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의 깊이
또각또각 경쾌한 구두 굽 소리와 함께 교수님께서 강의실로 들어오셨다. 한 손에 커피를 담은 일회용 종이컵을 들고는 그다지 높지도 낮지도 않은 단상 위를 잰걸음으로 올라오셨다. 아마 봄의 완연함이 대기 중을 완전히 뒤덮기 전으로 기억한다. 손끝이 연하게 아려오는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던 그날의 어린 나는 평소에 자주 입고 다녔던 검은색 코트를 걸치고 수업 교재와 노트로 가득한 검정 손가방을 곁에 두고는, 여느 때와 같이 전자교탁 바로 앞자리에 앉아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뵙는 교수님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나의 시선은 곧 하얀 거즈에 꽂혀버렸다. 교수님께서 들고 계시던 일회용 컵을 잠시 전자교탁 컵홀더 구멍에 내려놓으실 때 당신의 검지 두 마디 정도를 감싸고 있던 하얀 거즈였다. 왼손인지 오른손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크게 다치신 건지 , 상처 부위를 거즈로 좀 두껍게 감으신 모습만 기억할 뿐이다 . 그러나 교수님의 다친 손가락에 대해 걱정하는 학생은 없었다 . 어디서 다치신 건지 궁금해서 여쭤보고도 싶었지만, 내면에 파묻혀 사는 게 편했던 터라, 걱정 어린 목소리로 교수님의 손가락 상태를 여쭐 용기는 없었다. 신체적 거리는 가까워도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는 형국이란 이런 상황에서 쓰는 표현인가 보다. 지금 보니 딱 그랬었다. 그러나 교수님은 학생들의 무관심에 개의치 않으셨고, 그저 수업 화면을 스크린에 띄우기 바쁘셨다.
계절의 한 조각과 얼굴과 이름, 목소리와 눈빛, 만 열여덟의 내가 있던 공간은 이미 폭포를 닮은 시간의 흐름 속으로 사라져 버린 지 오래되었고, 대부분의 수업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흘러갔는지 이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남은 것은 오직 말, 말뿐이었다. 말만은 기어코 살아남았다. 한참 수업을 진행하시던 교수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그 맥락의 연유에 대해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확실한 건 그 이야기로 인해 하얀 거즈와 나 사이의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무언의 작은 친숙함이 생긴 건 분명했다. 지극히 파편적인 형태로 두둥실 떠오른 흐릿한 윤곽만이 대부분이지만 어떤 기억은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흔적이 되어 뇌리에 남는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방황을 좀 했거든. 그때 거의 모든 수업을 땡땡이치고 가지 않았었는데 나중에 성적표를 받아보니 학점을 보니 온통 F밖에 없더라고. 그러니까 학과에서 거의 꼴등이나 마찬가지였지. 당시에 F학점 받은 걸 가지고 자랑을 하는 학생들이 있었어. 철없게시리(웃음). '인생이 뭐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많이 흔들리던 어느 날에 무일푼에 충동적으로 배낭 하나만 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던 적이 있었는데, 돈도 없는 상황에서 갈 곳이 없잖아? 그래서 서울역 대합실을 그냥 서성거리고만 있었는데 대합실에 노숙자 아저씨들이 많았어. 대합실 의자에 앉아서 노숙자, 거지 아저씨들을 그냥 한참 관찰하다가 의자에서 쪽잠을 자고는 이렇게 사는 건 진짜 아니다 싶어서 결국 얼마 못 가 돌아왔어.“
스크린 사이를 넘나들며 시원시원한 언변으로 대학생 시절 서울역에서 겪었던 방황 에피소드를 말씀하시던 교수님은 화이트보드로 향하시더니, 매직으로 세모 모양의 깃발을 이곳저곳 느낌 가는 대로 그리시고는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원하고, 하고 싶고, 된다고 믿었던 것, 유형의 어떤 마음들로 겹겹이 뭉쳐졌었지만, 어느 순간 무형이 되어버린 것을 교수님은 칠판에 그리고 계신 것이다. 교수님은 당신이 방금 화이트보드 위로 새긴 깃발들 위로 하얀 거즈를 두른 손가락을 스치듯 가리키셨다.
"앞으로 너희들이 살아가면서 각자 헤맨 만큼 나름의 깃발들이 여기저기에 꽂혀있을거야. 그런데 방향도 목적도 없이 그저 느낌으로 꽂은 깃발이 대부분이라 가까이서 보면 깃발들이 보기 좋게 꽂혀있지 않고,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거나, 기존에 꽂았던 깃발이 쓰러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거야. 지나가던 주변 사람들이 여러분들이 꽂은 깃발을 보면 무슨 말을 할까? 아마 깊이가 없다고들 말하며 혀를 차거나 그러겠지. 하나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분명 지적들 할 거라고. 그들의 생각을 부정하지 않아.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봐. 그런데 자기 나름대로 여기저기 길 찾겠다고 꽂은 깃발들을 이렇게 선으로 연결하면, 이렇게 하나의 도형이 되잖아. 이 평면상의 도형을 세로로 세운다고 생각하면 어떨 것 같니? 시간이 지나 나름의 깊이가 되지 않을까?“
'너비는 나름의 깊이가 된다.‘
머리가 화해지는 느낌이 강렬하게 몰려왔다. 그 누구한테나 방황의 문지방은 턱없이 높을 것이다. 개개인이 품고 있는 암울한 질문에 대한 답들이 당장 보이지 않는 막막함 때문일 거다. 인간은 불안에 가장 취약한 동물이니까. 변화란, 육안(肉眼)으로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지극히 더딘 속도로 진행되기 때문에 당장은 뭔가 제대로 한 것도, 된 것도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긴 시간 동안 각자 머물었던 공간에 세운 여러 깃발이 분명 남아있을 것이다. 땅바닥에 깊게 꽂힌 깃발, 썰물과 밀물이 오가는 갯벌의 한가운데 피사의 사탑처럼 기운 형태의 깃발, 이미 쓰러진 깃발 등, 쓸모없어 보였던 그것들은 훗날 연결이 되어 보이지 않는 너비의 형태로 어디엔가 확실히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미완의 도형을, 또는 완성된 도형을 세우지 않았을 뿐일 거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깊이 속에 또 다른 커다란 도형을 그리고 있을 거다.