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명절 전날의 기억은 크리스마스 전날과 비슷했다. 왠지 마음이 붕 뜨고, 설렘이 있지만, 당일에는 오히려 조용하고 가라앉았다.
10대 시절 나의 명절은 엄마를 도와 전 부치는 일과 저녁에 오는 사촌들 돌보는 일을 했다. 그래서 한때 내 장래 희망은 유치원 선생님이었다. 어린 사촌들은 총 4명으로 남자 1명, 여자 3명이었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사촌들은 다섯 살부터 일곱 살까지 있어 놀아주고, 밤에 재우는 것까지 내가 도맡았다. 덕분에 어른들은 편하게 술도 한잔하고 민속놀이도 즐겼다.
나는 어린 사촌들 재우는데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방안에 사촌들이 나란히 누우면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옛날에, 호랑이가 살았어.”
이야기의 주인공은 말 안 듣는 사촌 녀석이었고, 말을 안 들어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든지, 착해져서 잘 살았다든지 하는 내용이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었지만, 사촌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까지 온갖 전래동화들이 내 입을 통해 각색되었다. 이야기 하나가 끝나면 사촌들은 앙코르 외치듯 “하나 더 해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촌들이 고학년이 되고,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더 이상 내 보살핌은 필요 없어졌고, 각자 집에서 신문 한 장씩을 들고 왔다. 그 이유는 명절 특집 프로그램이 신문의 한 지면을 다 차지할 정도로 크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시간 맞춰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찾아봐야 했기에 사촌들에게는 소중한 신문 한 장이었다.
내가 20대가 되면서 명절 전야는 좀 더 자유로워졌다. 특히 추석 명절 하루 전에는 종일 기름 냄새 맡으며 음식을 만들어 놓고, 저녁에는 한껏 꾸미고 종로로 향했다.
평소에는 밤 10시까지 집에 도착하지 않으면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명절 전날은 밤새 민속 놀이하며 가족끼리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내가 늦게 가도 엄마는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한창 PC통신 동호회가 활발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정기적으로 모이는 모임은 한 달에 한 번 정도였다. 그리고 정기모임 말고도 친한 사람끼리 혹은 마침 시간이 가능한 회원들끼리 갑자기 만나는 번개라는 모임이 있었다.
특히 명절 전날의 번개 모임은 혼자 명절을 보내는 사람이 주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종일 일만 했던 나에게는 설레는 외출이 아닐 수 없었다.
서울 도심의 도로는 한산했지만, 종로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특히 종로의 인사동길 피맛골에는 명절 전야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생선 구이집, 동동주에 파전집, 항아리 수제비집, 호프집, 꼬치구이집 등 어디를 들어가도 빈자리는 찾기 힘들었다.
내 번개 모임 1차는 저녁 식사 겸 맑은 술이 있는 생선구이 집이었다. 문학동호회답게 가벼운 술자리로 시작해 시간이 흐르면서 비주류 작가들의 현실비판 토론장이 되었다.
분위기는 진지하고 무거웠지만 그 틈에도 몰래몰래 눈빛을 주고받는 커플도 있었던 것 같다. 2차는 편안한 분위기의 노래방에서 흥을 마음껏 펼치고 1분 남았을 때 [이젠 안녕] 노래로 명절 전야를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다음 모임을 약속하며 노래방 앞에서 동호회 사람들과 헤어지고 나면 현실의 내 모습과 마주쳤다.
술에 취해 몽롱했던 정신이 맑아지면서 마지막 버스가 곧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버스정류장으로 최선을 다해 뛰어갔다. 그곳은 이미 나처럼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다행히 막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버스 안은 다른 세상인 듯 조용했다. 그리고 자정을 넘긴 시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보는 고요한 한강의 야경은 들뜬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집에 도착해 엄마의 눈을 피해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와서 자는 사촌들 틈에 누우면 설렜던 명절 전야는 끝났다.
지난 시간의 기억은 지워진다고 생각했다. 특히 10대 시절의 명절은 나도, 사촌들에게도 잊힌 기억인 줄 알았다. 그런데 결혼해서 유부남, 유부녀가 된 사촌들이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그때 이야기를 했다.
“우리 어릴 때 누나가 옛날얘기 해주지 않았나?”
“맞아, 언니가 얘기 많이 해줬는데.”
“그걸 아직도 기억해?”
“어. 내용은 기억 안 나지만, 재밌었어.”
“그랬구나. 그걸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 옛날 명절 전날 밤 이야기가 사촌들에게 좋은 기억의 조각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조각이 내 머릿속에 콕하고 박혀 지워지지 않는 추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