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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윤헌 May 23. 2024

불리불안

5. 새로운 삶


 규혁에게 시련이 왔다. 상수도 회사를 청산하니 일이 없다. 굴착기 한 대로 겨우 연명하던 규혁인데 할부금도 내어야 하고 형님에게 빌린 돈 갚으려다 생활이 궁핍하여 거의 소진하고 임대 아파트 중도금도 연체되었다. 여관에서 오래 생활하다가 여관비를 아끼려고 현장 사무실 컨테이너에서 생활했다, 소파에서 잠을 자고 밥은 현장의 점심으로 대신하며 악전고투한다. 그런 시간에 현주는 아파트를 처분하고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며 차익금으로 호의호식하는 이야기가 들린다. 규혁은 형님 돈을 갚지 못해 형수 볼 낯이 없어 집안 행사도 불참하곤 했다. 

어려운 사람에게는 시간이란 큰 선물이 있어 좋다. 암흑이 아무리 어두워도 새벽 여명을 이기지 못하듯이 모든 역경은 ‘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격언을 삶에서 듬뿍 느낀 규혁이다. 결혼 생활 10년 조금 넘게 행복하다가 현주가 어머니와 짐 사 들고 가출한 후 10년이 흘렀다. 규혁의 나이도 50을 넘어서고 있다. 10년을 아들 창명이 잘되라고 기도하고 장모 빨리 죽고 현주가 돌아오길 학수고대(鶴首苦待)했지만, 그 소원은 끝내 규혁이에게는 오지 않았다.      

 규혁이의 생활이 풀리기 시작했다. 아끼고 모아둔 돈으로 상수도 사업권을 사들여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24평이지만 임대 아파트에도 입주했다. 경제적으로는 좀 좋아졌지만, 마음속에 창명이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럴 즈음에 현주를 만났다. 얼굴은 옛 모습 그대로다. 

현주가 규혁을 찾아온 이유는 돈이 필요하단다.

“창명이 아빠 창명이 대학가야 하는데 돈 좀 주세요.”

“인간의 탈을 쓰고 만나자마자 돈소리가 나오나?”

“내가 얼마나 다급하면 이렇게 찾아오겠어요. 그러니 아무 말 하지 말고 돈 좀 주세요.”

“창명이는 왜 아버지 보러 안 왔지?”

“창명이는 아버지 없다고 생각해요. 아버지를 죽일 만큼 밉다고 해요.“

”내 재산 모든 것을 앗아가고 무슨 염치로 돈을 달라는 거야?“

규혁의 음성이 차츰 분노로 치닫고 톤도 높아져 갔다.

찻집의 주변 사람들이 힐금힐금 쳐다보기 시작했다.

”돈을 주실 거요. 안 주실 거요.“

”돈이 필요하면 창명이 들고 집으로 와라. “

”그건 안 돼요. 엄마가 죽을 거예요.“

”누가 더 중요한가 문제가 아니라 자식이 아버지하고 살아야지. 외갓집 식구하고 사는 게 어디 있나.“

”하여튼 엄마하고 떨어져 살 수 없어요.“

”누가 떨어지기 싫은데“

”처음 가출할 때는 엄마가 분리불안이 심했는데 이제는 저도 안 돼요. “

”그럼 창명이를 나에게 보내라“

”그건 창명이가 원하지 않아요. 지금도 아빠라는 말 하나도 꺼내지 않아요.“

”헛수고했네. 땡전 한 잎이라도 줄 수 없으니 그냥 가세요.“

”무슨 아버지가 그래요. 자식 교육을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데 그걸 거절해요. 

아버지 맞아요. “

규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찻집을 나왔다.     

어두운 밤에 혼자 아파트를 지키는 것이 싫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을 체념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오랜만에 중학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도 친구는 다정하게 전화를 받는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소주 한잔 약속하고 술집으로 갔다.

상갓집에서 한 번씩 보았지만 이렇게 술집에서 마주 앉기는 처음이다. 

삼겹살 5인분에 소주를 시키고 한잔한다.

”무슨 일 있나? 네가 우에 전화를 다 하노. 그것도 술 먹자고“

규혁은 자신의 처지를 조금 이야기하면서 혼자 살게 되었다며 앞으로 종종 한잔하자고 부탁하자 친구도 기꺼이 응대한다.

그러면서 이번 일요일 중학교 동기들이 산악회가 있는데 같이 가자고 한다.

규혁은 등산화도 장만하고 등산복도 마련했다.

일요일 약속 시간에 도착하니 친구가 와 있었고 조금 후에 관광버스가 도착했다.

차에 타면서 친구가 규혁이를 소개한다.

대부분이 중학교 동기라 환대해 준다.

초등학교 동기들도 있다. 초등학교 동기가 옆에 앉으니 산악회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28명 정도 되는 산악회다.

오늘은 영동 천태산에 간다고 한다.

천태산 입구에 은행나무가 멋있고 산은 그리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올라갈 때 군대 유격하듯 밧줄을 타고 가야 했다.

하산길도 같은 곳이 아닌 반대편에도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험한 산이다.

저녁 식사하면서 산악회장이 규혁을 자세히 소개한다.

힘도 세고 의리 있고 잘 생기고 공부는 우리 둘 다 별로였다. 하자 모두 손뼉 치고 웃는다.

그러면서 지금은 사업가로 열심히 사는 친구인데 우리 산악회에 가입시키고 싶다.

회비도 면제해 주겠으니 가입하라고 권유한다.

규혁은 지갑을 꺼내 십만 원을 찬조하자 동기들이 큰 박수로 산악회 가입을 축하했다.

규혁은 20년 가까이 사회생활을 소극적으로 하다가 이제 아주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평소 술을 자주 마시던 친구가 소주 몇 잔 먹고는 의미심장한 말을 규혁에게 던진다.

”규혁아! 재혼은 안 할 끼고, 연애는 한번 해 볼레“

한참 규혁의 표정을 살피더니

”우리 동네 여자가 우리보다 세 살 적은데 남편을 일찍 여위고 혼자 사는데 참 이쁘고

착하다. 그냥 젊은 나이에 혼자 그렇게 사는 것 보니 애처로워 너 정도의 인품이나 의리가 있으면 만나도 될 것 같아 너에게 권해 보는 거다“

규혁은 손사래를 치며 여자는 꼴도 보기 싫다. 너하고 술이나 마시면 되지 여자는 무슨 여자고. 나는 저녁에도 여자 별로 안 좋아한다.     

 사흘 후에 다시 술집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고 규혁은 퇴근하자마자 술집으로 갔다.

친구와 낯선 여자 한 분이 앉아있다.

현주하고 착각할 정도로 외모가 비슷하다.

깜짝 놀란 규혁은 한발 물러서다가 자세히 보니 다른 여성이다.

친구가 여자를 소개한다. 우리 마을 후배인데 한잔하자고 동석했다.

‘괜찮제.”한다.

“그럼 괜찮고 말고지. 오늘 내가 술 사께. 소고기 먹자”

규혁이 친구가 민망할까 봐 아주 적극적으로 술자리를 주도해 갔다.

그날 규혁은 술에 흠뻑 젖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집이다.

기억이 하나도 없다.

휴대전화기도 있고 지갑도 있고 모든 것이 말짱하다.

규혁은 초면에 여자에게 실수한 것은 없나?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진다.

뭐 같이 살 것도 아닌데 실수했으면 다음에 만나 사과하고 안 했으면 다행이지 하면서

일터로 나갔다.

일에 열중하다 보니 지난 밤 있었던 일은 까맣게 잊었다. 

평소보다 더 열심히 일하여 하루 예상보다 일의 진척도 빨랐다.

기분 좋게 퇴근하는데 전화번호가 저장 안 된 전화가 걸려 온다.

보통은 거의 받지 않는다. 운전 중이기도 하지만 모르는 전화 받아 좋은 기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싶어서 받아보니 

“저 기억하겠어요. 몸은 괜찮으세요.” 

목소리가 엊저녁 술자리에 동석한 여자분이다.

아무 기억이 없는 규혁이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엉겁결에 저녁 안 드셨으면 저녁이나 같이 먹읍시다.

갑자기 제안했는데 아무 조건 없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오늘은 술집이 아니라 밥집으로 약속하고 시간이 되어 가 보니 미리 와 있다.

“어제저녁에 기억이 하나도 없습니다.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 호호 네 큰 실수 했어예. 기억이 하나도 없다고 하니 내 마음대로 이야기 지어내도 인정하시겠네요,” 하하 웃는다.

민망한 표정으로 멋쩍은 미소를 보내던 규혁의 눈이 반짝인다.

어제저녁에는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오늘 자세히 보니 눈동자가 맑고 미소가 청순하다.

오랫동안 등한시하던 여자였는데 오늘 저녁 마주 앉아 자세히 보니 참 아름답게 느껴진다. 

현주와 행복했던 짧은 시간이 규혁의 뇌리를 스친다.

“어제 내가 실수했다면, 이해해 주시고 오늘 그 댓가로 밥을 사 드릴게요?”

“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지요.”

규혁은 점점 난처해진다.

엄마와 누나 빼고는 여자를 미워했던 규혁이라 어제 관심이 없었기에 아무 기억이 없었다.

“이제 꼭 기억하세요. 내 이름은 홍혜진입니다. 나이는 오빠보다 3살 적고요”

규혁이는 머리가 종에 부닥친 것처럼 “띵”하는 소리가 난다.

오빠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하단 말인가?

“오빠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이 오빠 정말 기억이 없으신가 보네. 어제 오빠 하기로 하고 러브샷도 했는데?”

그리고 “전화번호도 오빠 손으로 입력하면서 다음에 맛있는 것 사준다고 약속했잖아요.”

규혁이도 엊저녁 일이 어렴풋이 떠 오른다. 노래방 간 기억도 난다.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술에 취했네요. 미녀와 함께 마셨더니 미모에 취해 더 많이 취한 것 같습니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규혁이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한다.

혜진과 규혁은 다음에도 자주 연락하자며 저녁을 먹고 일어섰다.     

 홍혜진은 7공주 집안의 막내딸로 대구에 있는 여상을 졸업하고 은행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남편을 만나 아들 둘을 낳아 키우다가 남편이 교통사고로 10년 전에 혼자의 몸이 되었다. 이제 아들 둘도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여 각자 자기 길을 걷고 있다. 남편의 사망 보험금으로 그리 어렵지는 않게 생활해 오다가 마을 오빠가 규혁이를 소개해 준 것이다. 규혁을 첨 볼 때 규혁이의 인물에 반해버렸다. 나이가 50 중반인데 웬 인물 타령이고 할 것 같아도 잘생긴 이목구비에 술에 만취해도 선을 넘어서지 않는 규혁이가 마음에 쏙 들었다. 인제 와서 결혼하여 얽매이고 싶지는 않고 외로운 사람끼리 친구처럼 애인처럼 지내고 싶었다. 남편과의 결혼 생활도 좋았기에 남자에 대한 증오심은 없었다.     

 규혁과 혜진은 친구처럼 애인처럼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거나 휴일에 가까운 곳에 여행도 다니며 혼자 된 중년의 기쁨을 만끽했다. 규혁은 고정된 돈은 아니지만, 일정한 돈을 혜진에게 제공했고 혜진은 냉장고에 반찬이 떨어지지 않도록 관리하면서 늙지도 젊지도 않은 육체도 한 번씩 불사르곤 했다. 그 시간이 8년이 넘어서고 있다. 둘 다 행복이 가득하다.     

 늦은 가을 수목원 국화 축제에 규혁과 혜진은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아주 다정스럽게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걷는 모습이 청춘 남녀의 데이트 모습이다. 규혁도 이제 환갑을 넘었고 혜진이도 내년에 회갑이다. 비록 처음 만난 사람과 평생을 같이 살지는 못했지만 십여 년은 아름다운 만남으로 살아가고 있다. 양쪽 집안 부모님은 모두 고인이 되었지만, 형제자매들은 두 사람의 사귐을 진정으로 축복해 주고 있었다. 둘만이라도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라고 덕담을 건넨다. 그날 규혁과 혜진의 데이트를 남몰래 미행하는 자가 있었다. 우연히 본 것인지 아니면 오래전부터 두 사람의 동선을 따라다녔는지 모르지만 지켜보고 있었다.     

 현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규혁은 자기를 버릴 수 없다고 믿었는데 다른 여자와 데이트한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주의 엄마도 나이가 85세가 되었다. 아직은 살도 피둥피둥 찌고 정신도 맑았다. 현주가 엄마에게 조용히 이야기한다.

“엄마 나 이제 김 서방에게 가면 안 되나?”

“가긴 어디를 가? 너 가면 나 또 따라간다.”

“엄마는 이제 오빠하고 살아. 왜 나에게 이렇게 매달리는 거야”

”난 너 없으면 못 살아. 내가 왜 김 서방을 내쫓았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엄마 나도 이혼한 여자란 소리도 듣기 싫고. 또 엄마 때문에 창명이가 군대도 못 가고 저리 정신적으로 문제 많은데 이제 저희 아버지에게 가서 치료라도 해야 안 되겠어.“

”남자라는 건 병신을 만들어 놔야 한다. 너희 아버지 절에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창명이도 좀 모자라야 우리하고 평생 살지. 똑똑하면 또 우리를 버린단다.“     

 일주일 후 ’일가족 자살 사건‘이란 제목으로 지역 신문에 게재되었다.      

                            2021.11.2. 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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