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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나오 Dec 05. 2023

슬픈 자전거

 내가 갓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포항에서 하던 일을 접고 엄마와 나를 데리고 고향인 청송으로 들어갔다. 시골 고향에 농촌지도자 역할을 할만한 사람이 없으니 고향으로 와서 일하라는 큰아버지의 말씀에 따른 것이다. 막상 농촌운동을 한다고 들어갔지만 가진 것이 없던 부모님은 친척 집 아랫방에 살면서 농사를 거들었고,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화장품이 가득 든 가방을 자전거에 싣고 동네마다 다니며 팔기도 했다. 애처가인 아버지는 들판으로 아내를 보내고 싶지 않았고 도회지 생활에 익숙한 어머니는 집안 살림만 했다. 어떻게라도 가정을 꾸려나갈 생각에 부지런하고 머리가 좋은 아버지는 새로운 일감을 궁리해 냈다. 덕분에 나는 두메산골에 살면서도 빨강, 노랑 구두와 알록달록 꽃무늬 원피스, 네이비 바탕에 하얀 땡땡이가 있고, 레이스가 있는 원피스를 입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귀부인 부럽지 않았고 나는 공주 대접을 받으며 곱게 자랐다. 어릴 때 사진에 예쁜 밍크코트를 입고 찍은 사진과 금반지를 몇 개나 끼고 찍은 백일 사진이 나름 귀하게 컸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중요한 건 나는 아무런 기억이 없다는 거다. 아무튼 그랬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했다. 한 가지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아버지가 동네 어른들과 낚시한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먹으며 우리 집 앞마당에서 웃으며 즐거워하던 장면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기분이 좋다. 아버지는 유난히 사람을 좋아해서 아랫마을, 윗마을 할 것 없이 만나면 친구가 되고 의형제를 맺어 정을 나누기도 했다.      

 여섯 살 때였다. 여느 때처럼 아버지는 마당에 세워둔 자전거 안장에 앉으며 기어를 열고 한 발로 페달을 힘껏 밟아 골목을 나섰다.

“다녀올게”

 아버지를 배웅하고 어린 동생들과 함께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간식을 먹으며 삼 남매는 방앗간 참새처럼 재잘거리며 입도 마음도 신났다. 아침을 먹고 나간 아버지는 점심때쯤 힘없이 돌아왔다. 체한 것 같다고 했다. 나에게 옥수수 대로 만든 빗자루를 주면서 손잡이로 등과 어깨를 툭툭 치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여러 차례 손에 힘을 주어 등과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감기 한번 한 적이 없던 아버지가 몸이 안 좋다며 저녁도 먹기 전에 이부자리를 폈다. 다음 날, 온몸에 통증을 호소하며 일어나지 못한 아버지는 결국 병원으로 갔다. 별다른 병명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 그날부터 화장실조차 스스로 갈 수 없는 중증환자가 되어버렸다.     

 어머니는 사방으로 수소문하여 병원을 찾아다녔고 외할머니는 어디에서 들었는지 좋다는 약이라며 챙겨서 보냈다. 그 상황은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해서도 계속되었고, 나는 생계를 위해 일하러 나간 어머니를 대신해서 아버지의 병시중을 들었다. 대소변을 받았고 삼키기 좋도록 식사를 잘 챙겨 드렸다. 그때 만해도 정성을 다하면 아버지가 예전처럼 자전거를 탈 수 있고, 나와 동생들 목마를 태워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들과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동네 어귀에서 그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오 아버지 병은 못 고치는 병이 대요. 오래 못 살 것 같다는데......”

 동네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는 안갯속 희망으로 애써 참았던 나의 눈물보따리를 인정사정없이 풀어버렸다. 어머니와 나는 더 이상 귀부인도 공주도 아니었고 마당엔 자전거만 덩그러니 주인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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