 있었다.
“이 정원은 엄마와 함께 지냈던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야. 작약은 엄마가 제일 좋아하던 꽃이야.”
겹겹이 만들어진 다양한 색의 꽃들이 예쁘고 향기로웠다.
“엄마가 하늘나라로 가기 전, 병원 창밖으로 무지개가 떴어. 엄마만큼 예뻤지.”
“아빠는?”
나는 멋쩍게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
“아빠는 내가 더 어렸을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 아빠에 대한 기억은 연과 썰매가 전부야. 그것마저도 자꾸 기억이 사라져.”
“적어 놓으면 되지. 안 잊어버리게.”
“너, 그러고 보니 이제 말을 하네?”
도저히 궁금해서 말을 참을 수 없었다. 왠지 뭔가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작약꽃이 가끔 엄마 목소리로 말하는 것 같아. 엄마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꽃봉오리를 감싸는 소담이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나도 다시 우리 집으로 갈 수 있으면 좋겠어. 아빠가 보고 싶어.”
소담이는 내게 마음을 열었고, 나도 점점 더 많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했다. 우리는 함께 꽃을 돌보고, 나무를 가꾸었다. 우리는 마음속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서 꽃밭에 내려놓았다.
“나는 엄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그래서 항상 괜찮은 척해.”
“엄마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줄 알아? 이 바보야.”
“난 조종사가 되고 싶어졌어. 그러면 무지개를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잖아.”
“난 꽃을 키우는 귀여운 할머니가 될 거야.”
우리는 흙 묻은 얼굴을 서로 쳐다보면서 웃었다. 외로움도, 슬픔도 조금씩 사라졌다. 점점 나는 이 정원이, 그리고 소담이가 소중해졌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소담이는 다시 불안한 얼굴을 했다.
“어서 가. 무지개가 사라지고 있어. 다음에, 다음에도 꼭 오기다. 약속!”
“응. 약속.”
나는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소담이의 길을 손전등으로 비춰주며 소리쳤다.
“내 이름은 하람이야. 이하람!”
“누군데 우리 집에 오는 거니? 네 이름이 뭐였더라?”
2층 할머니는 물뿌리개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람이요. 엄마하고 1층에 이사 온 초등학교 5학년 이하람요.”
이사 온 후로 처음으로 할머니에게 말을 했다.
“뭔 소린지 하나도 안 들리네. 난 작게 말하는 사람이 제일 싫어.”
혀를 차며 옥상으로 올라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집에 들어서자 엄마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하람아, 아빠가 다시 회사 문을 열 수 있게 됐어. 이제 서울로 갈 수 있어.”
엄마는 콧노래를 부르며 이사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토록 원하던 일이었는데 왠지 마음은 먹먹했다.
그 후로 한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나는 소담이의 소식이 너무 궁금했다. 그러나 내가 갈 방법은 없었다. 떠나기 전에 꼭 만나야 했다. 나를 기억해 주기를 바랐다. 나는 소담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 씩씩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스스로 공부도 했고, 엄마도 도왔다. 할머니에게 인사도 하고 잔소리도 웃으며 넘겼다. 소담이를 다시 만났을 때 자랑스러워지고 싶었다. 엄마는 변한 내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사를 하기 전날 내 기도를 들어주었는지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와우! 드디어 비가 온다.”
“비가 오는 게 좋아? 아니면 서울로 다시 가는 게 좋아?”
이삿짐을 싸던 엄마는 웃으며 말했다.
“둘 다 좋은데, 비가 오는 게 더 좋아.”
“하긴 비가 올 때 이사하면 잘 산다더라. 아빠 일이 잘 해결돼서 다행이야.”
다음 날 아침, 이삿짐을 거의 다 쌌을 때 비가 그치고 해가 나오려 했다. 나는 미리 준비한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점심 때는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 늦지 않게 와.”
엄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소담이를 오늘 꼭 만나야 했다. 빗물 정원에 도착해서도 무지개는 아직 뜨지 않았다. 나는 초조했다. 비 온 뒤에도 무지개가 뜨지 않은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구름 사이로 빛줄기가 내리쬐기 시작했다. 아! 다행이었다. 희미하지만 무지개가 뜨고 있었다. 드디어 빗물 정원의 문이 열렸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소담이의 정원으로 달려갔다. 평소와 다르게 숲길이 어지럽혀져 있었다. 가을과 겨울 언덕도, 그네도 사라지고 오직 작약꽃밭만이 남아있었다.
“정원이 울고 있어. 이것마저도 사라질지 몰라.”
소담이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왜?”
“보육원이 문을 닫을 거래. 나는 다른 곳으로 보내질지도 몰라. 그러면…….”
갑자기 바람이 거세졌고, 먹구름이 몰려왔다. 꽃잎이 흩날리고 폭우가 쏟아졌다.
“이 정원은 너의 기억으로 만들어졌어. 잊으면 무너지는 거야.”
나는 소담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넌 혼자가 아니야. 네 기억은 사라지지 않아.”
나는 가방에서 미리 사두었던 수선화 씨앗을 꺼냈다.
“이건 우리의 기억이야. 어디서든 자랄 수 있어.”
소담이는 씨앗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한동안 거센 바람과 폭우로 많은 것이 무너졌지만, 우리는 함께 있었다. 비바람이 멈추고 무지개가 하늘에 그려졌다.
“우리, 서로를 기억하자. 여기에 이 꽃씨들을 다시 심자.”
우리는 꽃말이 ‘새로운 시작’인 수선화 씨앗을 심었다. 꽃씨를 다 심었을 때, 소담이는 작약 두 송이가 담긴 화분을 내게 주었다.
“그래도 이건 남았네. 작약의 꽃말은 정을 잊지 않는 거래. 나를 기억해 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무지개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소담이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할머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옥상을 올라가시는 할머니의 물뿌리개를 대신 들며 말했다.
“넌 누구냐? 누군데 우리 집에 있는 거니? 난 모르는 애가 제일 싫어.”
할머니가 이상했다. 며칠 전에 엄마가 한 말이 생각났다. 할머니가 치매일지도 모른다고. 외할머니도 치매로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러던 할머니가 내가 들고 있는 작약 화분을 한참을 보더니 온화한 얼굴이 되어 미소까지 지었다.
“그건 작약이구나. 곱다. 마치 우리 엄마처럼.”
할머니의 말이 처음으로 따뜻했다. 그리고 내 손을 이끌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는 작약과 수선화로 가득한 정원이 있었다. 입이 쩍 벌어졌다.
“이게 다 뭐예요?”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담긴 꽃이란다. 자꾸 기억이 사라지지만, 꽃은 기억해 주더구나.”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억지로 참았다. 할머니가 수선화 두 송이가 심어져 있는 화분을 건네주셨다.
“서울에 가서도 잘 키워라. 말도 많이하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할머니는 예쁜 꽃을 키우시는 귀엽고 고운 분이세요.”
할머니는 웃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예쁜 웃음이었다. 그 순간 알았다. 좋은 기억이 있다는 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엄마와 차에 올라 서울로 향하는 나에게 할머니는 오래도록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엄마, 2층 할머니 이름이 뭐야?”
“소담이 할머니. 치매가 점점 심해지셔서 곧 요양원에 가실지도 몰라.”
나는 놀란 눈으로 엄마를 바라봤다. 눈물이 핑 돌았다. 작약과 수선화 화분을 두 손으로 꼭 안았다. 이제는 이 화분이 나의 빗물 정원이자, 오래도록 잊지 않을 기억의 정원이었다.
기억을 잃어가는 모든 어른들과 상처를 가진 모든 아이들이 하람이와 소담이의 우정으로 치유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