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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인포레스트 Oct 16. 2024

만 스물의 단상

버팀목


"매몰차다." 

  이 말을 내뱉으려 여러 번 시도하던 너는, 끝내 포기했다. 다리를 건너는 자들의 호흡 리듬을 철저히 무시하는 바람의 예리하고도 무차별적인 공격성 때문이었다. 코로 숨을 쉬는 것을 포기하고 입으로 호흡을 해야 했다. 구강호흡을 시작한 너는 코로 숨을 쉴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입을 벌려 더 많은 공기가 입에서 기도로, 마침내 폐에 도달하기를 바란다. 애석하게도 바람과 달리 변화무쌍한 풍향의 변덕은, 빨아들인 공기 사이를 계속 침범한다. 뱉어도 어느 틈에 비집고 들어와서 입 구멍을 쑤신 김에 콧구멍도 건드리고 가는 영악한 바람을, 너의 규칙적인 호흡으로 감당할 재간이 없다. 숨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 이쯤 되니, 물속에서 숨 참기 놀이를 하는 것처럼 서서히 폐 부근이 갑갑해진다.      

  네가 연약해진 순간임을 눈치챈 듯 날이 선 강바람은 냉담하고 단호한 한기로 무장하여 대기를 속속 칼날로 난도질한다. 턱부터 두 뺨을 지나 광대뼈 부근까지의 감각이 한 마디 간격으로 무뎌져 가고 있는 걸 그대로 느끼며,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어도 보고, 숙여도 보고, 맞서도 보려고도 했다. 그렇다고 언 감각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요. 바람이 멈추는 것도 아니지 않나. 무엇보다 겁이 난다. 감각을 하나씩 잃어가는 것이. 무섭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빼앗기는 것이 있다는 것이. 본능적으로 코트 주머니 안에 꼭 쥔 주먹을 꺼냈다. 작은 손바닥 언저리에 맴도는 따뜻한 체온이 무색하게 신바람 난 칼춤 사이로, 너는 패딩형 양털 코트 안으로 목을 넣고는 카라를 얼굴 광대뼈까지 세운다. 얼른 따뜻한 체온이 감도는 코트 안으로 얼굴을 파묻고는 까슬한 입술을 안착시켜 입을 벌린다. 곧장 입 언저리를 계속 서성거렸던 말이 튀어나왔다. 턱 근육이 얼어 긴 문장을 구사하기 힘에 부쳐, 단어를 닮은 문장으로.          

"죽겠다."

  얼굴을 집어넣고 이런 생각이 스쳤다. 한기에 베여 빨갛게 부어오른 두 뺨의 통증이 조금은 가시니 고작 바람이 좀 매몰차다고 죽음을 생각한 자신을 향한 생각이었다. 나약해, 비겁해, 한심해. 쓸데없이 겁이 많아서는, 죽지는 않았잖아.  코트 안으로 고개를 숙여 집어넣은 표정이 멋쩍게 일그러진다. 입꼬리가 살짝 들어 올려지며 건조해서 갈라진 입술이 순간 벌어짐과 동시에 따끔한 통증에 순간 감각이 상기한다. 혀로 입술을 핥으니 옅은 피 맛이 혀에 감돌았다. 표정은 금방 원래대로 돌아온다. 훈기로 가득 찬 코트 안에서 김이 서린 안경알 때문에 곧장 갑갑함을 느낀 너는, 다시 찬 공기에 입술을 다시 맞대고픈 심정이 굴뚝같이 솟아오른다. 너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대로, 신체는 신체대로 각자의 괴로운 사정에 골몰하고 있는지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예측 불가한 강풍을 별 저항 없이 따르고 있는 다리의 난간이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이 너의 눈에 박힌다. 다리에 의지할 수 없다. 지금 기대면 무게를 견디지 못해 떨어질 것이다. 다리를 다 건너려면 아직 한참인데. 걸어야 하는데. 가야 하는데. 바람이 멈추는 것을 기다려야 할까. 갑갑했지만 따뜻했던 품속으로 얼굴을 한동안 또 집어넣어야 할까. 갑자기 하얀 목티에 둘러싸인 따뜻한 목이 찬 바람에 맞닿을 수 있도록 꺼내어 목을 뒤로 완전히 젖히고는, 어차피 칼춤 바람에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어딘가에도 닿지 않을 말을 쏟아낸다.    

  "너의 마음속에 방 한 칸을 빌려 잠시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러면 대기를 사선으로 가로지른 무언의 눈동자에서 흘러내리는 굵은 폭우의 느닷없는 비명에도 견딜 수 있지 않을까. 땅 위를 딛고, 걷고, 뛰고, 날고, 달아나고, 숨어버리는 것들의 생채기에도, 낮 밤의 극심한 기온 차의 변덕스러움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어느 날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볕에 눈이 시릴 때, 영롱하다고, 따사로움을 건네준 그 시간 동안 행복했었다고 진중하면서도 간절한 어조로 고마움을 전할 텐데. 코트에 얼굴을 파묻는 것이 답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어. 그렇다면 차라리, 그냥 차라리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아주 먼 과거부터 당신의 마음이라 생각할게. 무형(無形)의 당신 품 안에서 태어나 여태껏 사(死)의 세계를 운 좋게 피해 다니며 당신을 이렇게 만나고 있다고. 내가 여태껏 죽지 않고 살아온 대가로 당신의 눈물과 비명과 고통과 괴로움을 마시고 있다고. 어떤 때는 나한테까지 전염된 당신의 힘듦을 짊어지기가 버거워 오해와 원망의 탑을 쌓으며 홀로 외로워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랬던 나를 당신은 또 영영 떠나지 않았기에 다시 만나던 어느 날 영영 죽었을 거라 여겼던 불씨가 사실은 살아있었음을 알게 되었지. 이건 당신이 알려준 거야."

  너는 이상한 안도감을 느낀다. 바람이 멈췄으면 싶은 마음은 허공의 틈 속으로 융화되었다. 움직였다.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다리에 신경을 모아 한 발 한 발 사그라질 듯 솟아오르는 흐름을 천천히 헤어 걸어간다. 무형(無 形)의 얼굴을 주머니에 푹 찔러 넣은 손가락으로 그려보며, 그렇게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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