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심(平常心)
아침 출근길에 문득 중학교 1학년 시험 친 기억이 났다. 그 당시 커닝(cunning)을 막기 위해 1학년과 3학년을 번갈아 앉혀 시험을 치는데 내 옆에 같은 마을에 있는 형 친구가 앉아 수학 시험을 치는데 답을 적지 못해 옆에 앉은 3학년 답을 시험지에 적어서 보여 주려다 감독 여선생님에게 들켜 현장에서 내 점수와 관계없음을 확인하고 뺨을 몇 대 맞는 것으로 문제는 종결되었지만, 다음날 등교 시간에 몇 명이 모여 나를 커닝하는 나쁜 학생으로 이야기하며 걸어간다. 시간이 50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은 기억이다.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인데 왜 나와 상관없는 일에 부정행위를 하였을까? 아직도 의문이 가는 점이다. 정답은 어리석기 때문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착한 마음을 헤치는 번뇌로 3가지 독(三毒) 즉 탐욕(貪), 성냄(嗔), 어리석음(痴)을 제시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욕심은 있다. 생존의 욕심, 성장의 욕심, 건강의 욕심, 명예의 욕심 등 다양한 욕심이 있다. 욕심이 개인적 삶의 선한 목표 달성이나 공동체 또는 국가적 목표 달성의 원동력이기에 욕심 자체는 독(毒)이 될 수 없다. 욕심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열정이 될 수 있고 꿈과 목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욕심을 과(過)하게 추구하는 일을 탐욕이라 한다. 탐욕은 늘 화(禍)를 자초한다. 욕심과 탐욕을 구분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 이론적으로는 능력에 부합하는 활동은 정상적인 열정이고 자기 능력에 위배 되어 반칙을 도입하는 일을 탐욕이라 규정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능력을 가늠하는 일이 어렵기에 탐욕을 쉽게 규정하기 어렵다. 성경에도 악인은 그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 시편 10편 3절 - 어쩌면 탐욕은 행위의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성냄(嗔) 즉 성(嗔)은 왜 날까? 보통은 자기의 미비함에서 찾으려 한다. 자신의 미흡함과 상대와의 비교에서 화가 치민다. 그 상대는 늘 자기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자세히 생각해 보면 삶에 ‘걸림돌’이 있어 화가 난다. 삶의 목표를 향해 가든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든 걸림돌은 있기 마련이다. 인간관계, 경제적 문제, 사상에서 오는 문제, 건강, 가치관의 문제에서 걸림돌이 많이 생긴다. 이 모든 문제의 바탕에는 ‘아집(我執)’이 있다. 화가 치미는 순간 아집이 극대화된다. 이유는 화가 나는 원인이 자신이 아니라 남들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자기의 아집 즉 화의 씨앗을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나 불행의 원인이 타인에 의해 발생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서로 다툴 때 연세 많은 분이 빙그레 웃으며 “둘 다 비슷한데 왜 싸우지” 하는 모습 보면 우리가 얼마나 아집에 갇혀 사는지 깨닫는다. 한 발짝 물러서서 자기 자신을 관조하는 성찰이 화를 덜 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관조(觀照)하면 걸림돌이 자기의 크나큰 자산이 됨을 명심하자.
어리석음(痴)은 누구에게도 벗어날 수 없는 개념이다. 내가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을 극복하기 위해 무명(無明)에서 벗어나 반야(般若)를 보는 예지력(叡智力)을 키우도록 강조한다. 그러나 범부(凡夫)는 쉽지 않다. 오직 부처님이 가진 능력을 인간의 노력으로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쉽지 않다고 포기하면 안 되는 것이 인간이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똑똑해지고 싶어 배우고 익히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모습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명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본질에 접근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오늘도 어리석게 하루를 보낸다. 일반인의 깨달음을 표현한 소설을 인용해 보자.
「중생도 영리(營利)와 우둔(愚鈍)한 것이 다섯이니.
1. 남의 무상(無常)을 보고 깨닫는 것.
2. 지식으로 무상(無常)을 배워 알아 홀연히 깨닫는 사람
3. 형제나 친척의 무상(無常)을 보고 깨닫는 사람
4. 부모의 무상(無常)을 보고 깨닫는 사람
5.자신의 인생에서 매우 괴로운 고통을 겪고, 무한히 고뇌하여 피가 마르는 참경(慘景)을 당한 후에 만신창이가 되어, 옆의 사람이 해주는 충고를 듣고서야 비로소 깨닫는 사람.
그러나 이 또한 마찬가지이니 이 모든 일을 겪고, 잃고 나서 드디어는 깨달을 수만 있다면, 아둔하다 하여도 서러울 필요가 없으련만……. 내가 깨달아 본들 한 인간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력을 허비했는지……. 그래도 아직 무지몽매(無知夢寐) 암흑천지에서 제 발부리에 제가 걸려 코 깨지고 박 터지면서, 영문도 모르고 길가의 돌멩이 탓 원망하면 살다가 무명(無明) 속에 한세상 헛 매 맞고 가는 나의 인생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소설 불꽃 발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분석해 보니 한 가지에서 출발함을 볼 수 있다. 바로 ‘마음(心)’이다. 마음은 사람의 내면에서 성품, 감정, 의사(意思), 의지를 포함하는 주체이다. 지각하고 사유하고 추론하고 판단하며 자신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원효 스님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설파하신 모양이다. 마음은 간사하기 그지없다. 지속성, 의리, 영구성, 절대성, 인내력, 항상성(恒常性)이 지닌 속성보다는 자기 이익이나 자기 보호, 순간적, 상대성을 더 선호(選好)한다. 자기 마음은 평상심을 고수(固守)한다고 자부(自負)할지 모르지만, 남이 판단할 때는 변화무쌍하다고 할 것이다. 또한 나 자신이 상대의 마음을 알기도 어렵고 믿고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가장 가까이 지내는 부부조차도 믿지 못해 정신질환을 겪는 사람도 있고 헤어짐을 쉽게 결정하는 사람도 많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어렵다. 마음을 다스리지 않고 마음이 일어나는 대로 행동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대재앙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마음 다스림을 위한 방법으로 명상과 참선을 많이 권유한다.
최근에 상대를 배려한다는 생각으로 한 행동이 오히려 나에게 해(害)가 되어 돌아와 마음을 다친 적이 많다. 상대의 행동을 칭찬하였다가 낭패를 본 경험이다. 한가지 행위에 칭찬하니 모든 일에 연계하여 잘 났다고 떠들고 다니는 주변 인물이 너무 많이 있다. 학생들은 칭찬이 성장의 동력이 된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 마음이 맑지 못한 성인에게도 칭찬을 스스럼없이 한다. 이것이 독이 됨을 볼 수 있다.
현직에 있는 마지막 스승의 날이다. 40대 후반 제자는 떡으로 교무실 선생님에게 대접하고 30대 제자는 커피를 전 선생님에게 배달하여 나를 기쁘게 한다. 50대 제자는 건강음료를 선물하고 30대 현직 고등학교 교사는 “선생님에게 배운 사랑을 학생에게 전파하니 학생들에게 인기 좋다”고 고맙다 한다. 20대 초등학교 교사는 긴 편지로 선생님과 같은 존경받는 비결이 알고 싶다고 하고 올해 부산대학교에 입학한 제자는 보고 싶은데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고 40대 제자는 “10대 소중한 기억 속에 함께 해주신 선생님”이 고맙다고 한다. 보내준 편지와 선물을 적으려니 부끄러워 이만 쓴다. 이렇게 주변에 평상심을 가진 제자가 많다. 나의 어리석음에 고개를 숙인다. 2024. 5. 16 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